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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2
갈라디아서 3장 21-22절 [7장 3-4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에 대한 고백입니다. 제목 자체를 통해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이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로운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신앙고백서는 1항에서부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한낱 피조물이라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적 피조물이라면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마땅한 일임에도 언약의 방식으로 나타내길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방식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 겸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왜 이런 방식으로 하셨는가? 자발적 겸손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성적 피조물들이 그들의 복과 상급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어떤 결실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이성적 피조물들이 그들의 복과 상급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결실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맨 처음 언약을 맺으신 대상은 모든 인류의 머리인 첫 사람 아담입니다. 그와 맺으신 언약의 내용은 창세기 2장 17절인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이고, 그 명령을 어길 시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16절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금지된 것은 한 가지이지만 허락된 것은 금지된 것 외에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것을 허락하시고 단 한 가지만 금하셨습니다. 때문에 이 금지 명령이 결코 인색하거나 불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금지 명령은 반드시 있어야 할 법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법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이 법의 대상인 너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금지 명령을 주시면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어떤 약속까지 포함하는가 하면 신앙고백서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그 안에서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이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순종은 생명이고, 불순종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언약에 대하여 행위언약이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 자신의 행위에 따라 어떤 결과들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언약을 아담과 맺으셨는데, 단지 아담만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들과도 맺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모든 인류의 머리요, 대표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앞선 장(제6장)인 인간의 타락과 죄와 그에 대한 형벌에 대한 고백에서 살펴 본 것처럼 우리의 첫 조상, 우리의 첫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의해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범죄하였습니다(1항). 그리고 그 결과 일반적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되었습니다(3항). 뿐만 아니라 이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오는데, 그 부패에 의해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하며, 그리고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4항). 한 마디로 어떤 형태의 행위언약으로도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번째 행위언약에 이어 두 번째 은혜언약 맺기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살피게 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7장 3항입니다. 일단 3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타락에 의해 자신을 행위언약으로 말미암는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했으며, 주님은 보통 은혜언약이라 칭하는 둘째 언약을 맺길 기쁘게 여기셨습니다(갈3:21, 롬8:3, 3:20,21, 창3:15, 사42:6). 은혜언약으로 인해 그는 죄인들에게 그를 믿는 믿음, 즉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하며(막16:15,16, 요3:16, 롬10:6,9, 갈3:11),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모든 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사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믿고자 하며 또한 믿을 수 있도록 하실 것을 약속하며(겔36:26,27, 요6:44,4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거저 주십니다.
첫 번째 문장, 사람은 자신의 타락에 의해 자신을 행위언약으로 말미암는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했다는 것이 앞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물론 첫 사람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 다시 말해 선악과 금지 명령은 아담 이후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에덴이라는 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창3:22-23). 그러나 이 행위언약의 형태는 율법을 통해 고스란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것은 단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모든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말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5절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앞선 내용을 살펴볼 때 본문으로 읽은 갈라디아서 3장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율법인 행위언약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3항과 4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다시 말해 행위언약에 대한 실패 이후 아담만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언약을 맺은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비롯한 자범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율법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하며, 그리고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제6장 4항). 그러므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타락으로 인해 행위언약으로 말미암아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의 실패 이후 율법을 주신 것은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이긴 하지만, 생명을 주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분명 생명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 확인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정확하게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3장 21절과 22절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여기 보면 율법이 나오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앞선 구절들을 통해 볼 때 ‘약속하신 자손’(갈3:19), ‘중보자’(갈3:20)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행위언약이라고 할 때 율법도 약속이지만, 율법의 외형은 우리 스스로가 해 보라고 말합니다. 반면 복음은 너희가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율법과 복음은 대조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율법과 복음은 대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은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 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함과 동시에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일깨움으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과 복음은 결코 대조적인 것이 아니라, 칼빈의 표현처럼 율법은 복음의 다른 형식이요, 복음은 율법의 다른 형식인 겁니다.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으신 이유도 무엇인가?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요15:5). 물론 아담은 타락 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그것을 이룰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4장 2항). 그래서 행위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을 맺으신 것은 나를 떠나서 너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6항에 보면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그것에 덧붙여 모든 방편들을 예정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고백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므로 선택된 그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할 것까지 작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작정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저자 혹은 죄의 승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타락까지도 작정하여 택자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작정의 실행으로 나타나는 역사 속에서 행위언약은 은혜언약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사람은 자신의 타락에 의해 자신을 행위언약으로 말미암는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했으며, 주님은 보통 은혜언약이라 칭하는 둘째 언약을 맺길 기쁘게 여기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언약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지만 그것을 폐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 스스로가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통 은혜언약이라고 칭하는 둘째 언약을 맺길 기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까지도 작정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사라진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언약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더욱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언약을 아담과 하와의 타락 직후 곧바로 나타나는데,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소위 원복음이라고 칭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시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며 사람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제7장 5항에서 살피겠지만 율법 아래에서 이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양,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실행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롬3:21). 구약 백성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구원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예표 하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셨는데,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롬8:3a). 다시 말해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죄하시고,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롬8:3b-4). 본래는 우리가 정죄를 받아야 하지만,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죄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은혜언약이라는 말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을 말합니다. 행위언약이 내가 이루어야 한다면,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하여 이루신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셔서 우리에게 그저, 값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은혜언약으로 인해 그는 죄인들에게 그를 믿는 믿음, 즉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하며,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모든 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사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믿고자 하며 또한 믿을 수 있도록 하실 것을 약속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거저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행위언약과는 달리 은혜언약은 그저, 값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것이지만, 여기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죄인이 하나님께서 중보자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과 1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도 말씀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에 매여 영적이며 일시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들과 함께 죽음에 종노릇하게 되지만(제6장 6항),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으며,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조건조차 우리 편에서는 시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은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의인이 아닌 죄인이고, 죄인임에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자가 없는데, 누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찾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모든 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믿고자 하며, 또한 믿을 수 있도록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 36장 26절과 27절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요한복음 6장 44절과 45절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 믿음이 자리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받는데, 인간 편에서 한 일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생명과 구원을 거저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구원을 누가 받는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내용과 일치하게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모든 자들’입니다. 사람 편에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데, 누구에게 주시는가?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모든 자들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말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 제한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한층 더 빛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은혜언약은 타락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 은혜언약을 베푸시는가? 죄인입니다.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그 믿음도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하나님께서 어떻게 믿음을 일으키시는가? 성령을 주셔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억지로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바꾸이십니다. 믿음에 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구원인데, 이러한 생명과 구원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죄인으로서 믿는 자이지만, 누가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명으로 정해진 모든 자들입니다. 즉 은혜언약을 죄인에게 베푸신다고 할 때 모든 죄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 외에 나머지는 참된 믿음으로 생명과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은혜언약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4항은 유언과 관련하여 말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은혜언약은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및 그 안에서 상속된 영원한 기업과 거기 속한 모든 것들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유언의 이름으로 종종 제시됩니다(히9:15-17, 7:22, 눅22:20, 고전11:25).
이 부분은 사실 우리말 성경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유언으로 번역한 곳은 히브리서 9장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될 때 사용했던 성경은 흠정역, 즉 KJV(King James Version)이었는데,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9장 15-17절, 히브리서 7장 22절, 누가복음 22장 20절, 고린도전서 11장 25절이 유언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인용된 구절들의 우리말 성경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 이하 17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7장 22절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누가복음 22장 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1장 25절입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9장 외에 다른 부분은 다 언약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KJV(King James Version)에서는 유언(testament[테스트먼트])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3항은 은혜언약에 대한 내용으로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중보자의 직책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인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는 죄인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때문에 죄에 대한 죽음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거저 주시기 위해서는 죄인 대신 죄 없으신 하나님이 죄인의 모든 죄짐을 짊어지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의 죽음 없이는 생명과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은혜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은혜언약은 성경에서 유언(testament)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진술된다는 게 4항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언자(testator)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에 획득하신 생명과 구원이 상속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히브리서 9장인데, 15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심을 말하면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새 언약, 즉 은혜언약은 첫 언약인 행위언약의 실패에서부터 왔다는 것이고, 그때 범한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한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신다는 게 은혜언약의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면서 설명하는 것이 16절 유언은 유언자가 죽어야 된다는 것이고, 17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유언자가 죽지도 않았는데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는 일은 없습니다. 결국 약속을 유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죽음으로 영원한 기업을 상속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외에 한글 성경 및 영어의 여러 번역본들은 유언(testament)이 아닌 언약(covenant)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정요석 교수의 책을 참고하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언약은 ‘베리트’(בְּרִית)이다. ‘베리트’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성경은 일반적 언약의 의미를 가진 ‘순데케’(συνθήκη) 대신에 ‘디아데케’(διαθήκη)를 사용한다. ‘순데케’는 동등한 당사자들이 약속과 조건을 주고받는 의미가 강하고, ‘디아데케’는 양도 계약서나 유언의 의미가 강하다. 즉 ‘다아데케’는 ‘갑’이 ‘을’에게 무엇을 해 준다는 일방적 내용을 전하는 의미가 강하다. 성경이 ‘순데케’ 대시에 ‘디아데케’를 언약으로 사용한 이유는 성경의 언약은 동등한 당사자들 간의 체결이 아니라, 탁월하게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디아데케’라는 단어에는 이미 유언과 유언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부분은 참고만 하시되,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언약은 분명 일방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물론 앞서도 말했지만 은혜언약이라 할지라도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조차 선물이라고 할 때,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믿게 하신다고 할 때 일방적인 면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억지로 믿게 하지 않는 성격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언약에는 유언의 의미도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성경은 언약을 유언으로도 번역하는 것이고, 또한 언약 안에 유언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도 커서 우리가 순종한다고 해서 순종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순종이 아닌 불순종을 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 죄인 가운데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모든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저 받은 이 은혜에 대하여 감사와 순종으로 우리의 마땅한 의무를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