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앞에 핀 영춘화..2015.3.2.월요일 오후 대구여행 2015.3.2.월~3.4.월 (2박3일) 1편-동화사ㆍ2.28기념공원ㆍ국채보상운동기념관ㆍ동성로숙박 2편-약령시ㆍ경상감영ㆍ서문시장ㆍ중식ㆍ서원ㆍ달성공원ㆍ3ㆍ1만세로 ㆍ청라언덕ㆍ계산성당ㆍ이상화ㆍ서상돈고택ㆍ박근혜대통령생가터 3편-부인사 ㆍ동화사케이블카ㆍ대실역하차 강정고령보ㆍ대구83타워 ▲ eclin 우기수선생님의 영상作 '봄의 찬가' 2015년 3월 2일 06시45분 서울역발-동대구 10시34분착 무궁화 1203호 열차에 몸믈 싣고 대구로 향하다. 춘삼월 대지에서 움트는 새봄의 기운을 품으며 지하철이 있는 광역시를 찾아서 두번째 나그네길, 대구자유기행이다. 첫날은 영하의 추운날임에도 햇빛속엔 봄의 아롱이가 어른대며 봄소식을 알려오기도 했다. 둘쨋날은 일기예보대로 오전엔 눈이 내렸고, 오후엔 비로 바뀌었으며, 저녁엔 비가 그쳤다. 반갑게도 성급하게 꽃을 피운 노란 영춘화꽃을 만나면서 봄의 생동감도 맛 보았다. 특히나 이번 여행은 대구근대로의 여행, 근대문화골목, 골목투어가 이색적이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번에도 부산기행처럼 대구83타워에서 시간을 보내고, 동대구역에서 19시49분 KTX 172 열차로 21시 49분 서울역에 도착하여 지하철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차를 이용한 대구 자유여행1 동화사ㆍ2.28공원ㆍ국채보상운동ㆍ동성로숙박 여명이 밝아 오기전이다. 미리 예약해 둔 6시45분 새벽기차를 타기 위해 어둠속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서울역을 향해 님과 나란히 집을 나선다. 이번에도 간단한 봇짐을 챙겨 기차를 이용한 여행길이다. 앗뿔사! 차내에서 먹을 아침간식을 전날에 챙겨 두었는데 급히 나오느라 두고 왔다. 목적지인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점심겸 늦은 아침식사를 챙긴다. 우거지해장국.. 밑반찬까지 입에 착 달라붙어 혀를 달달하게 했다. 역내에서 두리번 대다 찾은 참 韓食당인데 식당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여행 첫 코스가 동대구역 옆에서 버스이용으로 이동할 수 있는 범어사인데 쥔님의 친절한 버스안내와 길안내도 받으며 스므스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동대구역 앞으로 나온다. 동화사행 급행버스1번을 타기 위하여 역을 등지고 우측으로 가서 계단으로 내려가면(오픈도로지만 지하라 칭함) 바로 버스정류장이 있다. 동화사까지 급행버스로 소요시간은 50분정도이다. 401번 버스가 들어왔지만 우린 급행1번버스를 타야한다. 그 버스가 올때까지 우린 더 기다려야했다. 팔공산 동화사입구에 도착하니 갓바위 숲길 안내도가 눈에 띈다. 예전에 다녀온 갓바위는 접고.. 우리가 관람할 곳은 830m 전방에 있는 동화사이다. 팔공산 유래 팔공산은 대구광역시의 중심에서 북동 방향으로 약 20km 지점,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에 병풍처럼 웅장하게 솟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해발 1,192.8m의 산으로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미타봉(동봉)과 삼성봉(서봉)이 어깨를 나란히 겨루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와 경북 경산시, 영천시, 칠곡군, 군위군 등 5개 시.군의 경계로 총면적 126,852km2의 공원이다.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부악(父岳), 중악(中岳) 또는 공산(公山)이라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공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들어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서기 927년 9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급습하여 경애왕을 죽이자, 고려 태조 왕건은 5000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도우려 출동하여 팔공산 동화사 근처에서 견훤군과 싸워 크게 패하였다(공산전투). 그 때 신숭겸과 김락 두 장수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신숭겸은 태조 왕건 옷으로 바꿔입고 싸우다 전사했고 김락도 같이 전사했다. 후에 16대 예종은 두 공신을 애도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애도했다. 또한 桐華寺, 把溪寺, 符印寺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이 산재되어 있으며,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는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흐르며, 가을에는 순환도로와 한티재로 이어지는 단풍의 절경과 겨울에는 설경과 설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자랑거리가 풍부한 공원이다. 입구에서 여기저기 둘러보며 지도 가운데 동화사, 왼쪽에는 파계사, 오른쪽에는 갓바위, 위쪽에는 비로봉과 동봉, 그리고 서봉이 보인다. *파계사(把溪寺 : 물길을 잡아서 절을 지었다하여 파계사라고 이름 지음) 파계사 오른쪽에 부인사가 보이며 아래쪽에는 노태우대통령생가도 보인다 야외공연장도 입구에 시설되어 있었다. 팔공산 케이블카는 월요일 운행을 안해 다음날 이용하기로 한다. 암벽타기 시설이 불안정하게 손님을 기다리며 찬바람에 떨고 있었고, 배가 불룩하게 살 오른 튼실한 까치 한마리가 반갑다 우릴 마중하였다. 새로 지은 금강문 (입을 벌리고 있는 나라연那羅衍金剛과 입을 다문 밀적密迹金剛을 모셨다) 금강문을 동화문이라고도 부르며 지금은 팔공산 동화사 주출입구가 되었다. 팔공산 동화사(八公山 桐華寺) 493년 신라 소지왕 15년에 極達和尙이 창건 유가사(瑜伽寺)로 불림, 832년 흥덕왕 7년 心地王師가 사찰을 크게 중창할 때 겨울인데도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서 동화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중창 당시 동화사는 금산사, 법주사와 더불어 眞表系 法相宗의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임진왜란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이 되어 승군을 지휘했다. 부속암자로는 비로암, 부도암, 내원암, 양진암, 염불암, 약수암 등이 있으며,대웅전(보물 제1563호),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43호), 아미타회상도(보물 제1610호), 목조약사여래좌상 腹藏典籍(보물 제1607호) 등 11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전(제11호)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옹호문(사천왕문) 擁護門(四天王門)과 柱聯 擁護聖衆滿虛空(부처님과 모든 중생을 옹호하기 위해 허공에 가득차고) 都在毫光一道中(모두가 부처님의 휘광이 한결같이 佛道 가운데 있으며) 信受佛語常擁護(부처의 말씀을 받고 믿으시며 늘 옹호하며) 奉行經典永流通(부처의 경전을 영원히 유통하시고 받들어 모셔야 한다) 봉서루(鳳棲樓) -봉황이 깃들어 있는 마루- 대웅전과 주련 天上天下無如佛(천상세계나 지상세계에서 부처님 같은 분이 없으니)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를 다 둘러봐도 또한 견줄 데 없네) 世間所有我盡見(세간에 있는 것을 내가 다 보았어도) 一切無有如佛者(모두가 부처님 같으신 분이 없다네) 야단법석(野壇法席)을 하기 위해 중생들에게 불화를 괘불(掛佛)할 때 고이는 지주석(支柱石)인 괘불걸이석이 대웅전앞뜰에 있다 까치 한 마리가 강직한 지조와 푸른 절개의 표상인 청초한 대나무.. 그 대나무 모습을 동화사에서 찰칵! 볼만한 참 잘 생긴 대나무이다. 통일범종루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범종(梵鐘), 4범음구(四梵音具)를 다 갖추었다 동화사 해탈교 동화사계곡엔 봄이 졸졸 재잘대며 흐르고 있었다. 팔공산동화사적기 493년(소지왕 15년) 극달존자가 창건, 유가사라 불리고, 832년(신라 진흥왕7년) 심지왕사가 중건할 때 가져온 간자 892개를 던져 그 덜어진 곳에 불당을 이룩하였는데, 때마침 오동꽃이 천우와 어울려 그 아름다움에 동화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6번의 중창을 통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내력과 사찰의 규모를 적고 있다. 동화사 관람을 마치고 약수암을 향해 500m 산길을 오른다. 통일대불 관람은 아래 두갈래 길에서 좌측길로 가면 된다. 약수암부터 좌측으로 먼저 오른다. 인적없는 눈덮힌 산길을 오르면서 신선이 따로 있던가, 천국이 따로 있던가 예가 바로 천국이요, 세속을 떠나 천국을 걷는 우리가 바로 신선이 되어 있었다. 맑은 영혼이 온몸에 휘감기면서 행복이 전신으로 번져왔다. 약수암에 이른다. 약수암은 동화사 인근에 위치한 산내 암자로, 특히 청정수로 이름나 ‘약수암’이란 사명(寺名)의 인연이 됐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약수암은 성문 스님이 동화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가람을 새롭게 조성하고 관세음보살까지 점안하게 됐다고 한다. 약수암의 원통보전 땅에 떨어진 솔방울이 눈속에 포옥 파묻혀 있다가 봄소식에 모습을 드러내며 때맞춰 올라 온 우릴 고운자태로 마중하였다. 약수암은 여기까지, 오던 발길 되돌려 하산이다. 눈처럼 하얀 차고시설물이 이색적이다. 통일약사대불로 향하기 위해 하산길이다. 동화사 금강계단(金剛戒壇) 금강계단은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를 행하는 곳이다. 계단(階段)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동화사 통일대불 앞에 있다. 동화사 금강계단 1992년에 준공한 높이 약 33m 통일약사대불은 국민안녕과 민족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徐居正선생이 대구십경중 제7경 '桐寺尋僧'의 자리이다 동사심승 遠上招提石徑層(층층이 돌길 더듬어 절 찾아 가는 걸음) 靑縢白襪又烏藤(푸른 행전 흰 버선에 검은 등막대 짚었거니) 此時有興無人識(내 흥을 모른들 어떠리) 興在靑山不在僧(흥은 청산에 있다네) (노산 이은상 역) 한자: 縢(끈, 행전 등), 襪(버선 말) 팔공산동화사봉황문 동화사 관람을 마치고 급행1번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온다. 2.28공원앞에서 하차후 국채보상운동기념관으로 이동이다. 하차후 버스가 오던길로 다시 걸어가 사거리에서 사선 건너쪽 도로옆에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을 휩쓴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고자 건립되었으며 2011년 10월에 개관하였다. 이 운동은 전 국민적 외채갚기 운동으로서 일반평민이 주동이 된 한국최초의 시민운동이었으며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최초의 여성운동이기도 하였으며 전 국민적 기부운동이기도 했다. 그 생생한 흔적을 전시실과 영상자료실에서 엿볼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태동 대구지역은 조선시대 후기 이래 경상도 내륙지방 상업의 중심지로 개항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였고, 상업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상이계층과 지역인사 등이 주권수호운동에 참여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서면서 국채보상운동의 불씨가 형성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의 창립과 1898년 만민공동회의의 활동이 전개되자, 1898년 대구에서는 독립협회지회를 개설하고 교육보급, 민중계몽 등의 수호활동을 펴 나갔는데 서상돈은 재무부장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1903년 경부선 철도공사를 계기로 일본인들의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일본 거류민회가 조직되었고, 1906년 9월 大邱理事廳이 설치되면서 대구 일본거류민단과 대구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만들어졌다. 대구지역 상인들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항하여 大邱民議所(대구상공회의소의 전신)를 조직하였으며, 그 후 대구민의소는 大邱商務所를 만들었는데 그 중심세력은 서상돈을 위시한 서문시장 상인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달서여학교, 협성학교, 성립학교 등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이 운동을 주도하던 조직은 1906년 1월에 세워진 大邱廣文社였다. 대구광문사는 1906년 1월 서상돈, 김광제, 정규옥 등이 신교육을 위한 교과서,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으로 상인층을 중심으로 전직관료, 유생층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영남일보라는 신문발간도 추진하여 이 해 6월 농상공부로부터 발간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1907년에 들어 대구 광문사는 교육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지역인사 600명으로 별도의 조직인 文會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大邱廣文會였다. 서상돈에 의해 대구지역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되었던 곳도 대구광문회를 大東廣文會로 개명하려던 자리였다. 이렇게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주권수호를 위해 꾸준히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이 불씨가 되어 국채보상운동이라는 범국민적 경제주권수호운동의 불꽃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빚 1,300만원 개항이후 일제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목표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치, 군사,경제 등 각 방면에 걸쳐 독점적 제배권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승리한 일제는 경제침략의 일환으로 대한제국에서 각종 이권을 침탈하고 대한제국에서의 경제적 제배권 확보를 획책하였다. 1904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완전 경제 식민지화를 위해 재정고문을 두도록 강요하여 1905년 6월 일본인 메가다를 대한제국 재정고문에 임명하였다. 메가다는 화폐정리를 구실로 일본 제일은행에서 300만원을, 채권 상환 등을 명목으로 200만원을 차입하였고, 또한 12월에는 국내 은행 보조 대부와 금융조합 창립금으로 150만원을, 1906년 3월에는 통감부 개설이후 시정개선비 마련과 기업자금의 명목으로 일본 흥업은행에서 1,000만원 등 총 1,650만원이 되었는데 1907년 2월 신채로 구채 350만원을 정리하여 1,300만원이 되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이러한 차관은 관세나 국고금을 담보로 하였고 금리도 연 6%이상의 고리이며 통감부가 임의로 집행을 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미명하에 온갖 꼬임과 부추김으로 차관공략을 추진하여 우리정부를 경제적 파탄에 직면하게 하였다. 결국 일제 차관도입 강요는 대한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책략에 불과한 것이었다. 1,300만원은 당시 공무원인 주사의 봉급이 15원, 신문 한 달 구독료가 30전 정도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금액으로 1906년도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3,3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대구, 감동의 불바다로 변하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지식인과 상인층의 주도로 점화된 국채보상운동은 2월21일 대구 서문 밖 壽昌社에 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 설치를 시작으로 본격화 되었다. 북후정에서는 대규모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 3개월간 담배를 피우지 말고 그 대금을 수납하자'는 연설이 있었고, 이에 호응한 군중들은 담배와 담배갑을 던져버리고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였으며, 연이어 거지, 백정, 마부, 야채상인, 주모, 노비, 날품팔이꾼까지 돈을 내는데 앞장섰는데, 첫날에 모인 돈이 500원을 넘었다. 북후정 군민대회의 흥분과 감동은 국채보상을 위한 본격적 행동으로 대구 전역에서 나타났다. 이틀 뒤인 2월 23일에는 남일동에 거주하는 부녀자들이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나라를 구하는 데는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며 기꺼이 佩物을 내놓았으며, 기생 앵무도 수합사무소를 찾아와 100원을 義捐하였다. 특히 기생 앵무는 누구든지 기천원을 의연하면 죽을 때까지 따르겠다고 하여 서상돈 등 관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앉은뱅이 걸인이 수합사무소에 와서 의연하고 담뱃대를 부러뜨렸는데,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감동하여 의연금을 내어 놓았고, 부인들은 은가락지, 은장도 등을 그자리에서 의연하였다. 이제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한 남자들의 단연 운동을 넘어, 여성들의 脫環과 패물금지, 먹을 것을 줄여 이를 모금하는 減餐, 減膳, 등의 형태로 이어져 그야말로 대구는 국채보상을 위한 감격과 감동의 불바다로 변하면서 이 열기를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했다.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취지문 삼가 아룁니다. 무릇 시민이 忠으로 행하고 義를 숭상하면 이로써 그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편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의가 없으면 이로써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음이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歐州에서도 부강한 나라와 멸망한 나라들의 역사는 모두가 충의를 소중히 하고 숭상하는지 여하에 기인하는 바라. 근세 역사를 보건데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진멸한 에집트나 월남 폴란드 등의 국민은 모두가 단지 자기 한 몸과 자기집만을 알 뿐 군주나 국가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인 즉, 이는 자함자멸(自陷自滅)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열심하여 충의를 분발할 때가 아니리오. 그러나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다. 2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 아 2천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가 있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원하노니, 대한의 신민과 여러 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여 알려서 모르는 이 한 사람도 없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명(聖明)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유지하기를 천만 행심이로다. 설명문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자에 보도된 순한문 취지문으로 대구광문회 서상돈 선생의 국채보상 발의를 2백여 회원의 만장 일치로 결의하고 국채 1천 3백만원 보상 취지문을 작성, 전국 각 도에 공한한 내용임. 국채보상운동의 선두에 선 안중근 의사 일제의 탄압과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처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 되었을 때, 통감부는 한국인의 성격을 보아 단연 운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가볍게 보아 넘겼다. 일본의 시사신보 같은데서는 '한국민의 빈곤으로는 거액을 수집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외국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이 전 국민적 운동으로 번져나가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여용단체인 일진회 등을 통해 방해공작을 펴는 한편, 애국적인 언론 및 정치. 사회활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제정.공포하였다. 보안법의 공포로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적 단체인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고, 신문지법에 의한 언론탄압이 강화되면서 민족지의 언론활동이 위축되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베델 등은 일제의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민중과 밀착하여 운동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일제는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영국인 베델을 추방하고자 3차에 걸친 공작을 폈으나 영국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일제는 이른바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날조하여 언론을 통한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꺽고 운동을 좌절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7월에 대한매일신보사 총무이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회계책임을 맡고 있던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으로 구속하였으나 결국 양기탁은 무죄선고를 받았다. 양기탁은 비록 무죄를 받았지만, 이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이 커져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꺽고 운동을 좌절 시키려는 일제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조종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반대하고 국채보상운동기성회의 해산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집요한 일제의 탄압으로 자발적인 국민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침체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좌절되었으나 국채보상운동의 전국민적 참여는 애국심을 고취하고 항일의식을 고조시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끊임없이 전개되는 국권회복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결과 1907년 2월 시작되어 온 국민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909년 11월에 조직된 국채보상처리협회에서는 대구 시민들이 납부하고 남은 의연금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민립대학을 건립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통감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게 강탈당하였습니다. 경상북도 성주군 같은 곳에서는 모금한 의연금을 일제에 넘길 수 없다며, 의연금으로 성명학교를 세워 애국교육을 실시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남은 의연금으로 애국교육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당시 1,300만원의 국채를 갚아 경제국권회복을 이루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민족적 결집에 의한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사상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신분, 계급, 성별, 연령, 종교와 국적까지도 초월해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온갖 방해로 좌절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형성된 국민의 결집된 힘과 애국정신은 1919년의 3·1독립만세운동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지속할 수 있었던 민족의 저력이 되었습니다. 지난 1997년 금융위기인 소위 IMF구제금융을 받고 나라 전체가 어려웠을 때, 우리 국민은 금모우기 운동으로 국제금융위기를 벗어나려고 모든 국민이 동참하여 극복한 일이 엊그제 같았는데 그 때는 금을 가지고 가면 금값을 치러주었으나 1907년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그야말로 대가 없는 기부였다. 저녁은 동성로 맛집 대구백화점옆 청주버섯집에서 '냠' 우연히 맛있게 보이는 집을 찾아 들어갔는데 알려진 맛집이었다. 하루일정을 마치고 대구의 중심가인 동성로 포유모텔에서 하룻밤둥지를 틀다. 사진편집및글: 찬란한 빛/ 김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