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의 희열
회사가 확장되면서 대용량체제가 주를 이루었지만 전력설비의 주설비만 생산하였다. 그때까지 생산하던 주상변압기와 소형모터, 소형펌프 등 단순기계는
수요가가 설치하여 시운전했지만 대형화되면서 주 설비 전후로 이런 저런 보호설비와 이를 조작하는 제어판 설비가 추가되었다.
보통 신설공장은 한전으로부터 초 고압이나 특 고압을 수전하여 이를 고압단계를 거쳐 실 사용전압으로
낮추어 각공장에서 사용하였다.
전력계통에는 한전이나 어느 공장에서 발생한 불의의 사고가 전체 노선(Loop)이나 이웃공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전력설비 전후로 보호 차단기를 설치하고 이들을 현장과 원격에서
조작하는 수배전반, 전동제어반등의 제어반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 설비들은 대개 중소기업에서 공급하여 이 설비들과 연동하여 시운전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가끔 말썽을 일으켜 시운전기간이 며칠씩 차질이 생기고
때로는 주력기기에 충격을 주어 주설비의 손상이 우려되는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대형화 초기에는 내충격전압시험을
하지 않았으나 이런 일들로 인해 급기야는 수주 사양서에 내충격전압시험을 추가하게 되어 안전성을 우선 고려하게 되었다.
회사는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 주설비만 수주하던 것을 전후 보호설비와 제어반까지 전력설비 일괄수주를
받아 직접 제작하기로 했다. 제품가격에 비해 손이 많이 가는 수배전반,
제어반들은 처음은 계열기업에서 제작했으나 제품마다 부품들이 달라 외관도 그렇고 A/S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간단한 시그널 전구나 조작스위치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달랐다. 이들은 이를 주로 청계천시장에서 필요할 때마다 구매하여 사용하였으나 회사의 품질관리 기준으로는 용인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회사기준을 설정해서 수입하여 사용하다 보니 수주가를 초과하는 원가가 태반이지만 전체설비 수주를 위해서는 방안이 없었다. 이분야는 몇년 후에 금성산전이라는 전문회사가 생겼다.
한 맥주회사의 전체설비를 수주하였을 때이다. 공장에서
제작한 전설비를 설치하고 며칠간 단위기기에 대한 시운전을 하였다. 하지만 맥주를 제조하는 설비는 설비를
공급한 외국인 기사들과 맥주회사가 시운전해야 하므로 공장이 가동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귀사 했다. 한
보름이 지난 후 공장 준공식과 함께 시험 생산한 맥주로 맥주파티를 한다고 입회를 요구했다.
맥주를 마시면서 내손으로 설계한 제품이 현장에서 제 몫을 다하는 걸 보면서 처음으로 엔지니어로서
자부심을 느꼈지만 맥주를 생산하기 위한 공정중의 계장제어 시스템에 더 구미가 당겼다. 아직도 4대강유역 개발설계를 하면서 맛 보았던 계장제어의 매력이 잊혀 지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저런 생산설비를 수입하지 않고 우리 손으로 할 수 있을까 부럽기만 했다.
당시는 박대통령의 산업화에 이어 농지개량이 한참이었다. 민둥산에서
그냥 흘러가던 물을 저수지에 채우고 천수답으로 짓던 벼농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사업이었다.
임진강 유역의 농진청에서 발주된 농업용수 공급시설을 시운전하려고 경기도 전곡까지 간 적이 있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인천에서 당일 왕복이 되지만 그때는 버스를 몇 번이나 바꾸어서 비포장도로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 선채 전곡의 약속한 여관에 도착해서 전화를 하니 모든 시설이 미 수복지구 안에 있어 출입신청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아직 토목공사(수로)도
끝나지 않았다고 해서 출입신청을 하고 회사로 되돌아와 옷가지를 갖추어 중기출장준비를 해서 오겠다고 합의하고 돌아서는데 농민들이 길을 막았다.
기술자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벌로 와서 그 다음날
오겠다고 했다. 농진청과 함께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지금이
5월말인데 지금 모를 심지 않으면 금년 농사를 망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전곡 읍내 여관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밤이
되니까 요란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이 기지촌이라 미군들이 들이 닥친 것이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시끄러워 잠이 오질 않아 밤새 뜬눈으로 새우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조금 조용해져 첫 버스로
몰래 귀사 했다가 준비해서 올 생각으로 여관촌을 빠져나왔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기사양반, 어디를 가려고요. 우리는
생계가 달려 있다고 하면서 아예 이장 댁에 방을 주면서 쉬라고 했다.’
그 이튿날 농진청 기사와 현장에서
이것 저것 체크하다 한탄강의 아름다움에 폭 빠져 버렸다. 보통 강들은 둑을 쌓아 가운데 물이 흐르는데
한탄강은 평지에 푹 꺼져 있었을 뿐 아니라 강 양안을 둘러싼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물이 흐르지
않은 주변은 마치 용암이 휘몰아 친 것 같았다. 그때까지 주상절리를 본적이 없어 더욱 신기하게 보였다. 덕분에 오후 내내 안내를 받으며 그 일대의 기암괴석을 둘러보았다. 아직
5월이라 초목이 바위를 가리지 않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후
찾아갔을 때는 수목에 가려 주상절리가 제모습을 들어내지 못했다.
4일째 되던 날, 시운전을 해서 물을 퍼 올리고 농수로에 물이 흘렀다. 농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농사를 제대로 짓게 되었다며 풍악도 울리고 막걸리잔을 돌리면서 흥겨워했다. 이로서 내 임무는 끝이 났다. 하지만 농민들은 3일동안 기사양반을 잡아 두어야 안전하다면서 놓아주지를 않았다. 혹시
사고가 생기면 금년 농사를 망친다는 것이다. 이장집에서 큰손님 대우를 받았지만 무료한 3일동안 수로에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엔지니어로서 밥값을 했다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안동 임하지역의 농업용수때도 그랬다. 전곡에서 한번
당해보아서 며칠을 대비해서 갔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어서 바로 시운전을 했다. 당시는 임하 땜이 건설되기 전이라 강물을 퍼 올려 천수답을 개량하는 사업이었다. 시운전이 되고 농수로에 물이 흐르는 걸 보고 모두들 늦은 점심을 먹는데 농수로가 터졌다고 농민들이 야단이었다. 당시는 농수로도 흙으로 축조했기 때문에 급하게 만든 농수로가 터진 것이다. 농수로
복구에는 적어도 4-5일 걸린다고 했다. 꼼짝없이 포로 신세가
되었다. 농수로 복구는 시공사의 몫이지만 농민들이 더 열심이었다. 그들의 한해 농사가 좌우되기때문이었다.
6월초의
뙤약볕은 현장에서 한시간도 견디기 힘들어 양수장으로 들어와 기다리는데 양쪽에서 농민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그래 농민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데 그들을 위해 며칠을 희생하자’고
생각하고 이장에게 ‘달아나지 않을 터이니 좀 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고작 쉼터라는 게 양수장과 이장 댁이었지 만 그들은 계속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농수로는
흙을 다시 쌓고 그 위에 가마니를 덮었다. 지금 같으면 비닐이 편하겠지만 당시로는 쌀 가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양수를 시작한지 3일만에야 ‘기사 양반, 이젠 가셔도 된다’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좀 와 달라’며 고추를 한 푸대를 주셨다. 훈훈한 시골 인심이 가슴에 와 닿으면서 세상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하며 엔지니어로서 뿌듯함을
다시 새기며 그들의 순박한 마음을 가슴 속에 새겼다.
때로는 시운전이 우리측 사고로도 지연되었다. 한전은
전후 보호설비를 직접 발주하므로 주기기만 공급하면 되는데 경주 고분군과 인접한 지역(황남동?)에 공급한 변압기가 운송 중에 일부 애자가 파손되었다는 것이다. 영천주변에서
대구-포항간 철도 밑 터널을 지나다 운송 트레일러의 바퀴의 에어를 빼서 높이를 낮추었는데도 돌맹이 하나를
타고 넘으면서 터널 천정에 닿아 깨졌다는 것이다. 숙련공을 데리고 현장엘 가보니 천막으로 덮어놓은 게
흉물 같았다.
당시는 전력이 부족해서 서민들의 집에는 방2칸의 가운데
벽을 뚫어 전등을 달아 놓고 양쪽방이 한등을 사용하던 때라 온 경주시민들의 불을 밝게 켜려는 기대에 먹칠을 한 것이다.
공장으로 반입을 해도 또 그 터널 밑을 지나야 하므로 현지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겉으로
보이는 기계적 작업은 단순한데 깨어진 애자사이로 수분이 들어갔다면 보통일이 아니었다. 기체에서 절연유를
채취한 결과는 상당히 비극적이었다. 주민들은 변전소를 에워싸고 얼마나 걸리느냐? 언제 불을 켤 수 있느냐? 를 물으며 웅성웅성 되었다. 결국 현지에서 절연유 필터기를 가동하기로 했지만 인천에서 갖고 와야만 했다.
당시는 고군분은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민가도 있었고 주막도 있었다. 변전소에서 경주시내까지는
마땅한 교통편도 없고 또 주민들이 언제 불을 켤 수 있는지 웅성거려 현장직원과 함께 주막집에서 숙식을 하며 열흘 남짓해서 되살리기도 했다.
엔지니어의 기쁨은 이런 것 들이었다. 명예도 권리도
이재도 없지만 자신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제품들이 불특정 다수가 원하고 있는 것을 해결해 주는 성취감에서 일의 보람과 희열을 찾는 그런 것들이라고들 느끼며 평생을 쟁이로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