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본 <돌풍>이라는 드라마에서 “나는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부패한 정치판을 견디지 못하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라는 백 명의 정치인 모두 국민을 위한다는 위선으로 백이면 백 모든 정치인의 밑바닥을 가감 없이 드러낸 대사는 사실 우리의 일상도 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좌우, 흑백. 옳고 그름으로, 자신의 신념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신념과 유사한 사람들과 ‘우리’를 형성하고, ‘신념으로 뭉친’ 우리는 확산하고 대물림하는 현상은 어쩌면 신념으로 똘똘 뭉친 물질이 육신이 아닐까? 생각이란 것을 빼버린 식물의 씨앗 번식이 그런 것처럼.
청년 시절까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일상의 비루함, 허무함으로 간주했는데 문득 우리 생이란 ‘굴리는 바위’란 ‘애써서’ 올려놓으면 또 내려가는 반복되는 ‘형벌’은 어차피 치러질 것이라면 ‘형벌로 치루냐?’ 아니면 ‘반복의 중요성’으로 여겨 ‘생각과 감정’을 새로이 할 것인가?‘는 자신의 몫이려니. 형벌은 ’생애가 다 그렇지‘라는 체념 또는 저항심을 주거나, 반복을 통한 새로운 습관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무수한 정점의 자각으로 ’무심‘하다면 “고통과 행복으로 분할하여 얻은 감정과 행위가 나에게 어떤 애너지로 나타나는지? 우리는 애초에 재단한 것에 스스로 갇혀 ”기쁨과 행복을 찾는다?“라는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오히려 바깥을 향해 부르짖는 형상은 아닐까? 애초에 질병이 없다 있다? 행복과 고통이 있다 없다? 애초에 성립되지 명제가 아닐까? 기후위기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스스로 채운 족쇄의 덩어리가 기후로 드러나는데 여전히 기후 ’탓‘을 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폭염이 머무는 오늘, 재해는 항상 병약자와 노소년, 권력 영역에서 떨어진 이들이 먼저 침탈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법칙‘이라면 자연은 어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아니면 선한 상태로 또는 악한 상태로 다가오지만 그것을 선과 악으로 재단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던지. 따라서 기후 ’위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로 답해야 하지 않을까?
갑자생인 내가 육십갑자를 돌면서 기후 적응이라는 언덕을 넘는 한여름 앓이는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또, 60년대생 이상이 인구 천만 시대인데 그렇다면 나의 노년은 ....많은 화두를 던진 한여름을 보내면서 내 몸을 돌보느라
다른 것을 돌보지 못하고 깨어나니 벌써 추석 연휴. 자기 몸이 건강해야 다른 이들을 돌볼 여력이 생긴다는 것을 또 절감했다.
정작 나를 돌보지 못하면 ’원망‘이나 ’불행‘에 강도는 더욱 높아질 뿐이라는 것도 ....
귀농 이후 전화서두는 언제나 “바쁘죠?”라는 말을 항상 들었다. 농사를 기본으로 멀티였던 나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선생님은 아파야 쉴 수 있다는 게 슬퍼요”라는 수연의 말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한창 기운날 때,...여유로와야 하는 것을...”
나야말로 미래 에너지를 다 끌어다 써서 나의 관짝을 들고다니는 ‘급격한’ 기후변화의 주범이 다르지 않다.
‘애쓰지 말자’.
지구 인류가 겪는 것을 개체인 나도 함께 겪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어리석음 또한 또 같다.
기후변화는 곧 나의 에너지 상태와 같은 행로를 가고 있으며, 나의 에너지 쓰임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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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건
명절이 되면 엄마가 새 옷을 사주셨다.
명절 전날 동네 목욕탕은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다.
명절 아침 때때옷을 입고 제사를 지내고
명절 때 받은 동전으로 동네에 나가 놀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명절이 되면 엄마가 차례상을 준비에 나도 덩달아 심부름하느라 바빴다.
명절 전날 혼자 사는 고모가 오시면 기뻐서 함께 이바구 하고
다음날 몇가지 음식을 싸 가는 고모를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했다.
내가 독립하면 고모를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내가 기억하는 건
명절이 되면 선물 꾸러미 하나 들고 집에 가서 엄마의 일손을 도왔다.
명절 차례상이 차리는 내내 엄마는 하소연과 원망 소리를 듣다가 피해 집을 얼른 나왔다.
내가 사는 곳에 돌아와 술 한잔 꼴깍꼴깍 마시고 스러져 자는 것이 편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명절이 되면 내가 한가득 싣고 차례상 준비하고 형제들을 맞이하고
엄마 간병을 했다.
명절날 차례상을 차리고 엄마를 간병을 하면서 둘러앉아 밥을 먹고 치우고
형제들은 나와 아버지를 남기고 떠나고 뒷자리 간병과 아버지 바라지를 했다.
형제들이 자손을 번창시켜 북적이는 하루지만
자주 통화하고 만나고 명절이라고 새로울 것이 없는데
이번 추석부터 차례상에 엄마 밥상도 올리니 차례상 준비해서 올라가 차례를 지내고,
형제들 떠난 자리 아버지와 지내다 돌아올게다.
만약 아버지도 떠나면 명절 연휴에 홀연히 여행이나 은은가를 지키고
있을까나.
엄마가 ”아이고 나는 언제 명절 차례상 준비에서 자유로울까?"
명절날 모인 자식들 떠나보내고 쓸쓸이 지내던 엄마.
차례상으로 자유로울 때가 되었을 때, 환자가 되어 침대에서 생을 마쳤다.
고된 여름을 보낸 뒤
내가 기꺼이 짊어진 많은 것들의 무게가 참으로 버거웠다는 것을 몸이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언젠가부터 고모는 명절에 오시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 외롭지만 혼자 그냥 집에 있는 것이 좋다고.
그리고 몇 년 뒤, 화장터에서 고모를 만났다.
내년부터 명절에서 자유롭기
첫댓글 동갑이네요.. 공감합니다...
옛날에는 참으로 정감이 가는 추석이였는데... 물질의 풍요속애서 감정의 빈곤이 오네요..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니.. 행복한 추석보내세요..
어릴적 명절부터 지금까지
명절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시대의 변화와 가족의 변천사를 담으신 편지를 자신에게 적으셨네요.
마음 한쪽이 슬며시 아려옵니다.
^^
같은 기억이 있는 글에 공감합니다
코로나 덕분(?)에 많이 변했죠. 내년 추석은 맏며느리인 아내에게 늦었지만 35년만에 추석휴가를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