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폼페이 위치
폼페이 유적은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남측에 있어 로마에서 버스로 3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는 고속도로는 늘 정체가 심해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한다.
폼페이는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어 캄파니아의 신석기시대 주민 후손들인 오스칸족이 처음으로 정착했고 8세기에 나폴리 만 건너편에 정착해 있던 그리스인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BC310년 제2차 삼니움 전쟁으로 캄파니아는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폼페이도 로마 장군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통치하게 된 때부터 라틴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고, 제도·건축·문화면에서 로마 화되었다.

고속도로에서 본 베수비오 화산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은 79년 8월 24일이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사령관이었던 대 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는“대 플리니우스는 스타비아이에서 친구들을 구조하려고 애쓰다가 죽었고 이튿날 화산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7m의 화산력과 화산재로 덮였으며 베수비오 화산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스타비아이의 별장들은 그다지 많이 파묻히지 않았고 헤르쿨라네움에서는 격류와 함께 떠밀려온 화산물질 더미가 20m 두께로 도시 곳곳을 뒤덮으면서 일종의 진흙용암으로 굳어졌다.”고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화산 폭발의 징조는 이미 62년에 일어났고 인근 도시인 에르클라네움은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 폼페이는 건재하였다. 폼페이는 사시사철 해가 뜨기 때문에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화산의 지반열이 있어 그다지 춥지가 않아 로마 지도자들이 휴양지나 별장 등을 많이 지었던 곳이다. 그러나, 폼페이는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해 인근 도시인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고 15,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7m 이상의 화산재에 파묻혀 사망한 비극의 도시다. 당시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고향인 폼페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저주받은 도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폼페이 유적 지도
폼페이의 유적은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6세기말에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인 1709년에 헤르쿨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지만 폼페이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고, 이 발굴 작업의 여파가 굉장해서 전 유럽에 고대 그리스풍의 유행이 새로 생기기 시작했을 정도이며 유럽의 부호들은 너도나도 이 발굴 작업에 뛰어들었는데 서유럽에서 유물, 유적은 단순한 예술품 이외에 엄청난 부를 안겨 줄 수 있는 또 다른 노다지였기 때문이다.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었다. 발굴은 현재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왔다.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발굴 감독이 되면서 발굴지 사이에 놓인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했는데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을 가구로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집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다. 또한 피오렐리는 화산재 속의 시체가 분해되어 생긴 구멍에 시멘트를 부어 신체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고대의 문·가구·밑바닥의 주형을 뜨는 데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발굴 작업은 1951년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지휘 아래 집중적으로 재개되어 제1구역과 제2구역에 있는 아본단차 가도 남쪽의 넓은 지역이 발굴되었고, 시 성벽 외곽에 쌓인 파편들이 치워져 노케라 문과 이 문으로부터 누케리아까지 이르는 도로의 양편에 나란히 뻗은 멋진 공동묘지가 드러났다. 현재 폼페이의 3/4이 발굴된 상태이다.
로마에서 오전 6시30분에 출발, 3시간여 고속도로를 남쪽으로 달려 10시경 폼페이에 도착한다. 입구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폼페이 최후의 날을 확인하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폼페이 유적 입구

포르트 마리나
가파른 언덕위에 세워져 있는 포르타 마리나는 과거 폼페이와 바다를 연결한 문으로 나폴리만 연안의 항구 도시였던 폼페이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 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이다. 2개의 문 중 왼쪽문은 보행자를 위한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과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에서 생산된 농산물 등을 운반할 때 이용했던 수레 마차를 위한 것으로 지금도 깊게 패인 바퀴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다.

바실리카 광장과 뒤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
입구를 지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실리카 광장(포름)이다. 저 멀리 폼페이를 집어 삼켰던 베수비오산이 보인다. 폼페이로 부터 직선거리 8km라 한다. 수 천년동안 이곳 폼페이를 바라보며 자신 때문에 벌어졌던 비극의 도시 폼페이의 진실을 알고 있을 베수비오산은 아무런 말이 없다. 베수비오 산은 여전히 활화산이라 하니 언젠가 또다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평화로운 도시위로 용암을 내품을지도 모른다. 기원전 120~78년에 세워진 바실리카는 폼페이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로 로마 이전시대의 건축을 엿볼 수 있다. 건축 초기에는 코린트 양식의 거대한 기둥이 남아 있는 이곳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로마 공회당으로 고대 로마인들의 공공회합의 장소로 여럿의 의견을 한데 모아 해결할 일들이 시행되었던 민주주이 산실이고, 시장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재판을 하기도 한 공공 장소였다고 한다.

바실리카 |  아폴로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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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좌측에 있는 아폴로 신전은 BC 6세기경의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쌓아올린 재단을 첼라라고 하는데 신전에서는 화살을 쏘는 모습으로 서 있는 아폴로 신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를 모신다. 머큐리 신에게도 제사를 올렸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폼페이 중앙 도로
광장에서 연결된 큰길.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다. 도로 끝에 돌 세 개가 세워져 있다. 이는 광장으로의 진입금지석이다. 도시구획이 아주 반듯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가게 터의 상가를 지난다. 가지런한 상가의 골목골목 이 그대로 남아있다.

폼페이 도로와 인도
2천년전 로마에서 도로를 건설할 때는 땅을 2m 깊이로 흙을 파내고 가장 아래에는 큰 바위돌이나 자연석을 깔고 그 위에 작은 돌과 모르타르를 섞어 70cm 두께로 깐 후 다시 작은 사금파리 등 혼합물을 10cm 두께로 깔고 그 위에다가 마차가 달릴 수 있도록 사암이나 판석 등 단단하고 넓은 돌을 서로 견고하게 맞물리게 해서 촘촘하게 깔면서 응회암과 석회로 콘크리트를 쳐 마무리해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단다. 또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가야 하므로 징검다리 같은 돌을 도로에 놓았는데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용도이지만 마차가 속력을 늦추도록 하는 효과도 있어 놀랍다.

음수대
큰길에는 이렇게 음수대도 군데군데 있다. 수도꼭지는 없지만 그 당시 로마 여러 도시에 이런 상수도 시설을 설치했다는 것을 상상해 보니 놀랍기만 하다.

음식점 혹은 술집

공중목욕탕

탈의실의 옷 보관함
공중목욕탕의 탈의실, 왼편 사각함이 옷보관함이다. 이 목욕탕은 공회장에서 오는 외지인들이 주로 이용했던 목욕탕으로, 폼페이에서는 규모가 가장 작았지만 가장 세련된 목욕탕이었다. 여탕과 남탕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목욕탕은 온탕과 미온탕, 냉탕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미온탕에는 공기를 데웠던 청동 화로가 있다. 또한 온탕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도 있다.

빵 굽던 화덕

밀을 빻던 맷돌
빵을 굽던 가게. 벽돌 반원 안이 오븐이었다고 한다. 요즘 빵집이었던 모양인데 맷돌 크기로 보아 엄청난 양의 밀을 빻아 빵을 만들던 대형 빵집인 듯하다. 어처구니가 매우 큰 것으로 볼 소나 말 등 대형 가축을 이용해 맷돌을 돌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환락 입구 골목
이곳은 환락가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당시에도 매춘이 있었다는 사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야릇한 미소와 웃음을 볼 수 있는 홍등가이다.

환락가를 알리는 표식
바닥에 음각되어 있는 것이 성매매업소를 알려주는 표시란다. 무척 노골적이다.

여러가지 성행위를 묘사한 벽화
성매매업소 복도 벽면에 그려져 있는 그림. 향략의 도시답다. 여러가지 체위의 그림들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체위에 따라 화대도 달랐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주어진 최초의 직업이 창녀라 하던가?

성매매업소의 방에 있는 돌침대
성매매업소의 방에 있는 돌침대가 무척 작고 불편해 보인다. 침대의 크기로 보아 당시 폼페이 사람들은 키도 작고 체구도 작았을 것 같다.

제우스 신전(Tempio di Giove)
제우스 신전은 폼페이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이었으며 당시에는 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신전의 입구에는 5개의 기둥이 있고, 내부에는 보물과 성구들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 신전은 화산이 폭발할 당시 공사 중이었다고 한다.

짐을 배달하는 모습



폼페이 최후의 날 화석으로 굳어버린 사람들
화산재와 용암으로 덮여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모습. 누워 죽어있는 사람. 개와 함께 넘어져 죽어있는 사람. 뜨거움을 참지 못해 얼굴을 감싸 안은 채 주저앉아 죽어있는 사람 등등 순간정지로 미이라가 되어 후세인에게 보여주고 있다. 살고자 하는 최후의 참담한 모습이 너무 처절 했으리라.
발굴 당시 유물은 많이 발견되는데 반해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도처에서 이상한 형태의 빈구멍 만 많이 있어 그 구멍에 석고 물을 부어 굳힌 후 주변 흙을 걷어내었더니 사람의 형태를 보였다고 한다. 에 대한 위험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품페이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일상생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화석으로 굳어져 버린 사람들. 얼마나 급작스러운 화산 폭발이었기에 미처 피하지도 못했을까? 사실 폼페이 사람들은 그 일을 당하기 십 수년 전에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화산재가 도시를 뒤덮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막상 또 한 번의 폭발이 있자 그저 화산폭발에 동반된 지진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리며 탈출을 늦추다 고스란히 생매장을 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품페이의 화산 흔적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화산폭발을 하게 되면 엄청난 화산재와 용암으로 인해 시신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될 텐데 품페이의 유적은 표정까지 살아있을 정도로 너무나 생생하게 하게 남아 있다. 어떻게 품페이의 유적들은 최후 순간까지 그렇게 생생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먼저 시신들이 거의 공기와 접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화산재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대기 중에 떠다니는 미생물들이 시신을 분해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이와 함께 뜨거운 화산재와 고열의 유독가스가 사람 몸 속에 있던 미생물을 순식간에 제거해 몸의 부패를 막을 수 있었고, 베수비오 화산이 용암을 내 품는 화산이 아닌 폭발형 화산이었던 것이 폼페이 유적 보존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보존된 시신들은 다 삭아 없어졌지만, 표피만큼은 화산재와 사람의 몸을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처럼 남아 그 생생한 현장의 표정을 지금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폼페이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인간 화석들 중 일부는 그 윤곽을 뚜렷이 보여주기 위해 나중에 석고 같은 것을 부어 형체를 재현한 것이다.이와 같이 자연 앞에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화산 폭발이다. 웅크린 채 죽어간 사람의 cast와 발굴 유물들. 대포알처럼 보이는 것들이 술항아리로 추정된단다.

발굴된 유물의 일부. 발굴된 유물들 중 귀한 것들은 유적지에서는 볼 수 없었고 유적지 곳곳에는 휘장을 치고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출구 옆에 서 있는 청동상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걸까? 그늘이라곤 하나도 없는 거리를 뙤약볓 아래에서 3시간여 동안 걸어서 구경하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하여튼 힘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