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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4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1
설교 제목: 말세에 대한 성경의 예언
요한계시록 20:4
설교를 위한 묵상:
판데믹과 같은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의 개발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룰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지구적 위기 앞에서 공동체를 돌보고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교회가 선도적으로 나설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릇된 종말론이 원인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나는 지나간 과거에 교회가 종말론에 대하여 어떤 오해를 했으며 그 오해는 어떻게 바로잡혀야 하는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의 주장은 조직신학적으로 모든 내용이 연결되어 있는 거미줄의 일부분과 같다. 하나의 줄이 흔들리면 모든 줄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설교를 통하여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을 할 수 있기를 나는 기대한다.
설교의 순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먼저 나는 지난 1992년의 휴거파동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예상되는 지구적 재난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그 후에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왜 그릇된 성경해석인지를 밝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바른 개념을 설명하고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정리할 것이다.
설교 개요:
1. 1992년 휴거파동
2. 지구적 재난 앞에서
3. 세대주의자들의 오해와 왜곡
4. 성경이 말하는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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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2년 휴거 파동
지금부터 32년 전 1992년 우리나라에서 휴거파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들은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하늘로 올라갈 것을 기대하면서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그날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믿고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자신의 옷가지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다룬 뉴스나 영상이 인터넷에 생생하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이 휴거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은 이장림 목사였는데 그는 책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전파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였습니다. 이장림 목사는 교회 이름도 다미선교회라고 정하고 사람들에게 휴거에 대한 거짓 예언을 퍼뜨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약 10만명의 사람들이 이 거짓 예언에 속아 휴거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 예언은 거짓으로 판명나고 휴거파동에 합류한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휴거될 것이라는 예언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날짜만 틀렸습니까?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는 정말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합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2. 지구적 재난 앞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이라는 생각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종말의 때에 대한 사건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건은 대부분 천년기가 끝나가는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서기 999년 유럽에서는 예배당마다 종말을 기다리던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그때 노예를 부리던 주인들은 집에서 부리는 노예를 풀어주었고 거액의 돈을 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999년 12월 31일 자정이 지나도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노예 주인들은 풀어준 노예를 잡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1992년의 휴거파동도 2000년을 앞두고 일어난 소동이었습니다. 휴거파동을 일으킨 이장림 목사는 2000년이 되기 전 1999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로부터 7년 전에 신실한 신자들은 공중에서 혼인잔치를 벌이고 땅에서는 7년 동안의 대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후 1999년에 예수님이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인데 적지 않은 기독교신자들이 아직도 이런 거짓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3000년도가 되려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다시 휴거파동 같은 일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어떤 사람들이 주장한다면 저는 그런 주장에 반대합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지구적 재난이 닥치면 이제 세상의 끝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선동적인 말에 대하여 사람들은 쉽게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구적인 위기가 다가오기 전에 예방백신을 접종하듯이 그릇된 종말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를 반성하고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종말론을 명확하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성동구 왕십리광장에는 기후위기시계가 있습니다. 이 시계는 거꾸로 가는데요, 앞으로 4년 몇 개월 남아 있습니다. 이 시간은 지구의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하여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자는 운동을 위해서 제안되었습니다. 약 100년 전 인간이 석탄을 태워 증기기관을 만들고 산업화시대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늘었기 때문에 지구의 평균온도가 상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와 비교하여 기온이 1.5도가 오르면 지구에 심각한 어려움이 올 것이므로 그 위기를 대비하여 미리 에너지를 아끼고 공해물질 발생을 줄이자는 취지로 이런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에 전 세계의 200여개국이 탄소중립의 목표를 이루자고 약속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환경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우리는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지구적으로 이상기후로 인한 재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4년 안에 이런 위험 징후가 더 커지고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이 온다면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이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구적인 위기 앞에서 작은 실천을 모아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더 큰 재난이 닥쳐 인류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때 가장 선도적으로 공동체의 안정과 화합을 위해서 나서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신앙교리가 그런 일을 가로막는다면 우리의 교리를 점검해 보고 미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가 우리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좋은 백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세대주의자들의 오해와 왜곡
십여 일 전에 우리 지방회 목회자들이 종말론에 대하여 신학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그 토론회를 마치고 제가 깨달은 것은 우리 교단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의 교회가 미국에서 온 열성적인 선교사들에게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1992년의 휴거파동 같은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휴거니 대환난이니 천년왕국이니 하는 용어를 바르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조상과 부모, 그리고 선배들로부터 배웁니다. 우리 선배들은 우리들보다 앞서서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 시대의 상식이 있고 그 시대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선배들로부터 온갖 좋은 것을 물려받지만 동시에 우리는 선배들의 결함과 과오도 물려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는 옛것을 잘 익히고 새로운 것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고지신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논어에서 온 말로서 온고지신(溫故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즉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았다고 합시다. 그 둘을 비교해 볼 때 서로 다른 점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비교해보고 무엇이 옳은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숙고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길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새로운 전통을 후배들에게 물려줍니다. 그러면 후배들은 우리들처럼 그들의 온고지신을 통해서 그들의 길을 찾을 것입니다.
저는 휴거 소동이 일어날 때에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100%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예언이고 성경해석이었습니다. 우리의 선배이신 조용기 목사님도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유럽이 통합되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설교하셨습니다. 휴거를 실감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였습니다.
왜 우리 선배들은 그렇게 성경을 해석했을까요? 그것은 1900년대 초반에 일어난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새천년이 되면 성경에 기록된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대환난이 있고 그 환난 전에 성도들은 휴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의 출발은 곧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가정이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다 보니 휴거나 7년 환난, 또는 혼인잔치 등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모두 성경을 왜곡하고 오해한 결과입니다. 전제가 잘못되면 결론이 잘못되는 법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머지도 다 잘못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천년왕국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천년왕국을 오해하여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이 일어났으므로 천년왕국을 바로잡아야 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이긴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장처럼 천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계 20:6). 여기서 요한계시록의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다른 책들과 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묘사되고 흰 말을 타고 오시는 왕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네 짐승이 있다고 설명됩니다. 용과 짐승, 그리고 별과 번제단과 향단과 같은 이름도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환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계시록을 간단히 설명할 때 ‘판타지로 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환상이나 판타지 형태로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을 그려주는 글을 묵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성경에는 다니엘서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에 나오는 환상이나 판타지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며 서로 어울립니다. 성경을 좀더 폭넓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20장을 읽어보니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달란트 비유나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있고 악하고 게으른 종들도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딤후 4:8).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이와 같은 메시지가 판타지로 제시됩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요한계시록 20:4
이 환상에는 보좌들과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시록의 편지에서 이기는 자들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것이며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26, 3:21). 사도 바울은 면류관을 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칭찬과 다스리는 권세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보면, 그 착하고 충성된 종들, 그 이긴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묘사됩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마나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믿음을 지키고 충성된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예수님의 가르침 같으며, 또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나 예언자들의 가르침과도 같은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요한계시록은 그 메시지가 판타지 즉, 환상이라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환상들은 비유나 은유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리하면 괴상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묘사됩니까?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요한계시록 5:6
예수님은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했는지 상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입니다. 그런 모습의 어린 양은 기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판타지에서 환상은 상징임을 알고 있기에 뿔은 권세를 상징하고 눈은 지혜나 통찰력을 상징한다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말씀도 우리는 계시록의 다른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순교를 당한 성도들에게 그들의 환난이 10일이라면(2:10) 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또는 1260일이라면(11:3, 12:6), 이제 그들이 통치하는 기간은 천년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잊고도 남을 만한 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천년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세대주의자들은 이 천년이 문자 그대로 천년이라고 이해하였고, 그 천년이 곧 임박했다고 임의로 정하고 종말의 시나리오를 썼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모든 과오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1992년 휴거 파동과 같은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신자들과 교회들이 이런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다 오류에 빠지고 계시록의 환상과 사건들을 역사적 사건과 억지로 연결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과오는 우리 선배들의 경험으로 이미 그릇된 해석이라고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선배들의 본보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바른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4. 성경이 말하는 종말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나 재림은 어떤 의미입니까? 언제 재림이 있으며, 언제 종말이 옵니까?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창조와 새창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그것을 주관하십니다. 특별히 인간을 만물의 관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청지기로서 소임을 잘 하면 만물은 충만하게 될 것이지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하면 땅이 저주를 받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그때 하나님은 인간을 바로잡으시고 땅을 고치십니다. 그것이 새 창조이며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과 땅을 바로잡으시려고 오시는 때를 심판날이라고 하며,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므로 새 창조의 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 날은 그들의 세상이 끝나는 종말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충실히 배우면서 종말이나 말세 또는 심판을 생각한다면 그 날은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려고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때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장면은 무시무시하고 두렵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어찌 가볍거나 간단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를 목적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활동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신자들은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심판이나 종말에 대하여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고 그 뜻을 준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초청하고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악을 행하고 그 권면을 듣기를 거부하는 세상이 펼쳐질 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으며 이 세상이 끝날 것에 대하여 경고했습니다. 그것이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종말과 말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심판 날과 말세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언자들도 말세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그들의 말세 메시지는 언제나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향한 경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하셨고 심지어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막 9:1, 눅 9: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그들 중에는 나이가 젊어서 한 세대가 지나가기까지 생존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로잡으시려고 일하시는 때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대하여 심판하신 때는 곧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날이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장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태복음 24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날에 성도들은 아무 것에도 미련을 두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포위한 군대는 이미 그들 마음에 살기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두 사람이 맷돌을 돌리다가 한 사람은 포로로 끌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둠을 당한 사람은 나이가 많아서 군인들이 거들떠보지 않은 늙은 여성인지도 모릅니다(눅 17:35).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아들은 젊어서 군대로 끌려갈 것이고 아버지는 칼에 맞든지 아니면 늙어서 필요없다고 여기고 버려두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을 이해하는 바른 해석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마태복음 24장을 휴거의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용기 목사님도 세대주의 신학이 풍미하던 시절에 사셨으므로 이 장면을 휴거의 모습으로 이해하셨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은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그렇게 이해합니다. 세월이 흘러 온고지신을 연습하면서 저는 휴거에 대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이런 오해를 낳게 됩니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천년왕국과 환난 전 휴거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년왕국은 상징이며 환난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악한 자들을 벌하시는 그 장면을 그려주는 그림입니다.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나 그것은 도리어 거룩한 싸움이며 우리가 받을 상급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천년왕국이나 대환난, 그리고 휴거에 대하여 미혹되지 말고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그렇게 사노라면 주님이 속히 오셔서 우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사람이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오히려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사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며 기대와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우리의 선한 공로가 드러날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렇게 애쓰던 선한 일이 마침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건강한 종말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휴거는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