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뜰에서 다시 안성으로 나오다가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의 묘역을 찾았다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는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1986년 5월 22일 안성시의 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도로 옆으로 넓은 주차장이 있는 재실 경모재를 먼저 만난다
이 묘는 금광저수지에서 사흥리로 들어가는 도로 좌측 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제4대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모친이자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 1375 ~ 1418)의 배위(配位)인 순흥안씨(順興 安氏, ? ~ 1444)의 묘이다.
심온의 본관은 청송. 자는 중옥. 아버지는 청성백 덕부이고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그의 딸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 의랑·대호군이 되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 겸 판통례문사가 되었고, 이후 좌부대언·좌군동지총제 등을 역임했다.
1408년 딸이 충녕군(나중에 세종)의 비가 되었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414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호조판서·판한성부윤·좌군도총제·이조판서를 역임했다. 태종의 선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세종과의 인연은 그에게 결코 영광과 가문의 흥함을 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수많은 전장터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죽였고 아버지 태조를 왕좌에 추대하기 위해 고려의 왕씨 족손을 역시 무차별 살상해야 했다
그 뿐인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죽여야했고 심지어 1차,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개국공신 정도전, 새어머니 강씨와 배다른 동생들, 그리고 심지어 같은 핏줄인 자신의 형들마저도 그의 칼 앞에 저승의 문턱을 넘게 하여야 했다
그런 태종 이방원에게 역시 자신을 그 자리에까지 오르게 내조해준 부인 여흥 민씨의 혈육인 처남들까지도 결국 손에 피를 묻히며 숙청해야 하는, 왕좌를 지키기 위해 냉혈한 삶을 쉴 새 없이 해결해야만 자기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수 있음을 거듭 경험하게 한다
그런 그에게 아들 세종의 처가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 역시도 왕권 강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족속이었다
결국 심온에게도 그 화가 미친다
심온이 141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는데, 이때 병조참판 강상인과 그의 동생인 도총제 심정(沈泟)이 금위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상왕인 태종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은 분노하여 이들과 함께 병조판서 박습(朴習) 등을 참수하게 했다.
심온은 당시 명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주모자로 지목되어 귀국하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된 후 사사되었다.
뒤에 이 사건은 심온이 국구로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1424년 성산부원군 이직 등이 청하여 관작이 복귀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심온의 부인 순흥안씨의 삶도 역시 남편따라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심온을 제거한 태종의 신하들은 왕비 소헌왕후 심씨도 폐위시키기 위해 공세를 폈지만 태종은 왠지 그것만은 허락치 않았다 이미 소헌왕후를 통해 자신의 손자들이 상당히 자라났기 때문이리라
소헌왕후의 어머니 순흥 안씨도 관노로 목숨만 부지하며 자신의 딸과도 만나지 못하다가 나중에 태종이 죽고 세종의 위치가 견고해지자 비로소 풀려나게 된다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은 즉위 후 외할아버지 심온을 신원함으로써 평생을 한과 눈물 속에서 살았던 어머니 심씨와 외할머니 안씨의 영혼을 그나마 위로하게 된다
약 60평의 묘역에는 호석을 두른 봉분(封墳)이 설치되어 있고, 묘 앞 중앙에는 글씨가 마멸된 원래의 대리석 묘비와 1910년 새로 건립한 묘비가 있다. 그 앞에는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 등이 좌우에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묘비와 상석 주위는 경사지게 장대석으로 사다리형 계단을 조성하여 아늑하고 품위 있는 제단(祭檀)이 되게 했다. 장명등은 방형(方形) 기단부(基壇部) 위에 방형의 화창(火窓)을 가진 화사면(火舍面)이 급경사를 이룬 옥개(屋蓋)를 얹었다.
순흥안씨가 1444년(세종 26년) 11월 24일에 죽자 세종은 안씨의 무덤을 남편 심온 묘가 있는 용인시 수지면 이의리(지금은 수원 광교박물관 옆 묘역, 2022년 가을에 탐방한 곳)에 예장(禮葬)하도록 하였다. 이후 1467년(세조13) 5월 3일 왕명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강상인의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박은(朴訔)은 대질심문 없이 심온을 모반죄로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박은의 발언과 결부되어, 『기재잡기寄齋雜記』 등 야사(野史)에는 심온이 세상을 떠나기 전 후손에게 반남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吾子孫 世世 勿與朴氏相婚也] 유언했다고 전하고 있다. 9세손 심단(沈檀, 1645∼1730)이 쓴 「안효공온신도비명(安孝公溫神道碑銘)」에 이러한 유언을 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바로 밑에는 이 9세손 심단이 자신의 조부인 심서의 묘를 이장하여 조성해 놓았다
심서는 통례(通禮) 심달원(沈達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심전(沈全)이고, 아버지는 심우준(沈友俊)이다. 어머니는 현령 박세형(朴世炯)의 딸이다.
조선 선조~인조 때 도승지,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한 학계 심액의 동생이므로 우리 동복오씨 오단 선조의 처삼촌이 되는 셈이다
아울러 남인의 종장격 노릇을 했던 송곡 이서우의 처조부이자 고산 윤선도의 사위인 심광면의 부친이다 그 아들 추우당 심단이 윤선도의 외손이므로 그 아들인 심득경에겐 증조부가 되며 그런 인연으로 윤선도 손인 윤두서가 심득경의 인물상을 남기게 된다
학계 심액의 아들 심광사의 사위가 윤이석으로 윤이석 아들이 윤두서니 윤두서는 심액의 외증손이자 심광사의 외손이다
심서는 남평 정산 현감 등을 역임한 평시서령 종5품 관직을 지냈다
묘역에서 내려오는 길 금광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 옆에는 청학대 미술관이 있어 묘역을 탐방하고 남은 감회를 더욱 아름답게 심미적으로 승화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