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태종(唐太宗)의 패귀(敗歸)
고구려가 당에 대하여 항상 환심을 얻으려고 애쓰고 운동하고 구태여 혼란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손해가 있을 때에는 용서치 않고 대항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당을 꾀어 고구려의 차지하였던 땅을 도로 신라에 내어주라는 당의 권고가 고구려에 왔다.
고구려에서는 그런 무리한 간섭에 노하여 당을 대적할 뜻을 가졌다. 한옆으로 신라의 고자질이 심하여 고구려 보장왕 3년에 당태종이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장수 이세적(李世勣)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들어오는지라. 이때 고구려에서는 합소문(篕蘇文)이란 위인이 있어 쳐 물리치니 당군이 다시 요동성(遼東城)에 들어와 싸우되 또 이롭지 못하였고 또 백암성(白巖城)에 와서도 이롭지 못하고 또 안시성(安市城)에 와서 에워싸고 여러 날 동안 승강하다가 성 밖에 토성을 쌓고 성을 넘어오려 하다가 성안에서 도성을 쌓아 도적을 막으니 그 후에는 태종 자신이 성에 임하여 싸우다가 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또한 친이 막을 새 양만춘이 활을 당기어 태종을 쏘아 그 눈을 맞추니 당태종이 두려워하여 물러간지라.
무릇 싸운 지 88일 만이라. 당태종은 중원에 창업주이요 천하를 통일 영웅이라 조그마한 고구려 성주에게 실패한 것이 큰 수치라 하여 패전의 형편을 숨기고 가니라. 천하가 항복하여도 오직 고구려만이 항복 지 않음을 용납할 수 없다 하고 떠들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