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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 위에 계신 분
본문<요3:31~36>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다. 이것을 갈 4장에서는 두 아들은 비유라고 말한다. 비유란 숨은 뜻이 있다는 말이다.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은 역사적 인물이고 실제적 팩트인데 이것을 비유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ㅎ님이 운용하시는 구속사를 설명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이다(놀랍지 않은가? ㅎ님은 인생들을 장기판 장기 알처럼 운용하신다.)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은 땅의 예루살렘이고, 이삭을 낳은 사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예루살렘이란 우리의 모태인 교회를 말한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땅의 교회에서 낳은 율법을 상징하고, 이삭은 하늘의 교회에서 낳은 복음이라고 해석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ㅎ님에게는 두 교회와 두 자녀가 있다는 것이다. 율법교회의 육으로 난자와 진리교회의 영으로 난자가 있다.
육으로 난자들은 영의 세계를 모른다. 육의 눈으로는 안보이니 마음이 가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비중을 두고 여기서 잘먹고 잘사는 게 신앙의 전부인 줄 안다. 따라서 이들이 ㅎ님 찾고 예수 찾는 이유와 목적은 여하히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사느냐에 있다. ㅎ님 이름 팔아서 성공출세하고 높임 받고 부귀영화 누리는 것이다. 말로는 천국은 외치지만 그들의 가치관, 세계관에는 천국이 없다.
갈4장 이어지는 내용은 하갈은 남편 있는 자이고 사라는 남편 없는 자인데 하갈의 자녀보다 남편없이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많다고 한다. 이것도 비밀이다. 하갈의 자녀는 아무리 많아도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을 성경은 짐승이지 사람이라고 여기질 않는다. 사라는 홀로 사는 여자이다. 남편 없는 자이다. 거기서 이삭이 출생했다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ㅎ님의 아들이다. 이들만이 사람이다.
그렇다면 ㅎ님은 왜 이렇게 육의 노선과 영의 노선이라는 두 갈래로 나누어서 일하실까? 두 세력의 가치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육은 무엇이고 영은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육은 세상의 힘을 추구하기에 외적으로 커지고 많아지는 걸 가치로 여긴다. 반면에 영은 자기 가능성을 부인하고 ㅎ님의 뜻을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육의 세력에 의해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는 구조를 갖게 된다.
이것은 이미 창3장에서 예언대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 ㅎ님의 구속사에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이삭은 부정모형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자이다. 뱀의 후손은 성령으로 출생한 여자의 후손들을 역사 속에서 계속 핍박하고 죽이는 역할을 자행하면서 살아간다. 뱀의 후손들은 자기 가치 챙기기를 목적하여 살아가는 자들이고 여자의 후손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ㅎ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얼만 전까지 수많은 군중들이 요한을 따랐으니 그의 제자들도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로 한 것 의기양양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가게 되자 가게 문 닫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스승인 요한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좀 반전시켜보라고 닦달했던 것이다. 그러자 요한은 너무도 뜬금없는 답을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기가치 챙기기를 생명처럼 여기는 아담의 피를 가진 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요한은 이미 태중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채로 태어난 영적인 사람이었다. 눅1장을 보면 그는 이미 태중에서 주를 보고 알아본 자였다(요한이 모친 엘리사벳의 태중 6개월 남짓 상태/임신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예수를 보고 요한이 태중에서 뛰놀았다 함).
요한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던 자였다. 자신은 메시야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였다. 예수를 드러내고 예수를 높이는 게 자신의 임무였기에 예수가 흥해지고 자신은 사라지는 게 자신의 존재 목적이었다.
요한은 율법의 상징인물이다. 율법은 정죄하고 심판하여 죄를 알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비수가 흘러나온다(이 독사의 새끼들아!) 그래서 요한과 백날 있어도 안식과 쉼이 없다. 이게 율법의 정체성이고 한계이다. 그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소개한 것이다. 예수는 은혜와 긍휼을 통해 참 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영생을 주시는 예수께로 가야 한다고 가리키는 자가 요한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쫒던 자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당연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수제자들도 예수께로 가기를 권했다. 세례요한의 제자 중에서 사도 요한과 형제 야고보가 있고,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있었다. 이렇게 말로만 자신이 쇠하고 예수는 흥해야 한다고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모든 업적마저도 예수께로 양보하는 일을 한 것이다. 이렇게 사역의 초점이 예수를 드러내고 높이는 일을 했던 것이다.
성령을 받은 자들은 하나 같이 요한과 같은 스텐스를 취한다. 같은 사람이라도 성령을 받기 전과 후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주님의 제자들과 바울이 좋은 예이다.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은 서로 큰 자라고 다투며 예수 앞에서 먼저 눈도장을 찍으려고 아우성을 쳤다. 나중에 주님이 왕권을 거머쥐면 더 높은 자리를 취할 욕심에서 그리한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승천을 앞두시고 말씀하신다. 내가 올라가면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보내줄 테니까 그 성령이 임하기까지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야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잘 아셨기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정말 제자들은 자기를 위해 살던 모습에서 주를 위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심문하는 공회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에 대한 증거를 멈추라고 하는 그들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ㅎ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ㅎ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외침). 완전 180도 바뀐 모습을 보여준다. 불과 오십 여일 전에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서로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도망친 자들이 아닌가?
행5장에서도 베드로와 사도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서 예수 증거를 인하여 곤혹을 치루며 채찍에 맞았지만, 오히려 제자들의 심경은 ‘주를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심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기쁘다는 말이다. 주님이 자신과 같은 무지랭이들 한테 주의 증인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이 그저 감사하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망해도 ㅎ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에 생명의 가치를 두었다.
사도바울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철저한 율법적 교리와 실천을 목숨처럼 여기는 자에게 복음이란 절대로 수용될 수 없는 영역이다. 냉혈인간인 그에게 아무도 전도할 수가 없다. 전도하는 즉시 이단으로 몰려 죽음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직접 찾아가 바울을 만나셨다. 그렇게 성령을 받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눈의 비늘이 벗겨지자, 예수를 핍박하던 자리에서 주를 증거하는 복음의 제사장이 된 것이다.
바울은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온 평생 죽도록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한 게 아니라 주의 은혜가 한 것이라고 말한다. ㅎ님의 긍휼이 아니면 유대교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을 운명이었던 바울이기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결코 자기 업적이나 공로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천국은 ㅎ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바울이 복음을 영접한 것은 전적인 ㅎ님의 간섭으로 된 일이다. 이처럼 인간의 공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ㅎ님의 나라는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을 뿐이지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한 사람을 높이거나 경배하고 찬양한 것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성경 어디에서 바울을 찬양하며, 성경 어디에서 사도들을 찬양하고 선지자들을 경배했던가? 오히려 사도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드러난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자 그들을 꾸짖으면서 그 자리를 피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업적도 공로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알아주고 높이는 것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고 그들로 하여금 바라보고 믿어야할 분은 그리스도임을 전했던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도,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한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 업적 쌓기에 여념이 없다. 사울왕은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자기 기념비를 세웠다. ㅎ님의 은혜로 승리한 것을 자기 공로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자기 자랑과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가치를 챙기는 게 육에 속한 자들의 일관된 모습이다.
세례요한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에 비해 자기 스승인 요한이 먼저 온 자이고, 요한에 의해 세례 받은 예수가 요한 보다 못한 자인데, 어떻게 군중들이 요한을 떠나 예수께로 가는 것이냐고 요한에게 이를 바로 잡아달라고 불만 섞인 요청을 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예수는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한 후에 이어지는 내용이 오늘 본문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왜 요한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뒤로 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답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깊이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서의 마음가짐, 성도로서의 마음가짐, 교회에서 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본문에 담겨 있는 것이다.
먼저 31절에 보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라고 말한다. 위로부터는 하늘로부터라는 말로서, 다시 말하면 ㅎ님으로 부터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ㅎ님으로 부터 오신 분이고, 자신은 다만 땅에서 난자로서 땅에 속한 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은 땅에 속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간다는 불만을 보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라는 분과 자신과는 결코 동등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자신을 예수님과 대조시켜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지만 자신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자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32절에 "그가 친히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는 말은 두 가지로 구분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은 어둠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깜깜하다. 생명의 기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아는 자가 있던가? 고작해야 인간이 만들어 낸 진화론이니 환생이니 하는 이론에 붙잡혀서 살아가던지, 아니면 이도저도 관심 없이 짐승이나 하루살이처럼 살아들 간다.
진화론은 잘 알다시피 다윈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단의 조종을 받아 나온 거짓 이론인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이라는 논문을 쓰게 된 배경은 아주 단순했다. 이것은 다윈이 죽기 전에 절친 관계인 천주교 사제에게 고백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사제의 폭로에 의하면, 그는 학문적 명예와 평판을 얻기 위해 거짓 논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복제 양으로 유명한 황우석 박사와 같은 케이스다. 황박사도 세상의 평판과 명성을 위해 거짓 논문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내부자의 고발로 얼마 못가서 거짓임임 드러났다.
문제는 다윈의 논문에 여러 가지 납득이 되지 않는 오류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첫째는 중간 단계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단계 화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이 논문의 최대 맹점이다. 그러니 허구였다. 둘째는 돌연변이는 절대로 유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우연의 산물로서 돌연변이가 태어날 수는 있어도 이게 다음세대로의 유전이 되지는 않는다는 게 팩트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베이스는 돌연변이로 진화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만 가지고도 진화론이라는 논문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은 이런 맹점이 있는 진화론을 너무도 환영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윈 자신도 놀랬다는 것이다. 가정범과 과장을 곁들어서 전개된 내용을 사람들이 왜 그리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좋아하는지 의아했다고 한다. 왜 그런 현상이 야기된 것일까? 누가 기발한 논문을 발표하면 점검하고 또 점검하여 진위를 가려내는 게 그쪽 세계의 룰인데 어째서 허접한 오류투성이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다 덮어두고 오히려 세상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을까?
답은 하나다. 사람들은 ㅎ님을 인정하고 싶지를 않은 것이다. 진화론을 부정하면 창조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ㅎ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자연히 마음과 시선이 ㅎ님을 믿는 데로 쏠리게 된다. 사단이 이를 가만히 서서보고만 있겠는가? 그래서 엉터리 이론인 진화론을 위대한 학문의 발견인 것처럼 속여먹은 것이다. 다시한번 사단은 인간의 마음을 훔쳤다.
진화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떠났다. 이어서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진보적 사고를 가진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자 전국 초등학교에서 창조론만 가르치지 말고 진화론도 병행해서 가르치라는 교육방침을 내린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은 본성적으로 ㅎ님에게서 독립하려고 하는데, 진화론이 들려지니 얼마나 잘된 일인가?
진화론은 ㅎ님으로 부터의 독립선언과 마찬가지이다. 때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각종 종교적 의무에 부담을 가졌는데, 이게 웬 횡재냐는 것이다. 너도나도 ㅎ님을 떠나 자유를 만끽하는 세계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게 생명이 아니라 죽음인 것을 누가 알았을까? 똑똑하다던 케네디는 얼마 못가서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미국의 기독교 신앙은 퇴보를 걷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거의 교회가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지금 있는 것도 그나마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병든 기독교이다.
지금은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진화론이 세계 곳곳에 진리인양 퍼져 있다. 정작 다윈 자신은 죽기 전에 거짓이라고 고백했고 이를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 했지만, 세상은 이 진실을 덮어두고 거짓을 신봉하는 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이게 너무도 기이하지 않은가? 이면에는 사단의 책략이 있다, 그러나 더 큰 이면에는 ㅎ님의 허락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즉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게 아니라 택한 자들만 믿는 것이라는 ㅎ님의 정하심 때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믿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계신 분이 ㅎ님이시다.
다시 32절을 보자(그가 친히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친히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인데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두 번째 해석을 해보자. 아까 첫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두 번째 나눌 해석은 진리 면에서의 접근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무리 속에서 진리냐 비진리냐로 구분하자는 것이다. 서두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똑같이 예수를 믿어도 육에 속한 자이냐 영에 속한 자이냐를 구분하자는 말이다. ㅎ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도 자기 힘과 능력으로 믿어 자기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 내겠다는 무리들이 있다. 한마디로 알미니안 주의를 따르는 자들이다. 여기에 반해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일체 아무 것도 못하기에 ㅎ님이 선물로 주셔야 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한마디로 칼빈주의자들이다.
두 세력의 가장 큰 차이는 사람의 타락에 대한 관점 차이다. 칼빈주의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ㅎ님이 원하시는 선과 의를 전혀 행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고,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타락은 했어도 똥오줌을 못 가릴 정도는 아니다. 일말의 자유의지는 남아 있기 때문에 선악을 분별해서 ㅎ님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시각이다. 우리는 어디 편인가? ~~.. 당연히 칼빈주의다. 칼빈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칼빈이 요약한 내용이 성경의 핵심진리를 잘 표현 정리한 것이기에 거기에 공감한다는 말이다.
과연 무엇이 진리일까? 인간의 전적 타락인가? 아니면 타락했지만 자유의지는 남아있는 상태인가? 이것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을까? 몇 군데만 살펴보자.
=>창6장 과 8장에서 언급~사람이 어려서부터 모든 계획과 생각이 항상 악할 뿐- 그래서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인류가 멸망함. 여기서 오직 노아 가족만 구원. 은혜 입은 자의 표상/ 노아는 예수의 상징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심판이 없다(예수가 대신 감당했기에),
창8장(구원 후에도 죄에 연약한 존재들임을 보여줌). 그래서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심판n
=>렘13:23(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 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사람은 절대로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반어법..
=>렘17: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이를 누가 알랴?/주제파악 안되는 존재가 사람자신들이라는 일침)
=> 롬3(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선 자체를 행할 능력이 없다. 선이란 ㅎ님 믿는 것)
=>사64(사람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 -죄악을 가리지만 이미 더럽혀진 옷)
=>겔37장( 남조 유다 백성들이 다 마른 뼈들임/ 생기를 대언 하자 살아남: 장차 성령을 부어주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에 대한 그림자)
=> 엡2:1(우리가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 이제는 IX의 십자가 복음으로 살아남)
이렇게 철저하게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ㅎ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IX를 믿어 구원을 얻겠는가? ㅎ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가능하다.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역사 속에서 복음이 들려질 때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ㅎ님께로서 난 자들이다(요1:12~13 다시)
모두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데, 십자가 복음이 들려질 때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서 믿게 되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이들이 바로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오신 이유가 바로 이들을 찾아 구원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서 요6장에서 아버지가 내게로 이끌지 아니하면 내게 올 자가 아무도 없다. 나는 ㅎ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러 왔노라(하심)..모두가 ㅎ님의 선택을 말씀하심이다. 이들이 주님의 양들이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지만 다른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도망간다고 하신다.
오늘 본문 32절에서 그가 친히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이란 바로 창세전 ㅎ님의 언약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언약에 따라 때가 차서 예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키 위해 성육신 하신 것이다. 때가 찼다는 말은 사람의 율법 행함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판명이 난 구약의 긴 시간이 끝나서 새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을 의미한다.
만일 구약의 시험기간이 없이 막바로 새언약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면 인간들은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구원을 거저 주나?’ 하며 자기 의를 주장할 것이다. ㅎ님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다. 이런 인간들을 잘 아시기에 용의주도하게 일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실패를 보고 너희 인간들은 입 닫으라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 얻은 자들은 오직 감사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창세전 ㅎ님의 선택에 의해 구원을 하신다고 하면 반발한다. 그런 공정치 못한 분이 무슨 ㅎ님이냐고 따진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양이다. 영원히 어둠에 속해 있다. 성령을 주시지 않으면 주제파악이 안된다. 성령은 ㅎ님의 영이고 빛이시다. 그 분이 오셔야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기력하며 무가치한 벌레보다 못한 가증하고 더럽고 악한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이 그토록 감격스럽고 감사할 뿐이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촌간이다. 결국은 행함의 의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내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면 예수가 왜 오셔야 했으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단 말인가? 공연히 오셨고 공연히 죽으신 것이 아닌가? 인간 자신들이 할 수도 있는데 왜 예수가 필요할까?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그들은 궁색한 변명을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원죄를 사하신 것이고 자범죄는 각자가 해결해야 한다. 이게 그들의 논리요 주장이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 줄을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성화를 주장한다. 성화에 실패하면 구원은 취소된다고 한다. 이들은 절대로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의 신앙에는 자유함이 없다.
알미니안 추종자들은 복음을 말하지만 실제는 바리새인들처럼 다 십자가 예수를 짓밟고 모독하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노라’ 선언하신 말씀을 걷어차고, ‘아니요 주님이 미완성하셨기에 우리가 마무리를 하겠습니다.’저항하는 꼴이다. 이들이 평생 예수를 믿었지만 결국은 지옥에 가게 되니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분해서 이를 간다.
이들이 붙잡고 있는 말씀은 고작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구든지‘란 선택된 자 ’누구든지‘이다. 아무나 ’누구든지‘가 아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13장에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지만, 저희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신다. 이어서 ’너희 눈과 귀는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데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 복되다‘고 하신다.
다시 32절이 말씀하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이란 창세전 언약인 엡1장의 내용이다. ‘창세전 ㅎ님이 IX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IX의 피로 죄사함의 구속을 통해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신령한 복을 주시는 ㅎ님의 예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ㅎ님의 일하심에 대해 긍정하고 공감하는 자들이 바로 언약백성들이다.
복음을 말하면서 예정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온전한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다. 십자가복음 자체가 사람의 의를 부정한다.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임을 아는 자가 십자가 밑에 나아가 통회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자기 가능성이 눈꼽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절대로 인간은 십자가를 붙잡지 아니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복음주의자는 ㅎ님의 예정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만일 복음을 말하면서 예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면 그는 스스로의 논리에서 충돌하고 있음에도 이를 모르고 사는 자이다. 복음을 모르던지 인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말하면서 사람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무는 인정하되 그 나무의 뿌리는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겪이다. 밖으로 드러낸 나무가 있다면 뿌리가 먼저 존재했기 때문인데 뿌리는 안보이니까 없다고 규정하고, 보이는 나무만 존재성을 인정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형국인가? 택하심의 예정을 부정하면서 복음을 말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건 복음이 아니다.
이어지는 본문33절이 이에 대한 설명이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이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그의 증거란 하늘에서 보고 들으신 것을 말한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ㅎ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간의 언약에 의해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자기백성을 죄 아래 잠시 가두었다가 긍휼로 구원시킴으로서 그 은혜를 세세토록 찬송케 하신다는 창조 목적을 말한다.
이것을 주기도문에서도 주님은 언급하셨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 즉 창세전 하늘에서 작정된 시나리오대로 땅에서 너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될 것을 알아먹으라는 말씀이다. 어느 것도 우연은 없다. 모두 ㅎ님의 작정하신 예정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아니 묵시 속에서는 이미 모든 게 완성되어져 있다. ㅎ님께는 시공이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계획이 곧 성취로 완성된다. 이게 ㅎ님의 전능성이다. 계시록을 보면 천상의 교회인 새 예루살렘성이 완성된 모습으로 설명되지 않는가?
이렇게 ㅎ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주님의 증거인 십자가 피를 믿어 구원을 받게 되면 이들이 바로 ㅎ님이 ‘너희가 참되다’라고 ㅎ님의 것으로 인치신다는 말이다. ㅎ님은 ㅎ님의 것만 ㅎ님 것으로 인정하신다. 사람의 것은 어느 것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ㅎ님의 것은 내 안에 있는 IX의 보배 피이다. 주님의 부활 생명이 내 안에 오셨기 때문에 성도는 ㅎ님의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 안에 주시고는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 주의 살이로다’하신다. 성도 안에서 주님의 형상을 보시는 것이다.
사43장에서도 미리 말씀하셨다.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을 130여 년 동안 험악한 세월로 연단하셨다. 불에도 넣었다 물에도 넣었다 하시면서 옛사람을 다 빼내시고 그 자리에 ㅎ님의 성분을 넣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이스라엘로 조성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다. ㅎ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게 ㅎ님의 창조된 작품이다.
그래서 계14장에서 시온산에 선 144천이 흰옷을 입었는데 이마에 ㅎ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으로 인쳐졌다고 한다. 이들이 입은 흰옷이란 바로 IX의 십자가 보배피로 덮여진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피로 덮어쓴 자들이니 ㅎ님이 보시기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들이다‘라고 감탄하시는 거다. 진정한 ㅎ님의 것이요 ㅎ님의 소유된 백성들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참되다고 인쳤다고 한다.
34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은 자기 뜻이 없었다, 요8:28절을 보면,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한다(하심).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함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다. 주님은 순종의 아이콘이다.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신 예수님 밖에는 따라 살 자가 없으시다. 그런 아들 예수를 ㅎ님은 너무도 사랑하신다.
35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고 말한다. ㅎ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만물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자신의 백성들을 말한다. 그들을 아들의 소유로 주신다는 말이다(롬1:6 너희도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창1장은 6일 창조와 7째 날의 안식에 대해 내용이다. 이때 창조된 천지와 그 안의 만물들은 물질로 비유된 택한 자들에 대한 구원의 여정을 의미한다. 이를 6일 창조로 이루어 가실 것에 대한 구원에 대한 시나리오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서 잘 안다(앞의 3일은 IX의 십자가 사건/ 뒤의 3일은 성령의 사역), 그때의 만물이나 여기에 나오는 만물이나 모두 택하신 ㅎ님의 자녀들에 대한 말씀이다. 창2: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만물(쩨바/만군..ㅎ님의 군대, 백성)
36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을 믿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땅에 속한 자들이 땅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을 주러 온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말) 성령을 받아야 아들을 믿게 되는 바, 하나님이 누구에게 아들의 성령을 부어 주시겠는가? 인간 편에서 무엇을 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율법적 사고이다.
성령, 즉 아들의 영은 우리의 행함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아들인 고로 주신다고 (갈4:6)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약속된 하늘의 복이란 영생의 복을 말한다. ㅎ님의 아들 되는 이것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의 신령한 복인 것이다.
이 땅에 속해 이 땅의 좋은 것을 얻고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이러한 예수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예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예수를 믿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죄의 종된 나의 비참함 실상을 보게 하심으로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영생이 없는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성도의 몸은 신령한 주님의 몸처럼 홀연히 변하게 될 것이다. 신령체로 변하는 이것이 몸의 구속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날을 사모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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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