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에서 홍주의사총까지는 차로 10분이면 도착한다
홍주의사총은 조선말기(병오년) 홍성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 운동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모신곳이다.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 홍주 지역에서는 1906년(병오년)에 전 이조참판 민종식이 채광묵, 박인기, 이만식, 농민, 유생 구 관리를 중심으로 홍주성에 쳐들어갔는데 당시 홍성군수 이교석과 이주승도 처음에는 의병군에 호응할 기미였다가 일본군 다수가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을 닫고 입성을 막아 부득이 물러난 후 3월 22일에 재차 홍주성에 쳐들어갔으며 5월 19일에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일본군이 5월 25일부터 홍주성의 의병군을 공격하여 30일부터 본격전이 시작되었으며 그 때에 일본군 대포에 의해 조양문이 부서졌고 중과 부적으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대교리 일대의 냇가와 남산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이 때 민종식은 의병 몇몇과 함께 예산 대술 이남규 선생 댁으로 피신하였다가 잡히게 되고 그 영향으로 이들을 숨겨주었다 하여 수당 이남규도 일본군에 잡혀가다가 온양 외암리 앞 하천변에서 아들과 함께 일본군 칼에 난자당하여 죽게 된다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 박주철과 홍성경찰서장 박헌교가 직원들을 인솔하고 현재 의사총이 있는 부근에서 식수하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하여 옛 노인에게 설명을 듣고 병오 항일의병시 전사한 의병군의 유골이 임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어 충청남도에 그 사실을 보고하여 도비를 지원 받아 유골을 모아 이곳에 합장하여 분묘를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있게 하였다.
홍주지역의 의병은 홍주(현 홍성) 문화권내의 의병항쟁으로서 1895(고종 32)∼1896년과 1906년의 2차에 걸쳐 전개된 활동을 말한다. 제1차 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 행위에 반대해 1895년 4월부터의 모병단계를 거쳐 단발령공포 직후 봉기하였다.
선구적 의병 봉기는 척왜분위기를 전국적으로 고조시켜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제2차 의병은 1906년의 홍주성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 역시 수백 명이 산화해 의병전쟁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내어 그 뒤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2차례에 걸친 의병항쟁으로 희생된 의병의 유해가 홍주천변과 남산 부근에 방치된 것을 1949년 홍성군민이 정성으로 지금의 의사총에 거두어 안장하였다. 1959년 정인보기(鄭寅普記), 심상직서(沈相直書)의 비문이 그 내용을 잘 말해준다.
창의사에는 이 때 희생된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본전은 건평 14.7평이고 삼문이 설치되어 있다. 900의총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바꾸었다.
이 의병의 영향으로 홍성에 거주하던 김좌진이 북간도로 올랐고 그 김좌진을 사촌으로 둔 김영진 그리고 그 김영진을 양형제로 둔 조병채 할아버지가 김좌진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독립자금을 위해 청양 칠투사 등을 조직 독립운동에 같이 몸바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같이 나라를 위해 몸바쳤지만 어떤 이는 국가가 헌창하는 인물이 되고 어떤 이는 이름없이 잊혀져가는 인물이 된다
그런 인물이 묵보정 오준상이다 같이 소규모로 의병활동을 하던 묵보정 할아버지는 결국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일제의 총탄에 쓰러져 개죽음으로 치부되며 자취를 잃어버리는데 세상은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적다 못해 없다
서대문 형무소 기록 같은 것이 없다는게 그 이유이다
친일파의 나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이 이런 이들에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어서이겠다
후손이 끊겨 돌보는 이가 거의 없는 외증종조 할아버지 묘비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하지 않음이 군자라 하지만 이 세상은 너무나 불평등한 면이 많다
홍주의사총의 이름없이 죽어간 900여 의병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비록 그것을 원하지 않겠지만 후세는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창의사 뒤쪽엔 의사총 기념비가 새로 조성되어 있다
천안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