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마을기자단 조은희
중랑마을人이란,
중랑구에서 다년간 활동해온 마을활동가분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마을활동기를 기록하는 마을기록활동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소개될 다양한 활동들을 기대해주세요 :)
2021년 10월 말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을 펴낸 정종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망우리 묘역의 역사 속 인물들의 알리미이자 지킴이이신 선생님의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1. 본인 소개를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정종배입니다. 신현고등학교에서 2020년 8월 31일부로 정년 퇴임했습니다.
교직엔 약 38년간 있었고요. 중랑구하고 관련된 학교는 2000년도에 장안중학교에 3년 근무했었고요. 고등학교 동기가 여기 면목동에 살아서 70년대 3~5년 친구 집에 거의 일주일에 서너 번은 왔었습니다. 다음에 군대 제대하고 중화동에서 1981~82년 한 이 년 정도 살았습니다.
2. 마을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제가 초등학생 때 형님이 중학교 입학할 무렵 저희 3형제가 지리부도 펼쳐놓고 지명 알기를 했는데 그 당시 망우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중학교 입시 마지막 세대여서 선생님이 공동묘지에 관해 이야기 해주셨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망우리에 대해서 이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00년도에 장안중학교에 오면서부터입니다.
현재 마을활동은 꽃망우리협동조합, 망우산공동체 마을과아이들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 망우역사문화공원 자문위원, 중랑구청 체육청소년과 청소년 자문위원 및 청소년해설사 강사, 중랑구청 문화관광과 문화재 검토위원 및 백일장 시낭송회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있고, 망우역사문화공원 강사 및 해설사, 중랑구립정보도서관 및 구립신내종합복지관 우리고장역사알기 강사, 데시앙 책울터 작은도서관 우리고장역사알기 강사를 하고 있습니다.
3. 망우리 공원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중학교 1학년 담임을 하면서 3월 한 달은 정신없이 보내다가 4월 첫 주 토요일 오후에 망우리에 갔는데 그때 맨 처음에 접한 묘가 아사카와 다쿠미 묘입니다.
다쿠미 선생에 대해서는 『잃어버린 동화』라는 박문하 수필집을 제가 전날 밤에 읽었어요.
책 맨 마지막 꼭지 「한 권의 책」에 다쿠미 선생의 이야기가 있는데, 묘에 화환이 즐비해서 나는 재벌 집인 줄 알았어요. 올라가 봤더니 책의 맨 마지막 꼭지에 나오는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묘였습니다.
다쿠미란 분이 되게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세요.
17년간 한국에 계셨는데 그분이 원래는 식민지 임업 시험관리소 말단 직원이었습니다.
그 형님이 노리타카란 분이신데 그분은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도자기에 조예가 깊습니다.
또한 그분 형님의 친구인 야나기 무네요시란 분은 우리 한국의 미를 ‘한(恨)의 미’라고 규정한 분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의 이런 문화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이 두 형제가 계기입니다.
그러니까 노리타카가 수집한 도자기를 보고 ‘한국의 공예’를 일본에서는 ‘민예’라고 그러는데 민예에 관해서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형님인 노리타카는 조각을 전공하셔서 남대문 소학교 선생님으로 오셨고 다쿠미는 말단 임업 시험소 고원이었는데 수목 관련만 아니고 글도 잘 쓰고 그래서 1920년대에 <폐허> 동인들하고 긴밀히 연락하고 잘 통했어요.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남궁벽 등 <폐허> 동인들하고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와의 소통과 만남의 역할을 하게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중랑구하고 관련 맺은 것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친한 인사로서 그분과 관련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1920년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중요 역할을 해서 그런지 제가 그 망우리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까 현재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내놓으라 하신 분들을 만날 수 있게끔 오늘 여기에 대담하게까지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한테도 ‘2000년 이후의 제 인생에 전환점은 다쿠미 선생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 『망우리 공원 인물열전』 출간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장안중학교에 있으면서 전교생 또는 반 아이들과 망우리에서 봉사 및 체험학습을 했습니다.
여기 봉화산도 아직 둘레길 전에 희미한 길을 애들하고 함께 걷고 활동하면서 우연히 망우리 최학송 선생 묘지를 알게 됐어요. 그 안에서 다른 분들은 봉분이 관리가 됐는데 최학송 그분의 묘 관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폐허 마냥 볼 수 없을 만큼 안타깝게 됐는데 중앙대 국문과 교수 및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고 ‘우리 문학 기림회’라고 해서 표지석을 세우는 단체가 있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친구들이 기왕에 다니는 거 자료를 좀 정리해서 책 내면 어떻겠느냐 부추겼어요. 그때는 글재주도 없고 능력이 안 된다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지나치다가 제가 최학송 묘지를 세 번 봉분을 해드렸어요.
세 번째는 제 고등학교 동기인 여수에서 사업하는 이호일 친구가 소리소문없이 좋은 일 한다고 세 번째 봉분 가격을 그 친구가 내주었습니다.
묘지를 하나하나 알게 된 과정에서 찾게 된 것이 유족들하고 관계자들을 뵙게 되었습니다. 유족들하고의 만남에 의해서 나름의 마음가짐이 색달라지고 정리하다 보니까 결국 이런 책이 나오게 됐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좀 더 꼭지를 새롭게 한 것은 내년 100주기인 관동대지진에 관련된 분이 여기 한 열 분 정도 계십니다.
예를 든다면 송석하 선생이나 유상규 선생, 조봉암 선생, 김영랑 시인, 장형두란 분이 계십니다. 또 오기선 목사님도 계십니다.
김영랑 시인이나 오기선 목사는 이장했어요. 송석하 선생도 이장했는데 직접적으로 자기의 인생이 바뀐 것은 그 당시 경제학 공부하러 일본에 갔을 때 거기서 그 현장 참상 민족의 참상을 보고 정신적으로 2년 정도 방황했답니다. 신경과 정신 약도 먹고 치료도 했겠죠.
그러면서 그분이 우리나라 민속학의 1세대가 된 이유가 관동대지진이라고 이렇게 말을 하고 있어요. 애매한 게 계용묵 선생 같은 경우도 거기 있다. 없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데 『인두지주』라는 소설에서 그 당시 참상을 묘사했습니다.
나운규 선생의 영화 <아리랑>도 그 참상을 보고 귀국한 학생들이 중심으로 돼서 맨 마지막에 민족의식을 불태우는 그런 영화 장면을 촬영하게 됐답니다.
그다음에 방정환 선생님 같은 경우도 그때 현장에 있었다. 없었다. 이렇게 불분명하지마는 후원금 조직하고 천도교 대표로 그 당시 불탄 현장 조사요원으로도 갔고 또 후원금도 전달했다. 해서 방정환 선생도 확인이 됐습니다.
1923년 그 당시 관동대지진이 우리나라 문화사회에서는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찾아보니까 우리나라 저항시 뿌리 있잖아요. 김동환 김영랑 이상화 이육사 유치환 이런 분들이 그 당시 참상을 똑똑히 보는 현장에 있었어요. 그래서 책에 관동대지진의 한 꼭지, 또 하나는 친일하는 분들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스무 분 정도 계십니다. 이장을 대부분 했고 현재 유명하신 분 중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분이 장덕수, 김상용 시인, 동요 <오빠 생각>의 최신복 이분은 관동대지진 때 현장에 계셨습니다. 시인 김상용과 함세덕이라는 극작가 같은 경우도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돼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50여 분 정도와 백칠팔십 명 정도가 실질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교과서에서 뵐 수 있는 서른 분 정도는 이런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인물들이 계셨습니다.
다음에 또 하나는 사회주의자 우리나라의 이념에서 일제강점기 때 20년대 초 30대 초의 사회주의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 해방 이전에 돌아가신 분들은 서훈받았어요. 해방 이후에 남북 이념 대립 관계에서 이북 쪽에 관련되신 분은 서훈받지 못했습니다.
4·19 혁명에 약 180여 명 돌아가신 분들이 대부분 여기 묻혔다가 수유리 국립 4·19 묘지로 가기 전에 망우리 묘지에 계셨어요. 1936년 이전에 돌아가신 분들은 망우리로 이장했어요. 이장하신 유명한 분들의 묘적부를 찾아보니까 묘적부에 이름이 기록이 안 돼 있어요.
그래서 4·19 혁명과 관련되신 분들은 한 명도 기록이 안 돼 있는데 묘비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박동훈 열사입니다. 박동훈, 전한승, 진영숙 양 등 언론에 많이 노출된 분들도 분명히 신문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꼭지를 들었습니다. 사회주의자 사회주의 운동에서 이제 일제강점기 때 사회주의 오기만 선생이나 김사국 선생, 장덕수 선생, 4·19 혁명 관련된 선생님이 책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새롭게 집어넣은 것입니다. 제가 정년을 한 신현고등학교에 국사 선생님이 새로 오셨어요. 그분이 한 2년 정도에 단독으로 마무리를 탐방 탐구해서 거의 완벽하게 나머지 분도 정리했습니다. 망우리에 거의 이백여 분 정도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한 그러다 보니까 이제 여기 중랑구 거주자, 중랑구 안에 거주했던 작가 중에서 교과서 수록 작가가 10분 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광섭, 박재삼, 장준하, 정완영, 김주영, 전상국, 조선작, 김명수, 김명인, 하종오, 나희덕 등입니다.
5. 중랑구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원형 보존입니다.망우리 공원 자체는 원형 보존인데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가 생겨서 대외적으로 많은 신경을 써서 이미지도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토목건축을 해서 묘비 주변에는 그동안에 20년 30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이중섭 묘역 같은 데도 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었거든요.
그 의미가 어떤 누군가가 와서 심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나무들이 달랐고 다쿠미 묘역도 보면 기념식수가 따로 있었어요. 근데 방정환 선생의 묘역도 새로 정비하면서 그걸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제거됐습니다. 어떤 편의를 위해서 그런 것은 좋긴 하지만은 그런 소품들이나 좀 의미 있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에 아쉽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답사할 때의 안전사고 이런 것은 충분히 진입로가 확보돼야지만 봉분 자체는 원형 보존을 그대로 했으면 합니다.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다고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이야기하다가 지금은 세계 문화유산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려면은 원형의 칠십 프로 정도는 유지돼야 한다는 건데 지금 구리시하고 중랑구하고 서로 경쟁이 돼서 방정환 선생 묘역이나 한용운 선생 묘역 같은 경우에도 구리시에서도 따로 공사하고 관리하고 있어요. 현재는 방정환 선생의 묘역에 대해서 중랑구가 또 대대적으로 묘지 앞에 빠져나간 묘역을 정비하는데 제가 봐서는 데크 몇 개 깔고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완전히 새로 석축을 쌓고 있습니다. 관련 단체들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고 개인적으로 불만인 사람들이 사무실에 엄청나게 항의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정리하는 것 자체에서 원형은 보존하고 그다음에 진입로나 이런 것은 최소한 기본적인 것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의 옛것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최근 3~4년 사이에 목격하고 있습니다.
최학송 묘역 같은 경우도 앞에 상석도 만들고 싶지마는 없는 것도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6. 선생님의 향후 계획이 있으신가요?
개인적으로는 망우리 관련된 문학 또는 어떤 것에 대해서 학생들이나 성인, 일반인 상대로 강의해보고 싶습니다.
예를 든다면 현재 제가 <창조 문예>라는 월간지의 망우리 문인 열전에서 20분 정도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열한 분 연재했는데요. 이 책은 15~ 20매인데 그건 60매까지 4~5배 정도 많습니다. 제가 문학 평론가는 아니지만, 문학적인 어떤 업적보다는 일화 중 그분의 에피소드 이런 것은 어느 정도 들어가 있습니다. 유족들 관련해서 유족들을 만나고 예를 들면 박순녀 소설가 같은 경우는 한 이 년 정도 해서 여섯 번 정도 뵈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화를 저에게 이야기해서 처음으로 드러낸 경우가 있습니다.
방정환 교육지원센터나 어떤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망우리 관련된 작가나 또 중랑구 거주 작가 교과서 수록 작가 또는 작품만 가지고도 독서 모임이나 그런 생활에 관련된 내용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박재삼 시인이 묵동에 20년 사셨어요. 고향이 삼천포거든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지금 공주에 묻혀 계시는데 운동을 벌여서 이쪽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내년 2023년 관동대지진 100주기 기념과 독립운동가 동우 이탁의 ‘27인 결사대’,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의 망우리고개 넘나들며 장사봉사로 세상을 살겠다고 터득한 표지비를 세우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김영랑을 망우리에 다시 모시는 것과 구상 선생 관련된 이중섭 묘 옆에 <구상네 가족>이라는 그림이 있잖아요. 그걸 조각이라도 해서 이중섭 묘역 옆에다 따로 모시는 이런 작업을 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