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나기브의 집정(執政)과 애급(埃及)의 진퇴
애급(埃及)의 새 지도자인 나기브 장군은 7월 미명에 아리마헬 수상을 권고하여 사표를 제출케 하고 즉시에 과도정치 수반층을 전부 체포하는 제2차 비상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몸소 수상 겸 국방상 그리고 군총사령관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명실 함께 군 독재권을 확집(確執)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英), 미(美) 등 우방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논평을 가하기 않고 있거니와 앞으로 그가 과연 부패한 애급의 정계와 극굴(郤屈)한 사회를 진흥할 수 있는지 그리고 순전히 일시적 방편으로 정권을 잡고 다시 군권을 주장하자는 것인지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체포된 자 중에는 바달파사(破邪) 원수상(元首相)도 포함된 50명 이상의 고위정객(高位政客)들이고 전 수상 아리마헬 아르드 당지도자 나하스씨는 체포를 면한 것으로 보아 구왕파(舊王波)로 그 친근 분자는 아주 횟초리를 들게 된 셈이다.
그러나 유왕(幼王) 파우드(=파루크) 2세를 대표하는 섭정위원회(攝政委員會) 운영에 대하여 나기브 자신이 상당히 머리를 짜아 내지 않으면 유명무실인 뿐더러 애급의 왕제가 중대위기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나기브를 포함한 애급 내각은 즉시로 애급민은 매 일인당 이백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과 각 정당 선재(先再) 조직 하여야 두 가지 법령을 제정실시하리라고 한다.
애급의 농지를 중심으로 하여 와르드 당과의 결의에서 하였다고 하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이제 나기브가 직면한 애급이란 나라의 새 제도창건을 위하여 서는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써오던 수법 토지개혁부터 착수한 것은 당연한 순서이며 또 시끄러운 정당의 정리는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일찍이 일차대전 후 부패 희랍(希臘) 토이기(土耳其)(터어키)의 반과성적 지도자 케말파사(破邪)가 집권하였을 때 열국은 회의와 일종 공포를 느끼었고 신흥토이기(土耳其)를 방치 하였다. 파사의 정치를 처음에는 순전한 독재라고 보았으나 그는 둥거를 하게 가반(家反) 공론을 따라 향십선민(十先民) 주정권(主政權)을 실천하는데 힘썼던 관계로 오늘의 견실한 토이기(土耳其)를 이룩할 수 있던 것이다.
그 반면에 무쏘린의 이태리(伊太利)와 좀 늦게 출발한 히틀러 독일은 그들의 무식 폭학(幅學)만 비민주 암흑독재정치로 말미암아 결국 패망하고 말았고 그가 강제로 채찍질하던 두 민족은 크나큰 고통과 비애 속에 몰아넣은 것이다.
돌이켜 프랑크 서반아(西班牙)가 아직도 준순 고식적(姑息的)으로 민주진영의 품안에 들어오지 못한 까닭으로 당금 프랑크의 집정은 민주적이 아니요 독재적 경향이 있음으로 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우방의 전적원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서반아(西班牙)는 아직도 18세기 국가 환경 속에서 발전의 템포가 아주 느린 것이다.
이제 나기브 애급이야말로 영(英), 미(美) 우방의 인도에 순종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민주주의 방식인 것이다. 만일 그가 파르그 왕을 축출함으로써 애급과 애급민을 구하기 위함이라 하면 마땅히 이것을 취하여 민주대열에 끼워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고 정권 군권에만 령지(令指)가 동하여 암흑 독재만이 탐노(貪怒)하였다면 오직 그 일신의 멸망(뿐 아니라 오천년 애급의 역사를 말살 시킬 것을 각오하여야 할 것이다.
아랍 계열의 고립화를 피하는 이란과의 접촉에 나기브를 반대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계(尙界)의 관측이나 영국을 접촉치 않도록 하는 것은 영국의 덕망에 달려 있다. 독재자를 하나라도 만들지 않는 것이 민주진영의 플라스일 것이다. 그 후 나씨는 왕실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포하였다고 전문(傳聞)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