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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무속(宮中巫俗)
이 시대의 궁중에서 호무(好巫)한 자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였다. 국내의 수구(守舊).개화(開化)의 정치적 대립과
국외의 여러 열강들의 간섭 속에서, 또 대원군(大院君)과 정적대결
(政敵對決)을 해야 했고, 극적으로 피신하고 환궁(還宮)하는 등 기괴한 운명을 느낀 그는 불안한 마음을 무속신앙(巫俗信仰)을 통하여 해소해 보고자 했다.
즉 대원군이 있는 운현궁(雲峴宮) 문전(門前)에 홍목마(紅木馬)를 세워 무녀(巫女)로 하여금 음해(陰害)의 무축(巫祝)을 한 일이며 이에 맞서 대원군은 무축하는 자를 잡아 죽이며[註2] 갑자년(甲子年,1864)과 광무 8년(1904)에는 서울의 무녀들을 성밖으로 축출(逐出)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비는 이성녀(李姓女)와 윤성녀(尹姓女)라는 무녀에게 진령군(眞靈君)과 현령군(賢靈君)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이렇게 민비가 무녀를 좋아하게 된 원인은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을 맞아 충주목사(忠州牧師)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관성제군(關聖帝君,관운장(關雲長))이 들었다는 이성녀가 그의 환궁시기를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 무녀는 민비를 배경으로 하여 궁중 출입이 잦았으며 항간에서는 이들을 대감(大監)이라고 불렀으며 이 두 무녀의 옷소매 속에서 방백(方伯) 수재(守宰)가 나온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 중 이유인(李裕寅)이란 사람은 진령군에게 잘 보여 양주목사(楊州牧師)에 오른 일이 있고 안효제(安孝濟)가 진령군을 주(誅)하고자 상소까지 한 것으로 보면 당시 이들 무녀의 세도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만하다.
한편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은 서울 무당(巫堂)의 지방 축출을 주장한 상소를 올렸으며 특히 참정대신(參政大臣) 민영환(閔泳煥)은 상소에서「무복잡술(巫卜雜術)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엄금해야 하는데도 법강(法綱)이 해이해져서 무당들은 요언요술(妖言妖術)로 민중을 약동시키고 심지어 그 무리를 만들어 법령을 문란케 하니 경무청(警務廳)에 영(令)을 내려 그 죄를 다스려야 마땅하다」고 했으며 왕은 이를 윤허(允許)하고 무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①무녀등을 경성으로부터 구축(驅逐)하야 지방에만 거주케 제한할 사(事).
① 무녀 행업(行業)에 대하야 세포(稅布)를 징수할 사
① 경성의 무녀를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부속(附屬)하야
전염병자 치료간호에 사용할 사.
그러나 그 명은 형식에만 그쳤을 뿐 무녀의 궁중 출입이 빈번했으니, 소위 진령군의 뒤를 이었다는 수연(壽蓮)이란 무녀가 당시의 그 예가 된다.
사실 위의 법령에서도 지방에 거주케 한다고 하고 동서활인서에 전염병 환자의 간호원으로 활용케 하고 또 무업(巫業)에서 세포를 징수한다는 것은 서울 무당의 지방 축출이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것 같다.
당시 민비는 궁궐을 비롯하여 근교(近郊)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 까지 10년 동안이나 모았던 대원군의 재정을 무축행사에 지출했다.
특히 연중 탄일(誕日)과 명절의 무축행사는 의례적이었으며 명산대천에서는 왕자를 낳기 위해서 또는 태기(胎氣)가 들면서부터 출산에 이르기까지, 출산후에도 세자(世子)의 전정(前程)을 위하여 무축(巫祝)을 통해 소원했을 것이다.
축원한 내용을 보면
「 봉축(奉祝)주상전하임자생성수만만세(主上殿下壬子生聖壽萬萬歲) 중궁전하신해생민씨성수만만세(中宮殿下辛亥生閔氏聖壽萬萬歲) 왕대비전신묘생홍씨만만세(王大妃殿辛卯生洪氏萬萬歲) 세자저하신미생민씨제년제년수제년(世子邸下辛未生閔氏齊年齊年壽齊年) 대원군경진생(大院君庚辰生) 부대부인무인생민씨(府大夫人戊寅生閔氏) 궁인부갑인생엄씨(宮人夫甲寅生嚴氏) 황자정유생아지(皇子丁酉生阿只) 상궁경인생윤씨(尙宮庚寅生尹氏) 상궁신묘생손씨(尙宮辛卯生孫氏) 기축중하일(己丑仲夏日)」
이 해(1882) 5월 무제(巫祭)의 장소와 제신(祭神)은 다음과 같다.
「 고양(高陽)반장 : 부정. 임진(臨津) : 부정, 감행, 호구, 제석(帝釋), 사해용왕(四海龍王), 산신(山神), 사궁.
장단(長端) : 금흔사, 말명, 호구, 제석, 산신부정(山神不淨).
감행당 : 부정, 감행, 제석, 성조(成造), 호구청조, 산신. 월정당 : 부정, 성조, 산신. 대행당 : 부정당, 대왕, 성조, 산신.
승당 : 부정, 성조, 산신. 정당 : 부정, 장군, 성조, 별군옹, 왕신, 임장군, 산신, 말명, 뒤전, 회정군.
한우물(대정(大井)) : 부정, 부아들, 감행, 성조, 군웅(軍雄), 물사슬, 산신, 뒷전.
섯우물 : 호구, 제석, 우물.
대국(大國) : 부정, 성조, 호구, 산신, 제석, 둑, 뒤전.
비각(碑閣) : 감행, 호구, 제석, 산신, 청조, 부정, 장단말명, 뒷전.」
위의 제신은 현행 중부무속(中部巫俗)에서 보이는 신들이 대부분이다.
장소에서의 제신의 차이가 있는 것은 굿의 규모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춘계(春季) 고사(告祀)에 쓰인 물품세목(物品細目)은 다음과 같다.
「 계묘(癸卯,1903) 3월 26일 함녕전고사(咸寧殿告祀)쇼입함녕전,
대청(大廳) : 떡(餠), 제두, 약주, 실과(實果),
온돌 : 떡, 백설기 호초차(胡椒茶), 실과,
대(臺) : 떡, 제각, 약주, 실과,
전정(前庭) : 떡, 우두(牛頭), 탁주.
후정(後庭) : 떡, 북어, 탁주, 의**방 : 백설기, 호쵸**, 실과,
함유** : 떡, 제두, 약주.
우 : 떡, 백설기, 호쵸**, 실과,
전정(前庭) : 떡, 북어, 탁주,
후정(後庭) : 북어, 탁주,
우 : 떡, 백설기, 호쵸**, 실과, 제슈간 : 제작, 약주,
삼춘당(三春堂) : 제작, 약주, 전정(前庭) : 우두, 탁주,
후정 : 우두, 탁주」
이외에도 슉옹전.경호전.성관헌.청회문 등 46처(處)에 증병(蒸餠) 46좌(坐), 백설기 7좌, 저두(猪頭) 5부(部), 저각(猪脚) 13부, 우두 2부, 북어(北魚) 19쾌, 실과 16목판, 약주 21병(甁), 탁주 18동이, 황촉 46쌍, 백지(白紙) 4권, 과등 5개, 육초 20개, 호쵸말 7봉(封), 촉대(燭臺) 10쌍, 밥쇼라 1좌, 제기접시 7개, 쇼 접 7개 등인데
각 전(殿)마다 매월 1회씩 의례적으로 행사했으니 그 비용이 어느 정도 들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또 별기도(別祈禱)로서 송악(松岳) 덕물산(德物山)을 중심으로 목멱(木覓) 감악(紺岳) 등 서울 근교에서 시행했는데 대전(大殿)이나 중궁전(中宮殿)은 행행(行幸)하지 않았고 상궁(尙宮)이 무녀를 시켜 치성(致誠)을 드렸다.
고종 3년(1866) 2월에는 상궁 1명 이하 나인(內人) 1인 색장(色掌)과 청직(廳直)이가 따랐고 노자(奴子) 1명, 비자(婢子) 1명도 동원 되었으며, 또 기축년(己丑年,1889) 5월에는 안상궁(安尙宮), 김상궁(金尙宮), 배상궁(裵尙宮) 등이 각 노자(路資) 60양(兩)씩 받았고 김색장(金色掌)과 세수간(洗水間)의 별감(別監) 청직은 각각 노자 40양씩 받았다.
그리고 노자 3명과 비자 1명은 각각 10양씩의 노자(路資)를 받았다. 이 때의 총 비용을 적은 물재발기(物財撥記)를 보면 미(米) 32석, 백목(白木) 1동 10필(疋), 목(木) 6동, 태(太) 5석(石), 일포(一布) 1동, 촉(燭) 2백병(柄), 백지(白紙) 50권, 전문(錢文) 8천양이 들었다.
또 신기(神旗)를 궁에서 그려 준다고 하였고 그림의 내용도 청룡(靑龍) 황룡(黃龍)이니 안장 마루장 산마루장이라 하여 괴이했으며, 송악 덕물산의 표진(무신도(巫神圖))은 퇴락하면 새로이 하되 번번이 하지 않는다고 했다. 병인년(丙寅年,1866)의 별기도로 보아서는 전통적으로 행해오던 궁중 의례의 하나로 보아진다.
이 해는 대원군의 섭정(攝政)이 시작된 해이며 민비가 입궁하던 해로서 민비에 의해서 시행된 것은 아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고종년간의 별기도는 조선초기의 별기은(別祈恩)처럼 송악을 중심으로 역대의 전통적인 국행(國行)의 한 의례를 그대로 답습해 왔음을 알 수 있으나
민비에 의해서 산천신당(山川神堂)을 비롯해서 사찰(寺刹) 암자(庵子) 관왕묘(關王廟) 등지에서 고종의 탄일(誕日,1852년 7월 5일)을 위한 칠월위축(七月爲祝), 순종의 탄일(1874년 2월 8일)을 위한 이월위축(二月爲祝) 등이 정조(正朝)와 시월위축(十月爲祝) 등 정기적인 기복제(祈福祭)와는 달리 임시제(臨時祭)로 추가되었던 것이다.
고종 탄일에 위축기도제(爲祝祈禱祭)를 드린 사찰 암자수는 34곳이며 산천신당은 41곳이며 순종 탄일에 위축기도제를 드린 사찰 암자 수는 10곳, 산천신당은 111곳이나 된다.위의 통계로 보면 사찰보다 산천신당에서 더 많은 기도제(祈禱祭)를 드린 것을 알 수 있으며 고종보다도 순종에 대한 위축(爲祝)이 더 많은 것은 자손의 축복을 산천신령에게 빌어오던 종래의 무속적 전통의 관념이라 하겠다.
고종 3년(1866)에 시행된 위축기도제에서의 무신(巫神) 무복(巫服) 무장(巫裝)은 다음과 같다. ① 높**오신 또는 높자오신 어실당 높**오신은 어실당의 수식어인 듯하며 어실당이란 왕실을 관장하는 신으로 「어실당(御室堂)」이란 뜻으로 생각된다.
무복은 두면(頭面), 전립(戰笠), 다홍운문단철릭(多紅雲紋緞天翼), 천청망단협수(夾袖), 장색망단쾌자(快子), 남운문단전대(藍雲紋緞戰帶), 아청수낭(鴉靑繡囊), 남광다회대(藍廣多繪帶), 칠엽선(漆葉扇), 수건 등이다. ② 별군웅(別軍雄) 이 신의 무복(巫服)은 남엽문사철릭(藍葉紋紗天翼)에 다홍대(多紅帶)를 띤 것이다.
별군웅은 서울지방의 12거리 중 군웅(軍雄)의 별칭이다. 난곡(蘭谷)의 「무당내력(巫堂來歷)」에서는 축귀(逐鬼)로 표기하고 협수(夾袖)에 쾌자(快子), 전립(戰笠)을 썼고, 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를 양손에 쥐었다. ③ 산마누라 산신(山神)의 별칭이다.
두면(頭面)엔 갓을 썼고 남철릭(藍天翼)을 입고 홍대(紅帶)를 띠고 두수낭(頭繡囊)를 달고 갓을 썼으며 칠엽선(漆葉扇)을 들었다. 무속에서는 8도 명산의 산신이 청배(請陪)되는데 개성 덕물산(德物山)의 최일장군(최영(崔瑩)장군의 와전(訛傳)), 황해도 평산(平山)의 신장군, 감악산(紺岳山)의 빗돌대왕(또는 천총대왕) 등의 산신이 청배되는데 덕물산의 최일장군이 대표적인 산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무당내력(巫堂來歷)」의 대거리(大巨里)가 최장군 복색(服色)이라 했는데 남철릭에 홍대를 매고 빗갓(주립(朱笠)을 썼고 오른 손에는 청룡도(靑龍刀) 왼손에는 삼지창을 들었다.
④ 왕신(王神) 왕신은 성조신(成造神)을 말한다. 발기에는 다홍이당단철릭을 입고 남이당단전대를 매었는데 「경기도지역무속」의 성주거리에서 홍철릭(紅天翼)을 입는 것이나 또한 무가(巫歌) 성주노래가락에만 '왕신'이란 것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왕신은 성주신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성주노래가락은 아래와 같다.「태산이 높수컷만 하늘아래 뫼이로요서(沼)이라 깊석컨만 모래위에 만수로다마누라 영검술은 깊이 몰라 성주왕신우마신길에 가얏고로 다리를 놓소가야금 열두줄에 어느줄로 서겨외세줄아래 덩기덩소리 눈이라고 가경왕신 또 사제풀이에도「 마당간데(가운데) 들어서니 오방지신(五方之神) 말라시며 마루대청(대청) 올라서니 성주왕신 말라신다.」
왕신은 민간의 성주신인 가택수호신(家宅守護神)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궁궐수호신(宮闕守護神)에 해당된다. ⑤ 국대부인(國大夫人) 이 신은 여신(女神)으로 초록단(草綠緞)겹당저고리 남(藍)모탑겹치마를 입었다. 이 국대부인은 왕대비(王大妃)를 지칭하거나 혹은 대군(大君)의 부인을 가리키는 것 같다.
대원군의 부인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 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를 지칭할 수도 있다. 이 여신은 왕실내의 작고(作故)한 왕이나 부부인(府夫人)을 모시는 신명(神名)으로 생각된다. ⑥ 당자부인과 자안아기시 발기(撥記)에 당자당 자안 아기시라는 것에서 당자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자부인은 당자당 안에 모셔진 신명(神名)으로 생각된다.
초록단곁마기에 남(藍)모탑겹치마를 입고 낭자를 꽂았으며 부채를 들었다. 곁마기는 연두바탕에 자주빛으로 겨드랑이 깃 고름 끝동을 단 저고리로 여자가 입던 예복의 한가지이다.
무녀들에 의하면 당자당이 풍덕(豊德) 도리산(개성군 대성면 풍덕리 소재)에 있던 신당(神堂)이었으며 당자부인은 최영장군의 큰 마누라라고 하고, 작은 마누라는 제주도 산신(山神)이라 한다.
⑦ 호고아가씨 또는 호고 호고 또는 호고아기시란 호구거리(戶口巨里)를 가리키는 것이다. 현전(現傳) 중부지방 무속에서 별상(別相)이 천연두신(天然痘神)이고 때로는 호구별상(戶口別相)이라고도 하며 따로 이 거리는 머리 뒤집어 씌워진 붉은 치마를 벗음으로써 치유(治癒)가 되는 무의(巫儀)를 한다. 홍역(紅疫)의 신으로 생각된다.
⑧ 말명 말명을 말미라고도 하는데 「무당내력(巫堂來歷)」에는 말신말명이라 했고 본 발기(撥記)에는 장단말명이라 했다. 전자(前者)는 말명이 무조신(巫祖神)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후자(後者)는 장단지방(長湍地方) 어떤 당(堂)의 말명을 가리킨 것이라 생각된다. 발기에 의하면 장단말명에 옥색순색(玉色純色) 저고리에 남주단(藍紬緞)치마라 했다.
⑨ 용왕(龍王) 수명장수(壽命長壽)를 기원하는 신으로 예단색주사필(禮緞色紬四疋) 등을 내인(內人)이 가지고 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병인년에 송악(松岳) 덕물산(德物山)에 지낼 때 대정(大井,한우물)의 용신(龍神)에게도 빌었던 것이다. 궁중무속은 정조(正朝), 4월 8일, 칠석(七夕),
10월, 탄일(誕日) 등에서 행해졌으며 민비 또한 위축발기(爲祝撥記)를 통하여 신당(神堂), 사찰, 관왕묘(關王廟) 등지에서 무속의식(巫俗儀式) 불교의식 도교의식(초제(醮祭)으로 고종과 순종을 위해 기복제(祈福祭)를 지냈다. 그러나 이 중 궁중무속은 민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왕조 초기부터 유숭정책(儒崇政策)으로 인한 배불배무(排佛排巫)의 끊임없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무속은 역대 왕비와 비빈(妃嬪)들의 신앙의 대상물이 되었으며, 민비는 이 전통적인 무속을 마지막으로 이어 받아 급변하는 정치의 불안을 해소해 보고자 했다. 따라서 무속은 역대에 못지않게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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