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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글쓰기
나의 병원생활記
2019. 2. 향기 이영란
경기도 성남에 살고 있는 외숙모가 수술차 입원한 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오셨다. 여러 가지 과일을 깨끗이 씻어 지퍼백에 하나씩 포장한 것들과 몇 가지 마실거리를 가지고서. 50대 중반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고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쓰는 선한 말투와 젊었을 때부터 지녔던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다.
외삼촌이 서울에 살고 있는 죄?로 큰외삼촌의 아들과 딸이 외삼촌 집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몇 달 이상을 기거하기도 했다.(큰외삼촌과 외삼촌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지간이다.) 제 식구 건사하며 살기도 팍팍할 서울 살림에 그런 군식구들이 성을 가시며 살았어도 외숙모는 내색한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큼 외숙모의 심성은 착하고 고운 사람이었다. 형제의 도리를 지키고 싶었던 외삼촌은 가끔씩, 혹은 자주 외사촌의 대학 등록금을 대어주기도 했다. 착하고 인정만 많았던 외삼촌은 외숙모에 대한 사랑 또한 지극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집, 더 좋은 물건들을 갖추어 주고 싶어 했다.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밖의 여러 이유들로 외삼촌은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3,4년전 쯤엔 내게도 상당히 무리를 요하는 금액의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집요하게 하기도 했다.
외삼촌의 불행이 내게도 미칠세라, 어딘가 쫓기는, 정상작인 심리상태로는 내게 그런 부탁을 할 리 없는 삼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 뒤로 외숙모가 간병인 등을 하면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어려운 시절을 거쳐 아들 둘이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하고, 삼촌도 취직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제서야 체면이 선 삼촌가족은 10여년 만에 명절에 통영을 다녀가기도 했다.
핏줄로 엮어진 관계의 장점이랄까, 아니면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를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껄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해서 외삼촌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사이에서 심하게 뒤틀렸을 때 그 상처와 흔적이 오래갈 일일 것이었다. 우리는 몇 다리를 건넌 간접적인 사이였고, 서로를 원망하고 탓할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부부의 사랑이 돈독하여 자기 중심력으로 일어선 것처럼 보여서 보기 좋았다.
수술시간은 대략 오후 4시쯤에 잡혀있었다. 숙모는 오전 10시쯤에 오셨는데, 숙모를 가까이에서 거의 본 적이 없는데다 숫기도 별로 없는 남편은 좁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기가 멋쩍어서 낮 시간 내내 병원과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손재주가 많은 숙모는 꼼꼼한 퀼트 바느질로 만든 지갑이나 파우치, 가방 같은 것을 만들어 보내주곤 했다. 음식도 맛깔나게 하고 예쁘고 근사하게 차려 내는 분이었다. 나처럼 저녁 한 상을 차릴라 치면 싱크대에 냄비와 도마, 그릇들이 산처럼 쌓여지는 그런 어정쩡한 살림솜씨가 아니었다. 지금은 꽃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했다. 예전부터 해 왔던 일인데, 가정형편 때문에 당분간 접었던 일이었다.
“숙모는 일을 해도 꼭 그렇게 예쁜 일만 하세요”
“아냐? 조금만 배우면 너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손재주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과 정성을 쏟아 부을 곳이 많다는 말과 동의어일까? 우리는 자분자분 할 말이 많았다.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입장이어서 같은 엄마, 아빠의 핏줄이면서도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아들 둘 이야기를 비롯해서 폐경을 하면서 겪는 갱년기 증후군, 나의 학교생활 스트레스 등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TV에서는 수미네 반찬에서 장조림과 순두부찌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딱 그 나이 엄마들이 하는 방식의 요리법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처음 본 나는 저렇게 하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대충과 적당함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쇠고기 홍두깨살을 길쭉하게 찢어 메추리알과 꽈리고추를 넣어 장조림이 완성되고, 계란노른자를 얹어 순두부찌개가 완성되는 모습과는 별개로 전날부터 금식한 나의 위장은 쪼그라져 있었고, 어느새 수술방으로 이동하기 위한 침대는 문 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모든 속옷을 다 벗고 환자복만 입고 들어간 수술실에는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가 많았다. 입원실과는 다르게 의료장치가 많고, 수술을 위한 의료진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진지했다. 수술을 마친 후 의식을 잃은 채 실려 나오는 사람, 그 사람에게서 절개하거나 적출한 것으로 보이는 피로 둘러쌓인 장기덩어리를 비닐에 싸서 들고 있는 간호사도 보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이사야서 41장 10절
이 방에서는 누구나 긴장하고 겁먹을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천정에 새겨놓은 성경말씀은 어쩔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나는 곧장 수술실로 들어가 마취과 의사로부터 간단한 안내를 듣고 산소마스크처럼 생긴 기구로 마취가스를 흡입하고, 팔목의 수액 관으로 마취주사를 투여 받고는 곧장 무의식의 경계를 건넜다.
일어나 앉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정신은 혼미했고, 머리는 무거웠다. 수술 후 마취가 깨어나는 회복실이었다. 나 말고도 여러 명의 환자들이 있었고, 마취에서 깨는 고통을 함께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목이 말랐다. 이 병원의 모든 직원들은 친절한데, 회복실의 직원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나의 아픔과 직원들의 무관심에 화가 나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다가온 간호사에게
“목이 말라요!”
“물은 마시지 못하니까, 적신 거즈 대어 드릴게요. 이름 말해 보세요!”
“빨리 주세요!”
“이름 말해야 드려요. 이름 말씀 하세요”
“이! 영! 란!”
“네, 빨지말고 입술 적시고만 있으세요”
회복실에 있었던 시간은 내가 의식을 가지고 머물렀던 시간은 20여분 정도 되었을까? 나는 병원에 있었던 시간 중 가장 명료하게 기억되는 아프고 긴 시간이었다. 내가 가장 아픈 시간에, 내게 무조건적으로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옆에 없다는 사실은 나의 아픔을 훨씬 가중시켰다. 무거운 머리를 대고 있으면서도 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보름여 동안을 중환자실에 계셨다.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손발을 묶어두었다. 하루 30분씩 2번 밖에 보지 못하는 면회시간, 우리가 갔을 때 아버지는 그 사실 때문에 기함을 하셨다. 몸의 상태는 곤두박질 치고 있었지만, 의식은 정상인에 다름 없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손발이 묶이고 사무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현실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결핵성 폐렴을 판정받아 감염의 위험 때문에 중환자실에서도 격리된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1인실로 병실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보내드린 데 대한 죄책감으로 아픔과 슬픔이 몰려왔다.
아픔을 표현해 내는 것만으로도 고통은 덜어지는 것일까? 8시 경에 수술방을 나서자 남편과 숙모, 삼촌이 계셨고, 나는 입원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어나 앉고 싶었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많이 아프고 힘든 와중에서도 나는 배가 고팠다. 다행히 내게 죽이 도착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달게 먹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왼쪽 갑상선만 제거한 것이 아니라 오른쪽에 있는 결절이 상태가 좋지 않아 갑상선 전체를 제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1월만 하더라도 수술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수술을 하러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이렇게 모든 부분을 다 덜어낸다는 것 역시 고려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병원은 어느 것 하나 트집 잡을 것이 없었다. 병실을 비롯한 병원 곳곳은 하루 예닐 곱번 이상 청소가 되고 있었고, 병원 밥은 맛없다는 통념을 깨고 환자에게 맞춤식으로 제공되는 식사는 비행기 기내식처럼 맛있었다. 간호사들은 열이면 열 명 모두 총명하고 친절했다. 다만 다소 사무적이고 늘 바쁜 것처럼 오가며 몇 마디만 겨우 나눌 수 있는 주치의 앞에서는 뭔가 좀 어려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걸 흠으로 잡을 수는 없었다. 영리하고 똘망똘망한, 그렇지만 피로를 감출 수 없어 보이는 레지던트들이 아침 7시, 오후 3~4시쯤 되어 와서는 주치의가 툭 던졌던 말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안내하면서 그 틈은 메꾸어졌다.
입원한 당일부터 나를 안내한 간호사는 내가 묵었던 4박 5일동안 무려 3일을 야간 근무를 했다. 그렇다고 낮 근무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사람의 인체리듬을 무시한 그 불규칙적인 근무시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환자가 공복 상태에서 피를 뽑아 검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새벽 4시에 커튼을 걷고 들어왔다. 환자침상과 붙어 있는 보호자 침대 때문에 몸이 닿지 않아 허리를 철사처럼 굽혀 내 팔을 찾았다. 나는 그 신새벽의 방문이 황망하고 미안하여 후다닥 일어나 앉아 얼른 팔을 내밀고 수고와 감사의 말을 잊지 않고 전했다. 병원의 거대한 시스템은 저 젊은이들의 노동으로 수혈되고 있었다. 환자와 가족은 기꺼이 대가를 지불했고, 벽면에는 친절과 수고에 대한 감사의 인사가 빼곡한 글씨로 꽂혀 있었다. 지금 현재 법원에서 개인과 기업의 회생절차를 다루는 부서에 배정된 남편은 병원이 파산되는 사례를 많이 접하고 있다고 했다. 회생을 위한 심사과정에 참여하면서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제공되는 친절과 빈틈없는 의료행위가 고도의 서비스 전략이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환자와 대면하는 의료진들의 직무수행에 대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같은 입원실을 썼던 할머니와의 일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80대의 할머니는 위암으로 위 절제수술을 해야했다. 자녀들이 모두 장성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 딸 모두 살갑고 정겹게 대해 서너 명이 함께 와서 있어도 방해 받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노인이라기보다, 노신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편은 병실에 잠시 들러서 자녀들과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갔다. 하루 이틀은 딸이 간병을 하다가 할머니가 수술을 하고 난 후에는 24시간 간병인을 데렸는데, 문제는 간병인이 병실에 들어오고 나서 생겼다. 60대 후반의 노회한 간병인은 자신이 할머니한테 무얼 하는지 모두 알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가족들이 오면 할머니와 자녀들의 고운 외모를 칭찬하고, 자신이 얼마나 경력이 많으며, 수술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정작 할머니에게는 빨리 주무시라고 하고, 자신은 화장실을 오가며 얼굴을 치장하고 다녔다. 할머니가 수술을 한 날 새벽에 드디어 사달이 나고 말았다. 노인들은 큰 수술을 하고 나면 쇼크상태로 인한 일시적인 치매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새벽에 할머니는 몸에 연결된 모든 주사바늘을 뽑고 집에 가겠다고 침대에서 일어난 것이다. 콩나물을 사러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간병인에게는 ‘너한테 주는 돈이 아깝다. 네가 뭐하는 게 있다고 우리가 돈을 10만원씩이나 주고 있어야 하느냐’는 등의 말을 했다. 병원의 간호사를 비롯해서 레지던트들이 달려왔고, 새벽부터 의사들이 와서 대책을 논의했다. 간병인은 가족들에게도 긴급 연락을 넣었고, 그 와중에 할머니가 난리를 쳐서 자신이 한숨도 못 잤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달음에 달려온 아들과 딸의 위로를 받고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할머니)“인자 거기는 가시오. 우리 아들, 딸이 왔응께! 할 일도 없는데 뭐하러 있겄소”
(딸)“아니, 엄마, 그래도 그게 아니지. 간병인 아주머니가 없으면 우리가 번갈아 가면서 병원에 있어야 하는 데 그럼 너무 힘들잖아.”
(아들)“괜찮아, 엄마. 오늘은 삼일절이고 내일 모래 다 쉬니까 내가 병원에 있을 수 있어. 내가 옆에 있을게”
그 점잖은 가족은 간병인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좀 쉬고 오시라고, 우리가 옆에 있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간병인은 일시적 치매증상이라 하더라도 허를 찌른 할머니의 말을 듣고서는 자신이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했다. 곁에서 우리는 저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잠잠해지는 할머니를 보고서는 환자에게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요즘 제일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핸드폰 들여다보기, 쇼핑 사이트 돌아다니기, 잠 자기, 그리고 맑은 정신에서 책 들여다보기이다. 비율 순으로 늘어놓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도 곤란하다.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변한 것과 호흡할 때 목이 땡기는 것 외에는 몸의 컨디션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수술환자 코스프레 중이다. 이렇게 있어도 될까 스멀스멀거리는 불안감을 뭉개면서 그냥 지낸다. 그 중 맑은 정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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