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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趙浚)1346년(충목왕 2)∼1405년(태종 5).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
문하시중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으로, 판도판서 조덕유(趙德裕)의 아들이다. 아들 조대림(趙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함으로써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조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譯官)으로서 출세, 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1371년(공민왕 20)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 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 문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崔瑩)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이어 도검찰사(都檢察使)로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오른 뒤,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 윤소종(尹紹宗)‧허금(許錦)‧조인옥(趙仁沃)‧유원정(柳爰廷)‧정지(鄭地)‧백군녕(白君寧) 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의 폐위와 왕씨의 부흥을 꾀하였다.
그가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으로서,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중망(重望)이 있는 조준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 크게 기뼈하여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발탁하고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 그는 크게 감격하여, 아는 것을 모두 이성계에게 이야기하여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해 이성계‧정도전(鄭道傳) 등과 전제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의를 얻고, 같은해 7월 처음으로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였으며, 다음해 8월과 12월에 잇달아 전제개혁소를 올려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변안열(邊安烈)‧권근(權近)‧유백유(柳伯濡) 등 전제개혁 반대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또 관제‧신분‧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고,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知門下府事兼大司憲)으로 추충여절좌명공신(推忠勵節佐命功臣)이 되었다. 이어 조민수(曺敏修)‧이인임(李仁任) 등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이성계‧정도전 등과 더불어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
1389년(공양왕 1)전제개혁을 단행하고, 평리 겸 판상서시사(評理兼判尙瑞寺事)에 올라 전선(銓選)을 주관하였고, 다음해 찬성사로 승진하여 1391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정몽주가 죽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이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피봉되고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정도전에게 집중되자, 그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세자책봉에 대하여 정도전은 방석(芳碩)을 지지하였으나, 조준은 이를 반대하여 개국에 공이 많은 방원(芳遠)을 지지하였고,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면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요동공벌을 계획하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공요운동(攻遼運動)을 반대하였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이방원과 가까워져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 평소 방원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戊寅靖社, 혹은 鄭道傳亂)때 백관을 이끌고 적장(嫡長)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하여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피봉되었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있으면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 무고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이방원에 의하여 석방되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영의정부사에 승진,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그는 사학(史學)을 잘하고 경학(經學)과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문집으로 《송당집》을 남겼다.
한편,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로 하여금 국조의 헌장조례(憲章條例)를 모아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게 하였으니, 이는 뒤에 《속육전》‧《육전등록》 등으로 보완되어 《경국대전》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전제개혁안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목표를 둔 것으로서, 제1차 상소에서는 녹과전(祿科田)‧구분전(口分田)‧군전(軍田)‧투화전(投化田)‧외역전(外役田)‧위전(位田)‧백정대전(白丁代田)‧사사전(寺社田)‧역전(驛田)‧외록전(外祿田)‧공해전(公廨田) 등의 설치를 통하여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2‧3차의 전제개혁상소에서는 세신거실(世臣居室)이 경기 이외의 외방에까지 사전(私田)을 두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고,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하였다.
1391년 5월에 정하여진 과전법은 그의 개혁안이 토대가 된 것이나, 구분전‧투화전‧백정대전에 대한 분급규정(分給規定)이 빠져 있고, 그 대신 중흥공신전의 세습에 대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그가 여말에 올린 국정개혁안은 《주례(周禮)》에 바탕을 두어 총재(冢宰,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양천신분제(良賤身分制)를 확립하여 국역체제를 강화하고, 경연과 서연제도를 실시하며, 학교(향교)제도를 강화하여 사장(詞章)을 폐하고 사서오경을 배우도록 할 것,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시행할 것, 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사창(社倉)의 법을 시행할 것, 향리의 출사(出仕)를 억제할 것, 환자(宦者)의 정치참여를 막을 것, 과거시험에 복시제(覆試制)를 시행할 것 등 광범위한 사회개혁안을 포괄하고 있다.
그의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으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및 《경제문감(經濟文鑑)》 편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준(趙浚)
○ 본관은 평양(平壤)으로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號)는 송당(松堂)이요 판도판서(版圖判書 호조 판서) 덕유(德裕)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말년에 강원도(江原道) 감사가 되어 순행(巡行)하다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러
동해를 씻어낼 날이 있으리니 / 滌蕩東溟知有日
백성들은 눈을 씻고 맑아지기를 기다리라 / 居民拭眼待澄淸
하는 시를 남겼다. 이로써 식자들은 그가 큰 뜻이 있음을 짐작해 알았다. 우리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 고려 말엽에, 권신들이 다투어 탐욕스럽게 긁어들여 백성들이 이를 매우 괴로워하여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 것을 끌고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피하여 갔다.
조준은 글을 올려 청하기를, “지금부터는 억지로 물품을 사게 하는 일을 일체 금지하여 법대로 엄격히 다스릴 것이며, 그 강매한 재물이 민간에게 미수된 것이 있으면 마땅히 영을 내려서 거두어 관용에 충당하소서.” 하였다. 《시무서(時務書)》
○ 옛 제도에 모든 창고와 궁(宮)지기에게 왕패(王牌 왕(王)의 신빙패(伸憑牌))를 내리자면 반드시 인(印)을 찍어 믿음을 삼아 행하였는데 지금은 내시(內侍)가 단독으로 그 이름만을 서명하여 쓰니, 간사한 짓을 막는 방도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궁내의 용도는 도평의사(都評議使)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고, 왕패를 내리지 말게 하십시오.
○ 청컨대, 사대부와 서인들로 하여금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게 하되 말을 타고 출행하는 것을 허락치 말 것이며, 손님을 대함에는 상중(喪中)에 있을 때와 같이 처신하게 하소서.
○ 원(元) 나라를 섬긴 이래로 태평이 오래되어, 문관은 안일에 빠지고 무관은 오락이나 일삼아 숙위(宿衛)하는 데 사람이 없어 호군(護軍) 등의 관을 설치하여, 금위(禁衛)의 임무를 대행하기에 이르렀으니 조종(祖宗) 때 입위(入衛)하던 제도가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 나라 법에 주(州)와 군(郡)이 매년 인구를 계산하여 백성을 등록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병정을 뽑거나 역군을 조달할 때에 손바닥을 드려다 보는 것 같이 환하였습니다. 요사이 이 법이 무너져서 그곳의 수령들은 그 고을의 호(戶)수와 인구수를 모르므로, 징병이나 조역할 때에 지방 아전이 기만하고 은폐하여 부강한 자는 면하고 빈약한 자는 가게 되니, 빈약한 자가 그 고역을 감당치 못하여 도망합니다. 빈약한 자가 도망하면 부호가 그 일을 대신 맡게 되니, 그 고역을 감당치 못하고 역시 빈약한 자들과 같이 도망칩니다. 그리하여 그 징발의 임무를 맡은 자는 아전의 기만과 은폐를 분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니, 아전들도 그 고통을 참니 못하고 도망하게 되어, 고을 아전과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져 없어져서 고을이 비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다 호구를 계산하지 않는 데서 오는 화근입니다. 상동
○ 구중궁궐 안에 처해서는 우리 백성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함을 생각하시고, 팔진미(八珍味)를 드실 때에는 우리 백성은 술지꺼기와 겨도 족하지 못함을 생각하시고,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고서는 누에치는 부녀자의 벌거숭이 된 모습을 생각하시어 위대한 우(禹) 임금의 검소한 생활을 본받으며, 잔치에 임하실 때는, 농부들의 주려 죽음을 생각하시어 수(隋) 나라 문제(文帝)의 한 접시 고기만 먹음을 본받으소서. 상동
○ “침원서(寢園署 왕릉을 관리하는 관서)의 예문(禮文)에,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4일간 술을 마시지 않으며, 냄새 나는 채소를 먹지 않는데 이것을 산재(散齋)라 이르고, 혹은 본사(本司)에서 거처하며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정히 하여 단정히 앉아 3일간을 정성껏 공경하는데 이것을 치재(致齋)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모든 집사(執事)들이 상재로부터 치재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집에서 부인과 더불어 친압하게 거처하니 심히 불경합니다.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예문을 준수하여 어긋난 자는 죄를 주옵소서.” 하였다. 《상서(上書)》
○ “청컨대, 성묘의 예는 그 지방의 풍속에 따라서 행함을 허락하되, 매년 세 명절 중에 한식(寒食)으로 정규를 삼아서 조상을 추모하는 미풍을 이룩하시고, 이를 어진 자는 불효로써 논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 농사 때에 백성을 몰아내고 순월(旬月) 동안을 사냥한다면, 농민은 그 업을 잃고 백성은 먹을 것이 부족할 것입니다. 만일 닭이나 돼지 같은 가축도 거둬 들임이 적어지면 백성들이 소란을 끼치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닭과 돼지 기를 우리를 두 군데에 짓고, 하나는 전구서(典廐署 제왕의 마구간을 맡은 관서)로 하여금 주관케 하여 제사를 받드는 데의 소용으로 하고, 하나는 사재사(司宰寺 궁중 소용의 어육신염(魚肉薪鹽)을 맡은 관서)로 하여금 주관케 하여 손님을 대접하는 데 소용케 하십시오.
○ 우리 나라는 조종(祖宗) 때부터 의관과 예악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는데, 원조(元朝)에 이르러서, 당시 황제의 압박으로 중국의 제도를 변경시켜 오랑캐의 제도를 따르기 때문에 위아래가 교화가 되지 않고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 공양왕(恭讓王)에게 상서(上書)하기를, “군인들이 왜놈과 싸워서 노획한 물건을 전부 서울로 보내므로 군사들이 해이하게 되니, 지금부터는 적(賊)을 격파한 자는 수급(首級)만을 바치게 할 따름이요, 군사들이 노획한 왜놈 물건에 대하여는 너무 죄상을 조사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였다.
○ 경기(京畿) 8현(縣)에 요역(徭役)이 매우 번다하여, 백성들은 힘들어 살아가기가 곤란하여도 호소할 데가 없었다. 글을 올려 각도에 관서를 둔 예에 의거하여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그 실적을 조사케 하여 출척(黜陟 나쁜 자는 쫓아내고 착한 자는 진급시킴)을 명확히 하여, 그 폐단을 개혁하게 하도록 청했다.
○ “안렴사(按廉使)가 품질이 낮은 5품ㆍ6품이므로 출척(黜陟)과 상벌(賞罰)에 엄하지 못하니, 청컨대, 양부(兩府)에서 청렴결백하고 부지런한 자를 뽑아 보내되,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여서, 도안렴출척대사(都按廉黜陟大使)를 임명해서 농토가 개척되었는가, 호구가 불었는가, 송사가 적은가, 부역이 균일한가, 학교가 흥성한가 하는 점을 가지고 주군(州郡)을 순찰하여 파면시킬 자는 파면시키고 승진시킬 자는 승진시키며, 호령이 엄한가, 병기가 정예로운가, 병졸이 단련되었는가, 둔전(屯田 군병이 자작하여 자급하는 전답)이 잘되고 있는가, 바다 도적[海寇]이 종식되었는가 하는 점을 가지고 방진(方鎭)을 순찰하여 벌할 자는 벌하게 하십시오. 또한 의첩(依牒 사령장(使令狀))이 나옴을 기다려서 파견하되, 원수(元帥) 이하가 모두 교외까지 나가서 영접하고 참상(慘狀)을 바치게 하십시오.” 하니, 왕이 이대로 따랐다. 후에 이것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라고 개칭했다.
○ 내직이나 외직의 대소 관원이 배명 후 곧 관직에 올라 부임하지 않기 때문에 공사(公事)가 늦어지고, 간사한 아전이 은익을 용납하게 되므로 조준이 소(疏)를 올려서, 드디어 그 부임할 날의 한도를 정했다.
○ 무릇 공사 간에, 이식(利息)은 다만 한 본전에 한 이식[一本一利 단리(單利)] 만인데, 요사이 재물을 늘이는 자들이 한 본전의 이식이 혹은 10배에 이르고 있으니 빌려 쓴 사람들은 처자를 판다해도 끝내 그것을 상환치 못하고, 집을 잃고 가업을 잃게 되니, 이제부터는 한 본조에 한 이식으로 하여 더 취하지 못하게 하고, 이것으로써 원칙을 삼게 하소서.
○ 역호(驛戶 역에 부속된 사람)는 길을 알아서 길을 가리켜 주는 일을 하는 것인데, 고려말에는 이 역호가 쇠폐해져서 주(州)ㆍ군(郡)에서 그 수고를 맡았다. 조준이 상서(上書)하기를, “주ㆍ군으로 하여금 생업을 회복하게 하려면 마땅히 먼저 역호를 구휼하여야 할 것이니, 청하건대, 모든 역(驛)에 승(丞)을 두게 하되, 감사(監司)로 하여금 추천하여 보임하게 하기를 수령(守令)의 예(例)와 같이 하여, 다시 일으키소서.” 하였다.
○ 국가에 성조도감(成造都監)을 두어서 일국의 재목과 쇠의 용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한 나무의 재목을 운반하려면 열 마리의 소가 죽음에 이르고 한 화로의 쇠를 녹이려면 열 가지 농사를 폐하게 됩니다.
○ 학교를 풍속과 교화의 근원으로 삼는 것은, 경서(經書)에 밝고 조행을 닦는 선비를 구하고자 함이니, 부지런하고 민첩하고 학문이 해박한 자를 교수(敎授)로 삼고, 한가히 살면서 유학을 닦는 자로 교도(敎導)를 삼아서, 학업에 종사하는 자로 하여금 항상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히고 사장(詞章 문장학)류의 독서는 허락하시지 마시고 인도하고 도우며 권장하여서, 그 효험을 이룬 자는 서열을 생각하지 마시고 발탁하여 등용하도록 하십시오.
○ 지금의 학자는 문장을 꾸미는 학문으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영화를 한 몸에 취하고, 벼슬에 종사하게 된 후면 모두 그 학업을 버리어 실무에 어두우니, 지금부터는 매년 급제 한 자와 4품 이하의 벼슬에 있는 자로 하여금 대책(對策 시정에 대한 논문)을 쓰게 하여, 합격한 자는 제교(製敎 임금의 글을 지어 바치는 벼슬)를 삼고 합격되지 못한 자는 좌천시키소서.
○ 공양왕(恭讓王)에게 상서(上書)하기를, “근래에 전쟁으로 말미암아 학교가 황폐하고 해이해지니, 향원(鄕愿 시골에서 알지도 못하고 아는 체하는 자)으로서 유자(儒者)라는 명칭을 가탁한 자나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가 5, 6월 사이에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당송(唐宋) 시대의 절구(絶句)를 읽히다가 50일이 되면 곧 파하고 이것을 하과(夏課)라 이르니, 비록 경서에 밝고 조행이 닦여진 자를 구하려 한들 과연 얻을 수가 있으리까?” 하였다.
○ 경(敬) 한 자(字)는 제왕(帝王)이 성인(聖人)되는 기초가 되는 것이요, ‘공(公)’ 한 자는 제왕(帝王)이 정사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 고려말에 기인(其人)의 역(役)에 대한 법이 오래되자 폐단이 생겨서 각처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그 역은 마치 노예와 같이 하니,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주관한 관서에서는 궐포(闕布 궐참 대신 포목을 납부하는 것)를 독촉하여 징수해서 사람들에게 빌려 주고 이익을 취하다가 상환을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의 주(州)ㆍ현(縣)에서 직접 징수하되, 경중대차(京中貸借)라는 이름으로, 그 배수(倍數)를 독촉해서 징수하니, 주ㆍ현이 황폐해지는 것은 주로 이 때문이었다. 조준이 상서(上書)하여, 그 폐단을 개혁할 것을 청하였다.
○ 옛 법에 백관의 사첩(謝牒 사양하는 글)에는, 당후관(堂後官 중추원의 하급관)이 서명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근자에 와서는 거짓이 날로 많아지니, 상장군(上將軍)이 하는 군부사(軍簿司 병조의 별칭)가 도장을 찍고, 봉익(奉翊 종(從) 2품의 벼슬)이 하는 전리사(典理司 고려 때 이조(吏曹)의 별칭)가 도장을 찍어야 허위로 조작함을 방지할 것입니다.
○ “사막(司幕 의식(儀式)에 필요한 것을 맡은 관서)은 곧 이전의 상사(尙舍)이며 지금의 사설(司設)입니다. 지금 사설은 그 직책은 폐지되었으나, 그 녹은 먹고 있고, 사막은 그 일에는 부지런해도 녹을 먹지 못하니, 그것을 옛 제도로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 우리 동방에 가묘(家廟)의 법이 해이하여 졌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준용하여, 대부 벼슬 이상은 3세를 제사하고, 6품 이상은 2세를 제사하며, 7품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을 제사하되 정결한 방 한 칸을 택하여, 각각 감실(龕室 신주(神主)를 모시는 방)을 만들어 그 신주를 모시게 해서 조상을 추모하는 풍속을 이루게 하소서.
○ 동리마다 학식이 있는 노인을 택하여 사장(社長 지금의 이장)을 삼아서, 당서(黨序 지방의 초급학교)의 법에 의거하여 자제들을 교도해서, 자제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희롱하는 헛되고 경박한 풍조를 짓지 못하게 하도록 하소서.
○ 신우(辛禑)에게 상서하기를, “신라 말에 전지(田地)는 고르지 못하고, 세금은 과중하게 부과하여 밭(田) 1경(頃 백묘(百畝))의 조세(租稅)가 □□에 이르러서 백성들이 살 수 없으므로 태조(太祖 왕건)가 즉위하여서 10분의 1의 세법을 써서 밭[田] 1부(負 토지면적의 한 단위)에 조세는 3승(升)을 내게 하고, 마침내 백성들의 3년 조세를 면제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 되고 곡식은 소[牛]로 연유하여 생산되는 것이니,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는 것은 농사를 중히 하는 까닭입니다. 동상
○ 조준이 말하기를, “규정(糾正)이란 직책은 백관을 살피어 군주(君主)의 이목(耳目)이 되는 것이니, 모든 제사와 조회나 심지어는 돈과 곡식을 출납하는 것까지 모두 감독 검찰하게 되니, 직품(職品)은 하위이나 그 임무는 무거운 것입니다.”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 신우(辛禑) 때에, 화척(禾尺)의 무리가 왜적이라 사칭하고, 서로 모여서 도둑질하며, 관공서를 불태우고 노략질하였다. 조준이 상서하기를, “화척의 무리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는 것을 일삼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백성의 곡식을 먹으며 산골짜기에 모여든 것이니, 일정한 생업이 없으므로 일정한 마음도 없는 자들로서 그 세력이 두려우니, 지금부터는 그 식구를 따라서 빈 땅을 주어 평민들과 같이 살게 하되, 어긴 자에게는 죄를 주게 하소서.” 하였다. 화척은 또한 양수척(楊水尺)이라고도 부른다. 동상
○ 이인임(李仁任)이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듣고 모두 좋아하며 말하기를, “인력으로 죽이지 못하니, 하느님이 이 자를 죽였다.” 하였다. 조준도, “인임은 죄가 찰대로 차고, 악이 쌓일대로 쌓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이를 죽였으니,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악행하는 사람을 징계하소서.” 하였다. 동상
○ 이자송(李子松)이 죽음을 당하니 조준이 상서하기를, “자송은 청렴하고 근신하고 절개를 지킨 자입니다. 그 죽음이 그의 죄가 아니어서 나라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오니, 청컨대, 뇌(誄 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찬양하는 말)와 시호를 내리사 그 집을 후하게 구휼하소서.” 하였다. 동상
○ 공정(恭靖 정종(定宗))초에, 대성(臺省 문하성(門下省))에서 소(疏)를 올려 사병(私兵)을 파하기를 청하였는데, 문하부사(門下部事 종2품관) 이거이(李居易)가 조준(趙浚)의 말을 듣고 곧 패(牌)와 자기(字記)를 바치지 않았다. 그 후에 조준(趙浚)이 국문을 당하여, 혼백(魂魄)을 잃고 헤매며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똑바로 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동상
○ 상서하기를, “군정(軍政)을 여러 곳에서 취급하면 호령이 엄숙치 못하니, 각 도에 단지 한 절제사(節制使)만을 두고 남은 것은 모두 혁파하소서.” 하였다. 동상
○ 사복(司僕)은 승여(乘輿)의 말을 관장하는 관서인데, 별도로 내승(內乘)을 두고 내시의 무리들이 그 직책을 제멋대로 행사하여 그들이 마른 풀과 짚을 거둬들일 적에 온갖 방법으로 겁탈하여 성안으로 들여오는데, 농사 짓는 소들이 상하고, 쓰러져 가니, 기현(畿縣 경기 지방의 고을)은 파괴되어 쇠잔해지고 그 폐해가 지방 각 군에까지 흘러가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기내(畿內)의 마른 풀이나 짚은 말을 계산하여 수량을 정하고, 달로 나누어 공급하게 하여 민폐를 제거하게 하소서. 《시무서(時務書)》
○ 임신년 7월에 태조(太祖)가 보위에 올라 그날 밤 조준(趙浚)을 불러 이르기를, “경(卿)은 한 문제(漢文帝)가 대저(代邸)로부터 들어가 밤에 송창(宋昌)을 위장군(衛將軍)에 제수하여, 남북군을 진무하게 한 뜻을 알겠지?” 하고, 곧 도총사은인(都摠使銀印)과 화각(畵角 그림 그린 뿔로 만든 호각)과 동궁(彤弓 붉은 칠을 한 활)을 하사하여, 5도(道)를 모두 위임하여 총관하게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초(國初)에 조준(趙浚) 등이 비로소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모든 방문(方文)을 모으고 또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모아서 《향약제생집(鄕藥濟生集)》이라고 이름 지어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였는데,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 조준은 일찍이 임금 앞에서 문득 울었다 문득 슬퍼하였다 하였는데, 겉으로는 회개한 것같이 하였으나, 속으로는 죄를 관대히 용서받고자 하는 계략이니, 이는 거짓 회개한 것이다. 김양진(金陽震)이 준(浚)을 논한 글
○ 조준이 시(詩)에 뜻을 두지 않은 것 같으나, 시를 지으면,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걸출하여 대인(大人)의 기상을 지녔다. 일찍이 백상루(百祥樓)에 쓴 시에
살수는 출렁출렁 푸른 허공에 일렁거리는데 / 薩水湯湯漾碧虛
수 나라 병정 백만이 변하여 고기가 되었구나 / 隋兵百萬化爲魚
지금까지 어부와 초부의 이야기로 남아있지만 / 至今留得漁樵話
길손의 한 웃음에 차지 못하네 / 未滿征夫一哂餘
라고 하였으니, 이는 수(隋)ㆍ당(唐)을 기롱하는 뜻이 있는데, 말 만드는 것이 기특하다. 《시화총림(詩話叢林)》
○ 설매(雪梅)는 기생의 이름이다. 악사(樂詞 시를 창(唱)하는 것)를 잘 불렀는데, 조준(趙浚)이 처음으로 재상 자리에 오르자, 모든 국가 원로들이 서쪽 교외에서 연회를 베풀어 그를 위로하였는데, 술좌석이 절정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부름을 받고 입궐하게 되었다. 모든 원로들이 모두 한 잔씩 권하며, 설매로 하여금 가사를 부르게 하니
서쪽 동산에서 꽃놀이가 아직 파하지 않았는데 / 西園未罷看花會
또 부르시는 명을 받들고 상양(비원과 같은 말)에서 연회하도다 / 又被宣招宴上陽
라는 시구를 부르니,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찬탄하였다. 그 후에 하륜(河崙)이 서도(西道)의 순찰사(巡察使)가 되어 가니 자성 문밖에 장막을 치고 고관들이 가득히 모여 전송을 하는데, 설매가 또
그대에게 다시 한 잔 술을 권하노니 / 勸君更進一杯酒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벗들도 없을 것일세 / 西出陽關無故人
라는 구절을 부르니, 만좌의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동상
○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머니 오(吳)씨가 새로 급제한 사람이 철행(綴行 고관 집에 인사 다니는 것)하는데 길을 비키라고 큰 소리로 호통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나는 자식이 비록 많으나 아직 급제한 자가 없으니, 무엇에 쓸 것인고?” 하니, 조준이 꿇어앉아 울면서 하늘을 두고 맹서하기를,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서하여 급제하겠나이다.”라 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드디어 급제를 하였다. 《열전(列傳)》
○ 어려서부터 구김 없이 활달하였다. 수덕궁(壽德宮)에 있다가, 조준이 궁전(宮前)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곧 명하여 보마배지유(寶馬陪指諭)에 속하게 하였다. 동상
○ 조준이 일찍이 지제교(知製敎 왕의 문장을 대작하는 관)로 있을 때, 기양소(祈禳疏 기도 드리는 기도문)를 짓게 되었는데 그 말에, “정직하고 충실한 사람을 멀리하고, 아첨하고 참소하고 사특한 사람을 가까이한다.”하니, 지신사(知申事 그 후의 도승지) 김도(金濤)가 말하기를, “정직하고 충실한데 소외된 자는 누구이며, 아첨하고 참소하여 친압케 된 자는 누구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하고, 곧 조준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였다. 동상
○ 평양백(平壤伯) 조준이 졸하자, 태종(太宗)이 부음을 듣고 통곡하며 고기 반찬을 안 먹고, 조회를 중지하며, 친히 빈소(殯所)에 가서 조위(吊慰)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주1]기인(其人)의 역(役) : 본래는 지방의 유력자로서 중앙에 뽑혀 올라와 그 지방 행정의 고문 역할을 하던 것인데, 뒤에는 신분이 차츰 떨어져서 후일에는 고역(苦役)에 사역되는 노예와 같이 되었다. 이조에도 광해군 때까지 있었다.
[주2]화척(禾尺) : 본래는 일종의 천민으로 집단으로 유랑하면서 버드나무로 키나 광우리 같은 것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는데, 후일에는 소 잡는 것까지 하게 되었다.
[주3]자기(字記) : 자기(字記)의 자는 사병(私兵)의 표지(標識)이고 기(記)는 그 상황이다.
[주4]송창(宋昌)을 …… 제수하여 : 한 나라 제3대의 황제인 문제(文帝)가 외지(外地)에서 들어와서 황제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군졸(軍卒)의 향배가 염려되어 즉시로 자기가 믿는 송창(宋昌)으로 위장군을 삼아서 군졸을 통솔하게 하였다.
[주5]양관 : 중국 사람들은 전별(餞別)할 때에 부르는 노래를 양관곡(陽關曲)이라 한다. 그런데 당 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사신 가는 친구를 보내는 시에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이란 말이 있어서 양관을 지명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관이란 말이 지명과 같이 이용한 것뿐이요, 실지로는 그런 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6]보마배지유(寶馬陪指諭) : 임금을 모시는 군인들을 보마배(寶馬陪)라 하였고, 지유는 그 하급장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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