*수정을 많이 하지는 않고 1~2문장 추가했습니다. 피드백 반영해서 좀 더 내용이 자연스러워지도록 수정했습니다.
나는 집착하는 것들이 있었다. ‘애정 어린 사람들의 눈빛, 금빛 명예, 넘치는 돈’과 같은 것들이었다. 채울수록 행복해지리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더 원하게 되면서 불안해졌다. 그래서 어느 날 이 모든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23년 여름, 교환학생을 간다는 핑계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작별을 위한 여행이었다.
미국에 가니, 집착할 겨를이 없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한정해두다 보니 영원한 것이란 없었다. 그래서 물건이든, 인간관계든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친해진 친구가 어느 날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부둥켜안고 파티를 즐기다가 그 시간이 끝나면 다시 모르던 사이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딱 6개월만 사용할 물건들이었기에, 쓰고 버리자는 생각으로 싸구려를 골랐다.
그렇게 끝이 정해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학식을 먹다가 사진작가 P라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그중에서 사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다, 나도 사슴 보고 싶은걸?” 그 말을 듣고 P가 미소 지었다. “이거 국립공원에서 찍은 건데 사슴이 새벽에만 나와서 찍기 힘든 사진이었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사슴을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더라.” 무언가를 원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것을 아끼는 친구의 두 눈에는 행복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왠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모든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계획했던 대로 한 명도 빠짐없이, 천천히. 그렇게 모든 이별을 고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마음으로 미국의 여러 도시를 홀로 여행했다. 2023년의 마지막 날, 나는 뉴욕의 루스벨트 아일랜드에 갔다. 뉴욕 맨해튼과 퀸스를 연결하는 섬. 맨해튼의 화려한 마천루와는 다르게 탁 트여있고 건물 몇 개만 늘어서 있는 작은 섬이었다. 집착할 만한 대상이 없으니 오히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발 닿는 대로 걷다가 한 중국집에 방문했다. 마침 그곳에는 나 외에는 어떤 손님도 없었다. 저녁을 먹다 보니, 자연스레 그곳을 운영하는 중국인 K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식당을 운영하기 전에 시험 삼아 뉴욕에 왔는데, 생각보다 식당이 인기가 많아서 6달 후에는 아일랜드로 갈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왜 미국에 왔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기 위해서 왔어.”
내 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K와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2024년까지 5시간을 남겨뒀을까, 슬슬 이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니, K는 “새해 복 많이 받아. 다음에 또 보자!”라고 말했다. “다음에 또?”라는 말을 했더니 K는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거야”라며 뜻밖의 말을 건넸다.
K의 말을 되뇌이며, 새해 카운트다운을 보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끼어 함께 카운트다운을 기다렸다. “반가워, 안녕!” 이렇게 인사를 건네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새해가 다가왔다. “five, four, three, two, one...HAPPY NEW YEAR!” 하늘에서 쏟아지는 꽃가루를 보고 있으려니, 수많은 사람이 한데 엉켰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새해 인사를 건네면서 서로 얼싸안았다. “오늘 너를 만나서 반가웠어! 우리 다시 만나!” 분위기에 취해서였을까. K가 내게 건넸던 인사를 어느 순간 나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남을 약속하는 인사말 속에 둘러싸여 2023년과 작별하는 동시에 2024년을 맞이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 그 말을 다시 하면 이별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는 말이 된다. 작별하기 위해서 떠난 미국에서, 도리어 많은 만남을 약속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 후로 한국에서 평범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연락이 끊겼었던 사진작가 P에게서 한 메시지가 왔다. 그것은 바로 ‘사슴 사진’이었다. 그 밑에는 ‘네가 사슴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한 번 더 사슴을 찾기 위해 국립공원에 갔었어’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순간 눈물이 나왔다. P와 영원한 작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K의 말처럼 다시 또 만나게 된 것이다. 작별하지 않았다.
무언가와의 관계는 집착하지 않더라도 아끼는 마음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순간, 내가 전전긍긍하지 않더라도 나의 진심이 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P의 메시지를 보고서 진심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는 “우리의 시간이 짧았지만, 그 순간들은 영원할 거예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여행에서도 모든 집착이나 잡념을 버리고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기면, 그 순간은 영원히 남는다. 그렇게 나의 미국 여행기는 서두르지 않는 영원을 기약하며 끝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