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사기 13:8-25
최근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한 공주가 탈출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주는 40개의 방과 수영장과 사우나가 딸린 대저택에서 100명의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주는 풍요 속에서 아버지의 철저한 통제 안에 갇혀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삶을 위해 탈출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남녀평등이 많이 실현되었다지만 인류의 역사는 힘 있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과 힌두 사회에서는 여성의 인권은 남성의 권위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21세기 두바이의 공주라 하여도 여자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힘든 세상입니다. 이와 같이 여성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성들에게 억압과 통제와 멸시를 받을 때 여자들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먼저 남자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을 잠들게 하여 그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흙에서 나온 사람이란 뜻이고 여자는 남자에서 나온 자를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것을 보더라도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온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는 남자에게 속한 존재이기에 남자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있는 아담과 화와에 관한 말씀을 생물학적인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은 수박의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표피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남자 아담을 계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의 죽음으로 나오는 것이 여자이듯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나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 하나가 되듯이 남편인 그리스도와 여자인 성도들이 하나가 될 것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여성의 권리의 신장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남성들과 대등한 삶을 원하고 나아가 더 우월한 자리에 앉기 바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여자로 살아야 하는 성도들도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사는 그 여자의 자리(믿음)에 만족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여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성도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남자의 흉내를 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자가 아니라 남편인 하나님 흉내를 내며 스스로 힘 있는 자와 독립적인 자로 살고자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를 의지하며 사는 여자의 삶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나도 아버지처럼 남자답게 살겠다고 떠났듯이 이 세상으로 나온 모든 인생들은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여자로 살아야 하지만 나도 힘 있는 남자로 살겠노라!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화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2장에서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옷 바꿔 입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아내와 예수 그리스도의 여자로 살아야하는 성도들에게 네 자리 그 여자의 자리를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삼손의 시대가 시작되는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여자로 살아야할 성도들이 남자들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그 이름은 남자로 타락한 이스라엘 교회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마노아는 안식과 평안을 의미하는 데 그 안식은 남편이신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여자 됨으로 누리는 안식이 아니라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육적인 힘을 의지하는 남자로 타락한 자가 누리는 세상의 평안과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 힘으로 평안하게 살 수 있어!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으로부터 사십년간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 대적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께, 그 남편에게 부르짖지 않는 남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삼손 시대를 맞이하는 이스라엘 교회와 성도들을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하는 자’ 즉 생명 없는 자들로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에 온통 남자들뿐이라면 잉태와 출산은 불가능하고 생명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남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여자와 신부로 단장하는 곳인데 남자가 되겠다니 말이 됩니까?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재물과 물질과 영광을 자기 힘으로 삼고 그 힘을 의지하며 그 안에서 평안과 안식 즉 마노아가 되고자하는 것입니다. 이 마노아들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와 정성을 의지하며 그것으로 자기 의를 만들고 자기 평안을 만드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마음으로는 땅과 육신의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마노아는 제사와 제물에 집착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자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여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여자가 된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아내와 신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여자일까요? 본문에 남자의 이름은 마노아라고 나오지만 여자의 이름은 나오질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여자에게 나타나고 여자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나실인을 잉태하여 출산하고 여자를 통해서 일이 진행되는 데도 여자는 그 이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여자로 오셨습니까? 남자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생물학적으로 남자이고 영적으로도 성도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의 남편이시지만 여자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여자로 사는 모습으로 그 믿음을 보여주심으로 주님 앞에서 반드시 여자로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남자들로 타락한 성도들아! 내가 내 영광과 이름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으로 사는 것처럼 인생들아 남자의 이름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예수의 여자가 되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노아의 아내는 이름 없는 여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 이름 없는 여자가 나실인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증언합니다.
힘 있는 자와 강한 자로 살고 싶어 하는 타락한 남자의 이름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리고 이제 진짜 남자이신 예수만을 의지하며 예수의 이름, 그 남편의 이름으로 사는 여자가 되었다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잃은 그 여자가 무엇을 잉태하고 출산한 것입니다. 나실인으로 오신 예수를 잉태하고 구원을 해산함으로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나실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자리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자아부인의 자리입니다.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 여자이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나오는 자들이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름 없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이름과 그 존재를 부인당한 성도가 다시 자기가 나온 자리인 그 남자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시 사셔서 부활의 영광을 얻으시고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것처럼 성도는 자신의 육적자아와 그 이름을 부정당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과 하나 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멸시받고 부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 이름을 부정당하기 위해 교회로 호출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교회에서도 자기 이름을 인정받고 높이려고 그리고 남기려고 얼마나 난리들입니까?
목회자들도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있는 자리에 자기 이름을 올려놓기 위해 안달입니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낮고 천한 자리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오자마자 주보 들고 확인하는 게 자기 이름 아닙니까? 헌금명단에 내 이름이 잘 올라가 있는 지 말입니다. 어떤 장로는 교회 주보에 담임목사와 함께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소리 지르며 불평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 이름으로 살며 그 이름을 숭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여자도 신부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생활을 통하여 내 이름으로 살고자하는 그 남자의 이름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이름 없는 그리스도의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나온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구원입니다. 성도는 자기 이름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예수에 속하여 예수의 것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에게서 나온 여자이며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이름 없는 여자,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의 자리로, 낮은 자리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리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자리로, 초라한 자리로, 핍박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와 인정받는 자리에 서 있다고 우쭐댈 것 없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다고 슬퍼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자리로 내려갔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신랑만을 의지하는 신부의 믿음을 배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기 이름을 높이고 싶어 타락한 정욕과 탐심과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물질로 힘 있는 이름을 갖기 원하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철저하게 이름 없는 자로 살다 예수 이름 하나 갖고 하나님께 가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이름 없이 산 그 작은 자가 천국에서는 큰 자이기에 정말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증언하는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백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 고통의 자리에서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명성으로 스스로 강해진 자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정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이름을 부인하고 예수 안에 들어가 예수와 함께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마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성도들의 남편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19절부터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하늘영광 주님의 교회에서 날마다 자기 이름을 부인하여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구원을 해산하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아내로 단장되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