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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복 있는 사람(2)/요나4:6-11, 마5:6-8
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유리바다 해변의 황금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 올 때 누군가 불렀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청년이 웃으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날 모르시겠지만 내가 8살 때 당신은 주일학교에서 날 가르치셨죠. 매주일 공부가 시작되기 전에 기도를 하셨는데 어느 날 그 기도 시간에 전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새 생명이 되었습니다. 감사해요. 내게 주님을 전해주신 걸..."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그 때 기억나세요? 어느 선교사님이 오셔서 보여 주신 사진에 당신은 눈물을 흘렸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신은 헌금해 주셨죠. 주님께서 그 눈물의 기도를 받으셨고 그로 인해 제가 지금 천국에 있는 것이랍니다." 그렇게 한 명씩 찾아오는 사람들이 멀리까지 줄지어 있었습니다. 주께서 그의 앞에서 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아들아 주위를 둘러보렴 네 상급이 이렇게 크구나..." 하늘에는 눈물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수많은 각각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든 그의 행한 일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행한 작은 희생들이 이 땅에서는 숨겨졌으나 하늘에서는 크게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받는 하늘의 상급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상급이요, 복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주님의 산산 수훈 중 팔복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애통하는 자의 복, -온유한 자의 복에 대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고,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네 번째 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입니다.
“의”란 성경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의”라는 개념에는 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재판관이 가져야 할 덕목은 공정한 자세인데, 어디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즉 “의”는 재판관의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의미로서 “의”의 개념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그러한 속성으로서의 “공의”를 말합니다. 셋째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십자가의 보혈의 사랑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우리가 법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해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는 죄인 괴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아무도 정죄 할 수가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서 먼저 의로움을 갈망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먹고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도덕군자도 몇 칠을 굶으면 도둑질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굶주림 앞에는 도덕과 윤리가 상실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갈망 하듯이, 목마른 자가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돈보다, 명예보다, 권세나 건강이나 출세보다 우선하는 것이 이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그래서 롬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밥을 한 번 먹었다고 평생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물을 마셨다고 평생 갈증을 안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매 끼니 때마다 밥을 먹어야 하고, 수시로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이처럼 한 번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더 이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힘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임을 인식하고, 또 공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살기를 힘쓰는 자가 복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생활 잘 하다가 시험에 들게 되고 믿음이 파선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의의 기준을 사람에게 둘 때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자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기보다 자기 의를 드러내어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의의 기준을 하나님께 둘 때 나의 의는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런 의 가지고는 명함도 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 괴수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히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가 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회개 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얻는 의입니다. 이의를 가진 자는 누구나 당당히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높이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물욕으로, 명예욕으로, 권세욕 등으로 성도들을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이긴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기를 힘쓰는 모습이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쳐 줍니다. 딤후 3장 15절 이하에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늘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실수를 보시고 너는 내 앞에서 온전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 온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이 말씀에 따라 살기를 힘씁니다. 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구약 본문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갔다가 죽음의 위기를 자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불순종의 길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2.다섯 번째의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 말합니다.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아서 낫이 필요하니 급히 좀 빌려주구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하나 지켜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선뜻 낫을 빌려 줍니다. 이것을 본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며칠 전에 제가 낫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저 집에서는 빌려주지 않았는데 왜 아버지는 빌려주세요?” 그 때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수하는 거란다.”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때, 낫을 빌려 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낫을 빌려 줍니다” 말하고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다. 그러나 거절당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과거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 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어야 이것이 긍휼이란다.” 긍휼이라는 말은 복수도 아니고 증오도 아닌 사랑과 용서와 관용의 마음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라함’이란 단어인데 약 150회 정도 나옵니다. ‘라함’의 뜻은 ‘자궁’입니다. 긍휼은 ‘같은 뱃속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긍휼이란 의미는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사랑과 애정을 가리킵니다. 시편 103:13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긍휼이란 단어가 약 26회 나오는데요, 헬라어로는 ‘엘레오스(eleos)’입니다. 그 의미는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돕는 미덕”입니다. 신약에서 긍휼은 고통가운데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도와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약 본문에 긍휼히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앗수르가 죄악으로 멸망당할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요나 선지자를 보내어 죄를 회개하고 멸망을 면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고통을 준 앗수르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기를 바라는 긍휼이 없는 마음을 가진 요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요나의 가는 길을 막으시고 결국 앗수르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개를 촉구하여 멸망에서 건져내는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마음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 차 햇빛을 가리는 박 넝쿨이 시드는 것을 보고 불평하자 하나님은 욘4:10-11에서 요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한없으신 자비와 긍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주님은 긍휼을 원하십니다. 본문 마5:7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했습니다. 긍휼이 없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긍휼이 점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서로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 주님의 한없는 긍휼이 임하게 되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입장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남의 죄와 허물을 들춰내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 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돼서 그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유명한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Laguardia)라고 합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온 노인이 기소되었습니다. 노인은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 먹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을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넣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섰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3.여섯 번째의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입니다.
팔복 중 여섯 번째 복이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입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이는 모든 복 중에 가장 포괄적인 복입니다. 구름이 있으면 하늘이 안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죄와 욕심이 가득하면 하나님도 안 보이고 주님도 안 보입니다. 깨끗하고 성결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도, 이웃도, 자신도 보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종교의 외형에만 관심을 가졌고, 율법의 더 중요한 것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잊었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따라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중히 여기면서 정작 중요한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 곧 음란, 살인, 도둑질, 간음, 탐욕, 악독, 시기, 방탕, 질투, 배신, 교만 같은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마음은 언제나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의 특징은 먼저 위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보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겉과 속이 다른 회 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 마음을 가지게 되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의 마음, 거짓의 마음을 버리고 정직한 마음, 진실한 마음,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의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또한 청결한 마음은 마음이 부패하지 않고 성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 어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를 막론하고, 거기에 있는 모든 문제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렘 17:9-10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고 부패합니까? 타락의 결과 죄의 결과로 생겨진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등 교육을 받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성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더 큰 죄를 범하는 자가 됩니다. 부패한 마음에 대해 롬 1:28-3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자랑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부패한 과일이나 음식을 먹으면 병이 나는 것처럼 마음이 성하지 못하고 부패한 사람은 온통 가정과 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역한 냄새를 피우고,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성한 것은 힘을 주고, 건강을 주고, 병을 치료하여 낳게 하며, 기쁨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청결한 마음은 성결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결함을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성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보혈의 은총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계21:27에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했고, 계22:14-15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누가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완전하고 순결하고 흠도 티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결케 된 사람, 흠이 없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 보혈을 통해 이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일편단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열망하며, 삶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청결한 마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네 번째 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입니다. 먼저 의로움을 갈망해야 함을 가르치고, 다음에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살기를 힘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의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섯 번째의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의 특징은 먼저 위선이 없다는 것이요, 또한 청결한 마음은 마음이 부패하지 않고 성하다는 것이요, 그리고 청결한 마음은 성결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2015. 7. 26. 성산 교회. http://cafe.daum.net/sungsans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