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 장애인의 날을 맞으며
2002-04
받 아 들 임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우리말 가운데 “낯가림”이라는 말이 있다. 어린 아이가 낯선 사람 대하기를 싫어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세상의 이루어지는 일들을 그 밖의 일로 낯설어하면서 서먹하게 대하는 예가 흔하게 있다. 나와 다른 일이 벌어질 때에는 외면을 하거나 나아가서 냉대를 일 삼아서 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되어 나의 눈앞에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가름하게 되는 일로 다가들 때에는 타산(打算)의 속셈을 요량해본다. 그 후에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해(害)가 된다고 여겨지면, 그들은 지체 없이 그 일을 배격하려든다. 나의 주변에 찾아드는 일을 애써 가로막으려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의 일로 인하여 “님비현상”[ NIMBY - not in my backyard.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는 뜻) 쓰레기장, 핵 폐기물, 원자력 발전소 등을 자기가 사는 지역에는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 ]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장애인 모임이 어느 곳에 들어서려 할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는 다음과 같이 말 할 것이다. “저들이 여기에서 하려는 일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데,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해는 되고 납득도 되는데......” 우리의 일상(日常)의 일들은 이해할 일이 있고, 이해에 머무르지 말고 받아들이기까지 하여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방송의 얘기를 듣다보면 “이제는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어져서, 사람들이 장애인들을 많이 이해하게들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될 때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그리 바람직한 말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장애인이 이해의 대상이던가? 장애인은 대상(對象)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면 장애인은 장애인일 따름이다. 그러면서 함께 하는 구성원이다. 특별할 것도, 다를 것도 없는 보통사람이다. 옛 중국에서는 사이좋은 부부를 비익조(比翼鳥)라는 상상 속의 새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단다. 그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짝을 만나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 무리의 사람들은 얼개같이 짜임새를 이루고 산다. 예수님도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가복음 3:35)하고 말하였다. 사람 사는 공동체는 산만(散漫)한 여러 사람의 짜임새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를 넘어선 받아들임이 있어야 한다. 장애인은 자기의 장애됨을 받아들여야 되고, 사람들은 장애인을 받아들여야 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구체적인 나아감의 자리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앞지르며 나아 다니는 차(車)가 많아지면, 사람들은 그것에 따라서 차 다니는 길을 만든다. 이렇듯 장애인들에게 다방면의 길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닫혀져있던 문들이 더 열려져야 한다. 장애인들은 이웃사회의 한 복판에 들어서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는 주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아이들 말대로 “짱”이 한번 되어보면 어떻겠는가? 그런 일들도 한번 해볼 노릇이다.
세상은 열려지고, 장애인은 나아가야 한다.
공동체 이야기
흙 속 으 로
우리를 딛고 설 수 있게 하며, 사람에게 온갖 것을 안겨다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땅. 땅은 사람들에게 밟히고 밟혀지지만, 싫다하지 않고 사람들을 떠받들어준다. 그 위의 사람들은 요란스럽지만, 땅은 묵묵하다. 때로는 깎여나가기도 하고, 짓눌려지기도 한다. 집 앞의 흙 땅이 굴삭기에 의해 온통 파헤쳐지고 있다. 사람들의 편리를 위하여 거칠고, 고르지 못한 땅을 마다하고, 그 위를 단단한 돌과 같은 시멘트로 말끔하게 덮어씌우기 위한 터 파기 작업중이다. 앞으로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게 되겠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닫는 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발 굴음 소리만 듣는 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빛을 못 보는 암흑지대(暗黑地帶), 뒤덮여진 사지(死地)와 같은 곳이 되고 말 것이다. 굴삭기로 파헤쳐 놓은 흙을, 삽을 이용하여, 온 힘을 들여서, 평평히 골라, 그 위에 나무를 심었다. 심어진 것들은 자두, 은행, 장미, 라일락, 영산홍, 매화나무 등이다. 무척 힘을 들여 나무를 심는 것은 우선하기보다는 무던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흙을 파가며 가꾼다는 것은 미래 적이라서 좋다. 나무가 자라는 것은, 눈앞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이 급하게 자라갈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람살이도 생장(生長)하는 나무처럼 유유히 살아갈 일이다. 좀 늦으면 어떤가?
언덕 위의 부는 바람사이로 하얀 꽃이 핀다. 매화꽃이 피고, 벚꽃이 핀다. 노란 개나리, 연분홍의 진달래꽃이 핀다. 새하얀 복사꽃도 핀다. 작은 꽃잎들은 화려하고 사치스럽지가 않다. 그리고 곧이어 그 꽃은 아쉬움과 함께 잠깐 피었다가 지며 떨어지게 될 것이다. 같이 있던 자매가 돌연 떨어지는 꽃처럼 우리 곁을 떠나 주검의 몸이 되어 다가들었다. 꽃이 지면 잎이 나고 곧이어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건만, 청춘(靑春)의 삶을 보냈던 그 분에게 그 누가 감히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삶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꽃이든 때가되면은 바람결에 날려 땅에 흩뿌려지는 꽃잎이 될 것이다. 오늘 동료가 보내준 소식에서 그런 글귀를 접하였다. 김대건의 솔뫼 성지에 있다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우리는 돌아가기보다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만 있으면, 그곳으로 발을 더 내어 딛는다. 그러나 41세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지었다는 중국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문득 또 생각난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그 자매도 귀향(歸鄕)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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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박영근
김정옥
문창수
정무래
박종만
어귀녀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청양 병원에서 02년 2월 16일에 다시 오신 이유범 선생님께서 3월 29일에 대전으로 이사하셨습니다.
* 01년 6월 23일에 대전에서 오셔서 생활하시던 김귀숙 자매님께서 02년 4월 3일에 소천하셨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1인).성남교회안수집사회.최동주.박영근.베데스다선교회(박경애외1인).주식회사EG(이광형).살림교회(박상용.박향월외1인).어귀녀.문창수.김귀숙.이유범.김기홍.그리스도의집.왕지교회.채윤기(박현실).세광교회.만나교회(전남홍외6인).동산베이커리.박영근.예수마을.대전서노회.조종국외2인.김영창.박정도.옥천동부교회.주중교회(연제국.권은혁).그리스도의집.빈들교회.추부면사무소(배윤경).한삼천교회 박종만.박영근.대덕교회.이종국.유인숙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