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셔니스트> 내 능력 돌리도!
맛깔나는 영화여행/2011 애니요술경!
2011-06-23 17:56:28
<2011년 6월 16일 개봉 / 전체 관람가 / 80분>
<실벵 쇼메 감독 / 출연 : 장 클로드 돈다, 에일리드 랜킨 등>
열정의 락무대가 끝나고 마법사 일루셔니스트가 등장한다. 조금 전의 열정적인 분위기에 환호하던 관객들은 어느 덧 사라져버리고, 공연에는 관심이 없는 관중 몇 명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곳에서, 마술이 시작된다. 일루셔니스트는 이름 없고 초라한 마법사. 그래서, 그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 마술을 하게 되고, 그곳의 선술집에서 앨리스를 만나게 된다. 일루셔니스트의 마법에 동참하는 말썽꾸러기 토끼와 앨리스와의 쉽지 않은 동거생활은 그렇게 시작된다. 일루셔니스트는 이미 늙은 할아버지. 앨리스는 젊디 젊은 처녀. 영화는 낭만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를 그린다. 그들은 서로 언어도 달라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말로서 모든 것을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이 영화는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다가 왔어도, 서로의 마음은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하다. 그러나, 현실이란 벽은 일루셔니스트를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마술이라는 재주. 일루셔니스트가 평생동안 간직해왔을 그 마술을 통해, 그는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며 살아가게 되고, 일자리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다. 어디에서든, 그는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였고, 결국은 그는 마술이라는 자신의 재주조차 버리며 절망하게 된다. 소녀 엘리스와도 말없는 이별을 하게 되지만, 앨리스는 돌아오지 않는 일루셔니스트를 기다리다 결국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새 남자의 품으로 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사라지며, 일루셔니스트의 꿈도 그가 놓아준 토끼와 같이 사라진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은 한참동안 가시지 않았다. 결국, 일루셔니스트는 절망에 빠져 마술까지 놓아 버렸다. 하지만, 그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마지막의 몽당연필을 마술처럼 보여주려는 장면에서, 그는 마술은 놓았지만, 꿈은 포기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동심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그가 평생동안 해 온 마술이라는 그 꿈을 그는 포기할 수 있을까. 만약, 나에게 있는 나의 능력을 누군가 가져간다면, 나는 그에게 분명 외칠 것이다! 내 능력 돌리도! 일루셔니스트는 스스로 꿈을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한 포기는 현실에 대한 절망일 뿐, 완전한 포기는 아니다. 나이는 비록 많이 들었지만, 일루셔니스트는 그 어딘가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결국엔 그를 기다리다 떠나버린 엘리스와 그의 남자친구에게 축복의 미소를 날릴 것이라 믿는다. 오늘도, 일루셔니스트는 앨리스에게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열심히 마술을 연구하고 있을 것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일루셔니스트는 엘리스에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결국엔 앨리스가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났듯이 그렇게 꿈을 찾아주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꿈
맛깔나는 영화여행/2004 건방떨기
2011-06-23 18:15:05
<2004년 7월 16일 개봉, 전체관람가, 136분>
<알폰소 쿠아론 감독 / 출연 : 다니엘 래드클리프, 엠마 왓슨>
1. 꿈
나는 꿈을 꾼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꿈을 꾸기는 잘하는데 그 꿈을 이루어 본적은 한번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꿈을 이루기 위해 시도는 해보았으나 목적달성에 성공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실패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좀더 늦어졌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춘기가 너무 길었다고나 할까.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가 환타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더 나아가서 얘기하자면, 해리포터 시리즈는 환타지로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그러나, 그러면 당연히 시리즈물로서의 재미는 떨어질 거라는 이치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엄마 되지 않았다. 해리포터 시리즈 중의 세 번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그러한 문제점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2. 해리
드디어, 사춘기에 접어든 해리.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갈등이 있을 것이다. 서서히,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해리를 포함한 론과 헤르미온느 등, 그들의 주변은 성장기의 고통스런 심정이 서시히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리 커보이진 않는다. 해리포터3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그들이기 때문에, 심각한 고민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전반을 아우르는 전개과정은 해리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해리는 자신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해리는 드디어 자신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투명하기도 하지만, 추상적이기도 하다. 해리의 적은 자신의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다. 성장기에 접어든 소년으로서의 갈등. 그러나, 해리는 자신을 발견했기에 성장기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3. 진실
해리포터 시리즈 3편은 앞의 두 편에 비해 상당히 지루한 편이다. 그다지 스펙터클한 장면이 기대처럼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플롯에 충실하고 그들의 성장기가 갖는 고뇌와 그들 나이에 있을 수 있는 일상사에 더욱 주목을 한다. 그래서, 해피로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지루하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그 지루함 속에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은 어떤 것일까를 궁금해하곤 한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사람과 동물이 하나가 된다. 그들은 늑대인간이기도 하고, 생쥐로 살아가기도 한다. 어떤 이는 죽음의 개로 변하기도 한다.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악마성과 동물의 내면에 감추어진 본성을 적절히 조합하여 또다른 재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해리포터의 장점이다.
4. 신념
해리포터와 그의 일당(?)들은 별다른 꿈을 꾸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갈등하고 연구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그들의 사춘기는 그렇게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에게 정해진 미래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에게 신념은 없다. 그것은 그가 목적한 바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념이란 어떤 것일까. 해리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자신이 고통받아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이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것. 그것이 신념이 아닌가. 아! 실은 너무 거창한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다만, 해리는 영웅인가 아닌가, 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생각을 하다보니, 규정할 수 없는 해리의 다중성이 발견되더라. 그러 해리가 시리즈를 이끌어나갈 힘은 그 '신념'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 벅빅을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은 해리포터의 백미다. 나도 저렇게 하늘 한번 날아봤으면.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그 중에는 이룰 수 있는 꿈도 있지만, 이룰 수 없는 꿈도 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꿀 때가 사실은 더 행복하다. ^^
<주먹이 운다> '발견'의 눈물
맛깔나는 영화여행/2005 건방떨기
2011-06-23 18:51:43
<2005년 4월 1일 감독 / 15세 관람가 / 134분>
<류승완 감독 / 출연 : 최민식, 류승범, 임원희, 변희봉>
이런 포스터를 상상한다. 두 주먹이 무엇인가 불만에 가득 찬 울분으로 나를 노려보는 듯하고, 그 주먹쥔 손가락의 마디 사이로 눈물이 맺혀 있는 - 너무나 제목에 어울리는 포스터. 무엇인가 폭발할 듯 하지만, 차마 그 폭발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만 삼켜야만 했던 - 그런 세월이 주먹에 묻어 있는.
그러니까 그게 그렇다. 되는 게 하나도 없고, 희망도 없다. 그렇다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맨날 싸움질.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으니,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살 수 있다는 -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무엇인가 마음에 드는 목표 하나쯤은 ‘발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주먹이 운다>의 강태식과 유상환은 그런 인물이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사고뭉치 유상환. 그가 소년원에서 발견한 것은 신인왕전 도전이라는 ‘최선의 가치’. 희망 하나 없는 시대에서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강태식. 비운의 타이틀을 가진 그는 과거 은메달리스트였으나, 이제는 거리에서 매맞고 돈버는 복서로 전락한 삼류인생. 그러던 그가… 노숙 중에 발견한 신인왕 타이틀전. 영화는 예측가능하고, 상황설정의 전개는 평이하지만 <주먹이 운다>의 절정에선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인생의 정점이 있다. 이기고 중요한지 않은 순간, 최후의 결전에 그 정점은 비로소 극적으로 치닫는다.
아아- 절망이 절망이 아니게 되는 순간, 우리는 누가 이길 것인가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승부가 마무리 될 것인가가 중요해지고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최후의 순간. 흑백으로 처리된 유상환과 강태식의 얼굴이 동시에 클로즈업되면서 보여주는 그들의 환한 웃음은 슬픔을 느껴야 하는 시간을 주는 대신에, 할 수 있다는 희망 - 그러니까 이기고 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진정한 승부에 박수를 보내고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저 인생의 밑바닥에 있던 인생들이, 최후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스포트라이트 - 그러니까 집중적인 환호를 받았고 이기든 지든 그들의 모습에서 삶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퍼서라기보다는 기뻐서 흘리는 눈물.
그렇다. 이 영화. 보기보다 세다. 주먹이 우는, 분노에 떠는 포스터를 상상하는 건 죄악이다. <주먹이 운다>는 인생이 억울하기 때문에 울분에 쌓여서 우는 주먹이 아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꿋꿋이 또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굳센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이 <주먹이 우는> 이유다. 그러니,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보자. 두 주먹 불끈 쥐고, 허공에라도 한번 나의 주먹을 휘둘러 보자. 거기에 맞고 쓰러진 세상은 최소한 ‘나’보다는 약한 놈일 거다. 그러니, 나는 언제든 세상을 내맘대로 살 수 있다. 아아 - 그것이 우리의 ‘희망’찬 인생이라고 감히 단정해 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