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글월의 폐해
고려가 처음 일어나서 태조 신라의 문약을 실패하여 다시 굳세고 강한 풍기를 고취하였으나 워낙 신라의 침체한 습관에 빠졌던 인심을 별안간 돌리기 어려웠다. 광종 때 비로소 문학으로 인재를 뽑아 쓴 뒤로는 일반이 문학을 숭상하여 공사 간에 글 읽기를 힘쓰고 촌촌에 글 읽는 소리가 들리었다.
일반 신민 중 우수한 자를 택하여 국학에 공부시켜 등용하고 또 명경저술 두 과목을 두어 선배를 뽑아 쓰게 하고 또 일반 문신에게 문신 월과라는 법을 세워 시부(詩賦) 각 3편씩 지어 드리게 하고 대궐에 무슨 연회가 있으면 반드시 문신들로 하여금 시부를 읊으며 또 그들을 높여 벼슬을 주고 나라 일을 맡기고 글을 알지 못한 무관들의 지위는 문관들의 아래에 처하여 특별한 전쟁이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같이 문무관의 차별이 심하다. 이것이 국가에 큰 화근인 것을 알지 못하고 군신들이 모두 모략에만 도취하였으며 어느 때는 임금 앞에서 문신들이 무관의 뺨을 치며 그런 무례한 일까지 있었다.
더욱 상류사회에는 턱없이 지라 송의 풍속을 본뜨려 하여 신라 사람들이 당의 풍속을 본뜨려하는 습관이 유전되었다. 그리하여 국민의 정신퇴폐가 극도에 이르러 것 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한문의 발달에 날로 물러가는 동안 이로 말미암아 풍기 진작은 고사하고 점점 떨어져 불교가 민심을 약하게 만드는 것 같이 글월의 폐해도 또 심각하였다. 칼자루를 쥔 무신들을 천대하는 것이 심히 위태한 일인 동시 글월의 폐해도 그만 못지않다. 국학이란 것은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니 국도에는 국자감(國子監)이 있고 시골에는 향교가 있어 인민을 교육하는 국가의 기관이지 만은 근본 뜻을 다 잃고 다만 오락으로만 생각하고 도리어 출신의 도구로만 생각하여 말못되는 문약을 만들었다. 자고로 소인 노릇하고 기군망상(欺君罔上)하는 자들 치고는 글 못하는 이가 없으니 이것들은 다 글월을 악용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