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게재한 글은 얼마전부터 우리 카페의 회원님들이 요청하였던 저의 외무고시 '합격기'의 제1편 입니다.
사실 회원님들로 부터 '합격기' 게재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쓸 이야기는 '1980년대' 이야기로서 너무 오래된 옛날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효용성에 대해서 스스로 믿음이 안섰습니다. 그런데 우리 카페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외무고시 공부'에 관한 회원님들의 질문이나 이에 대한 고시 '유경험자'들의 답변들이 대개는 여러가지 사정상 '단편적'일 수 밖에 없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식의 부분적인 내용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외무고시의 구체적인 과목공부 '내용'은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 제가 잘 모르더라도, 외무고시 합격을 위한 '공부 방법론'은 시대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즉, 일관되는 '기본'이 있다고 믿기에, 소위 외무고시 왕초보생들을 위한 공부지침서로서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희망하면서 글을 올립니다.
그런데 저의 원래 합격기는 제가 외시에 합격한 해에 모 월간 고시잡지에 이미 실렸습니다만, 여기에서는 공부내용보다는 공부방법론에 중점을 두어 다시 기억을 되살려 재구성할 할 예정입니다.
편의상 '1인칭'의 비존칭문으로 '합격기'를 쓰려 하니 미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제가 평소 퇴근후 시간을 쪼개서 우리 카페에 글을 올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글 쓰는 '시간의 제약'이 많고, 또한 제가 쓰고 싶은(즉,외시준비생들이 알아야 할 내용들의) '합격기'의 분량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시간나는대로 문장을 가다듬어 가면서 부정기적으로 계속 '합격기'를 연재할 예정이니 이 역시 미리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중간 중간에 글 내용을 수정할 수도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도 바뀔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저는 가능한 문장을 간결하고 짧게 쓰려고 합니다.
아울러 고시 공부에는 미리 정해진 왕도가 없기에 저의'합격기'는 회원님들의 공부에 단지 '참고'를 하시면 되지, 이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다른 합격자들은 또 자기 나름대로의 합격방법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두루 보시고 회원님 자기만의 외무고시 '공부방법'을 모색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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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래희망은 '외교관'
'외교관'!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뛰는 말이었다.
내가 '외교관'이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국민학교' 4-5학년 때로 기억난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장래 희망하는 직업을 조사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외교관'이란 직업을 설명듣고 그 즉시 나의 장래희망을 '외교관'이라고 적었던 것이 마치 빛바랜 옛날 흑백사진처럼 생각난다.
그 뒤부터 나의 장래 희망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는데 가끔씩은 주위 어른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외교관보다는 '판검사'가 더 좋다더라"하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씩 외교관의 꿈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다시 장래희망은 '외교관'이 되곤 하였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시사상식'을 많이 알아야 한다는 어떤 어른의 말을 듣고는, 중학교때 부터 일간 신문을 매일 하루도 걸르지 않고 제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샅샅히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주변의 시사관련 월간잡지 등을 헌책방 등에서 구하여 내용을 당시에 어린 나이에 잘 이해도 못하면서 무작정 탐독하던 생각도 난다. 이처럼 신문과 시사잡지를 계속 읽다 보니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내 또래 동기들에 비하여 정말로 시사상식이 풍부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당시 별명이 '박사'였음)
이러한 활자매체에 대한 '친근감'은 나중에 '외교관'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업무시간 이외에도 다양하고 광범위한 많은 정보를 접하고 그 정보의 취사접수를 일상화해야 하는 '외교관'으로서 '活字媒體' 읽기를 체질화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지금도 어디가서 기다리든지 하는 다소의 틈만 나면 국문이던 영문이던 활자로 된 간행물을 들고 읽는다. 심지어 집에서 밥 먹을 때도 '신문'이라도 읽으면서 식사를 하는 데 가족들이 싫어 하는 것 같다.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가 않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시사상식에 다소 밝아지다 보니 중,고등학교때부터 '국제(international)'라는 단어만 들으면 왠지 가슴이 뛰고 막연하자마 '자신'이 생겨났다. 이것도 시사상식을 쌓으려 노력한 결과로 얻은, 하나의 적지않은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외교관으로서 '국제'에 친금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나는 '외교관의 꿈'과 관련된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때 담임선생님의 댁에 급우들과 함께 놀러 갔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말을 잘하니 나중에 외교관하면 어울리겠다"라는 칭찬을 듣고 '외교관'이라는, 듣기만하여도 공연히 가슴 부프는 미래 직업에 대한 꿈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담임선생님의 성함은 '정현택'선생님이었는데 중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찾아 뵙지를 못했다. 현재 어디 계신지도 잘 모르지만 다시 볼 수있다면 "그때 선생님의 말씀대로 당신의 제자가 외교관이 되었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나는 학교공부를 '제법'하는 '모범학생'인 편이었다. 중학교 입학할 때는 전교 1,2 등을 다투는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고 고등학교때도 별도로 공부안하고 놀면서도 반에서 상위 5% 이내의 성적은 늘 유지하였다. 학과공부에 있어서 나의 가장 큰 결점은 집에서 별도로 학과공부하기를 싫어하느 것이었다. 비교적 기억력이 나쁘지않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따로 공부안해도 시험때 큰 지장없이 답안을 낼 수 있었기에, 시간이 나면 학과공부보다는 여러종류의 다른 책들을 읽고 사색하며 친구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스타일은 당시 우리나라의 대학입시방식이 요구하는 공부스타일과는 맞지않아(당시는 논술이 없었음) 나중에 대학들어 갈때 고생을 좀 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중학교입학시부터 고등학교 졸업시까지 6년간을 학교 도서부에서 부원으로 책을 관리하였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생활 6년간 누구보다도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고 그때 몸에 배인 '독서'습관은 지금까지도 언제 어디서나 독서를 '일상화'하는 생활로 연결되어 계속 유지하고 있다.)
2. '민족'의 발견
"한국민족의 역사는 民族鬪爭의 歷史다."
이 말은 고등학교 2학년때 학교 도서관 서가에 꽃혀있던 우리나라 어느 사상가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로, 그 책을 밤을 새워 읽었다. 그 책을 접한 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의 정신세계를 관통하여 삶의 의식을 온통 지배해 온 하나의 '話頭'였다.
그 사상가는 주장하기를,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전개처럼 근대 공산주의이론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계급주의 사관'에 의한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지는 것 보다는,'민족주의 사관'에 의한 '민족투쟁'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우리 민족은 사서에 기록된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 BC 1세기말 중국한나라에 의한 우리민족의 고대왕국 '고조선'의 멸망 및 소위 '한사군'의 설치였으며 그 뒤 AD 7세기 당나라에 의한 백제.고구려의 멸망, 10세기 거란에 의한 발해의 멸망, 13세기 몽골의 고려침략, 16세기 일본의 조선침략, 19세기 일본에 의한 조선 피합병 등, 인류 역사전개의 보편성에 비추어 한 시대에서 다른 발전단계로 이행해 갈 수 있는 시기마다 거의 예외없이 '외세의 침략'에 의하여 민족사회의 '내재적인 발전'이 좌절되고 민족구성원 대부분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적인 고통을 받아야 했다.(*참고사항 : 이러한 위의 주장을 증명할 수있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이 글을 쓰는 목적과 멀고 또한 글 쓸 지면의 부족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러한 '민족 문제'를 접하면서 나는 당시에 이러한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치무대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하여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학교나 학과 선택시 이 문제를 연결해 보았다. 그런데 현대에서 '전쟁'을 하는 '군인'은 첨단무기의 발달로 이제는 그저 국경을 지키는 단순한 평화의 파수군' 역할에 그친다고 보아 일단 마음속에서 궁인이 되기 위한 '사관학교 진학'은 포기하였다.
그 대신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외교관'의 꿈을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았다. 참 가슴뛰는 꿈이었다. 현실적으로 외교관이 되는 방법은 '외무고시'를 합격해야 한다는데 외시 합격을 하려면 '법학과'나 '정치외교학과'를 진학해야 한다고 들었다.
3. 대학 입학과 학과의 선택
"민족(투쟁)!" 이 우주의 '불랙 홀'같은 화두에 이끌려 나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의 거의 전부를 바쳤고 지금도 이 화두가 지향하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 '외교관'이란 직업을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화두로 인하여 대학 입학 원서를 쓸 당시 나는 내 마음속에 정작 '제1 지망'으로는 역사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하여 '사학과'를 가고자 하였고 '제2 지망'으로 국제정치분야에 관심이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정치외교학과'를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부모님은 이러한 학과보다는 세상의 평판을 따라 '법학과' 진학를 원하셨다. 나는 비교적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던 편이여서 당시 강하게 자기 주장을 펴지 못하고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결국 법학과를 택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3 지망인 '법학과' 역시 '외교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외무고시'를 준비할 수 있는 학과이고 더구나 외시합격 역시 정외과 출신 학생들 보다 유리할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법학과'를 선택하여 마침내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1,2자망으로 원하지 않았던 '법학과'로의 진학이라는 결정은 뒤에 나의 대학생활을 전공인 법학과의 학과공부보다는 '역사연구' 동아리활동으로 몰아 넣었고 대학 생활 내내 학과선택에 대한 후회를 하면서 지내게 만들었다. 비록 대학 졸업시까지 '우수한' 전공학점관리로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졸업하였지만 내겐 전공공부가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다만, 뒤에 가서 본격적인 외무고시 준비와 관련해서는 법학전공 과목중 외시과목인 '국제법','민법총칙'이 있어 공부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내 대학시절 취득 학점의 구성을 보면 내가 당초 처음부터 '깊은' 관심을 가졌던 역사학 과목과 정치학과목의 비중이 컸으며 관심이 있었기에 공부도 열심히 하여 성적도 괜찮았고 역사학과 정치학과 수업의 정식수강은 역시 나중에 외시공부에 매우 큰 도움들이 되었다.
대학 입학직후 나는 전공인 법학책을 채 펼쳐 보기도 전에 역사연구 동아리에 가입을 하였는데, 그 뒤 2학년 마치고 군대에 가기 까지 약 2년간의 대학세월을 전공은 다만 '학점관리'만 하는 차원에서 아예 '법학'에는 관심을 끊고 '한국의 역사와 사상사' 연구 동아리 활동에 완전히 빠져 "미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 2년간의 이러한 대학 동아리 연구활동을 통하여 나는 형제같은 '친구와 선.후배'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철학' 등 뒤에 인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중 무엇보다도 의미가 컷던 것은 먼저 나의 '역사관'이나 '세계관' 그리고 이를 통한 '국제정치관'을 소박하게나마 확고히 정립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때 접하였던 '민족투쟁사관'의 씨앗이 마침내 뿌리를 크게 내려 나의 내면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내 생각속에서 '민족'의 이념은 거의 나의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일제침략시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도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동아리 활동시절 나는 단재가 직접 쓴 역사연구논문이나 문학작품, 정치평론 및 단재에 관한 연구서,논문을 거의 모두 읽어 보았고 심지어 그의 글이 실려있는 책, 논문과, 단재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한 책의 대부분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육군보병 일반사병)를 갈 무렵, 나는 '군대'라는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통제된 생활속에서 과연 나의 이러한 '세계관'과 '역사관'이 잘 지켜질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심각한' 고민은 당시 국내정치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수많은 친구, 선후배들이 소위 '독재정권 반대활동'에 나서 거리에서 '피' 흘리며 '기관원'들에게 끌려 갈때 과연 나는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 가 하는 문제였다. 특히 이 문제는 당시에 여러 날을 밤에 잠 못 이룰 많큼 고뇌하였던 '당면할 수 밖에 없었던 눈 앞의 현실'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당시 나는 오랜 나름대로의 고민끝에 다음과 같이 잠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일단 군대를 2년 반 다녀 와서도 나의 '세계관'이나 '역사관'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민족문제'을 국제정치무대에서 직접 해결하는 직업인 '외교관', 그것도 실력있고 애국적인 '훌륭한' 외교관이 되어 새로운 '민족의 역사'를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이것이 '외교관의 꿈'을 본격적으로 갖게 된 첫번째 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