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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이 예수님께 부딪혀 튕기는 이유>의 줄거리: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도록 받아들여지는 것이 예수 믿음입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믿음을 확신하는데 그 마음이 예수님으로부터 튕기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특정한 궤도를 따라 멈춤 없이 달려가고 있기에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겠다고 접근한 사람이 부딪혀 튀어나오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그럼 대체 어쩌지요?
마음이 예수님께 부딪혀 튕기는 이유
(요한복음 7:25~36)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이 예수님께 부딪혀 튕기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께 부딪혀 튕기는 이유”
예수님께 부딪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다면 부딪힐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께 다가가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튕겨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모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튕겨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음은 이처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의식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가능합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만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의식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 생활화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되기 때문에 생활화인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의식으로 십자가 바라보기는 주문 외우기와 같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인격적 사건입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격적 사건인 이유는 십자가를 바라봄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만 하는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거나 바라보아도 그 의미와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예수님으로부터 부딪혀 튕겨져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바깥에 두고 써먹는 일에 여념이 없기에 예수님으로부터 튕겨져 나왔다는 사실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3~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35절에서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라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학자들은 본문이 언급되는 시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약 6개월 정도가 남은 때였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수평적 시간 즉, 크로노스의 때에서 보면 십자가 사건이 머지않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은 28절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탈출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동일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인간세상을 탈출하셨고, 탈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선상에서 움직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도는 인공위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셔서 땅을 탈출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동선을 궤도 삼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지구 바깥 궤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에서 문제가 생기면 우주선을 쏘아서 우주인이 수리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인공위성과 만나기 위해서는 정확한 계산을 통해서 위치와 속도를 맞추어야만 합니다. 인공위성의 속도와 사람의 속도가 딱 맞아떨어질 때만 만남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동선상에서 움직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동선에 일치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곧 예수님과의 만남이고 예수님 안에 우리 마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동선과 일치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은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움직이시는 예수님을 올라타는 것입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정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시는 예수님의 움직임이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움직이는 방향을 느끼고 이 방향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기차가 100km로 달릴 때 차를 타고 같은 방향의 도로를 100km로 달려간다면 기차는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는 일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십자가 사건을 정적인 사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멈춰있다면 예수님은 달리는 기차처럼 휙 지나가버리시기에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지셨고 세상을 빠져나가는 탈출의 동작 중에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과 같은 속도와 같은 방향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께 올라타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사건을 그저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하나의 정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점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인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인격적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이유, 십자가 사건에 올라타야 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 방향과 속도를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탈출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해서 이 세상에 정착하셔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탈출하시기 위하여 보내지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몰랐기에 예수님과 부딪혀 튕겨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세상에 보내지시고 보내진 상태에서 탈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선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기차처럼 달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세상에서 탈출하신다는 것에 대한 의식조차 없었으며,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방향성을 맞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에 타기 위해서는 속도를 맞추어야만 합니다. 달리는 기차를 타겠다고 달려들어 봤자 부딪혀서 튕겨 나올 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습관적으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나 예배당에서의 충성과 봉사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신학이나 교리공부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동선상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돌고 있는 회전목마를 올라타는 것과 같고,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을 만나는 우주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기차와 속도를 맞추어야만 합니다. 기차가 100km로 달릴 때 같은 방향과 같은 속력으로 달리는 차를 타고 있다면 기차는 멈춰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같은 방향과 같은 속력으로 달리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땅으로 보내지시고 땅을 탈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올라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방향성을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면 100km로 달리는 기차에 수직으로 올라타겠다고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기차에 부딪히고 튕겨 나오듯이 예수님께 부딪히고 튕겨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올라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움직이고 계심을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볼 수 있으려면 예수님께서 도착하시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고 정확하게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목적지를 보고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으로 가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몰라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세상으로 보내지셨고 세상을 탈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동선 위를 움직이시는 예수님께 올라탈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이나 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도 주어질 것입니다. 어떤 결과든지 준비된 은혜들이 주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맞추려고 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믿고자 하기에 부딪히고 튕겨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움직이고 계신 동선의 목적과 방향을 알려주시기 위해 본문에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주십니다. 28~29절을 보면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 나는 아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라는 부분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시고 세상을 탈출하셔서 다시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탈출을 목적으로 삼으셨고 다시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니다. 이러한 동선의 목적은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을 아셨듯이 우리도 참되신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으셨고 세상에서 탈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는 동선에서 움직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동선과 같은 방향성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을 참되신 분으로서 만나고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우리를 끌고 가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동선의 목적지이기에 참되심의 의미를 알고 참된 하나님을 알 때 예수님과 같은 방향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예수님께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께 부딪히고 튕겨 나오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다면 그 이유는 예수님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궤도에서 움직이고 계시는 예수님께 수직으로 다가가니 튕겨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방향성을 띠게 하는 하나님의 참되심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천국의 입장에서 내려다보시는 모든 사람의 특징은 마음의 공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공백이 있기에 무엇인가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게 되고 이것이 삶의 에너지가 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만이 참된 마음 채움 거리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진공청소기와 같습니다. 진공청소기가 진공상태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지 빨아들이듯이, 사람은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이라면 무엇이든지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빨아들임으로써 마음 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에 비추어서 참됨과 거짓됨이 나뉘게 됩니다.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이 참된 것이고 마음을 채울 수 없다면 거짓된 것입니다.
돈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서 돈을 빨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은 마음을 채울 수 없기에 거짓된 것입니다. 이번에는 자녀의 형통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역시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자녀의 형통도 마음을 채울 수 없기에 거짓된 것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떤 것도 마음 채움에 대한 기대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진짜로 마음을 채워줄 대상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참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시며 마음이 채워지는 기쁨을 알고 계셨습니다. 기쁨은 참된 대상을 만날 때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참된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이기 때문에 기쁨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에만 존재합니다. 이 땅에는 온전한 기쁨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거짓된 기쁨입니다. 우리나라가 축구경기에서 일본을 이기면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도 금세 사라질 거짓 기쁨입니다. 거짓 기쁨은 거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적인 음란이고 간음입니다. 마음이 더럽혀지고 부패하게 됩니다. 잠깐이나마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기뻐할 수 있어서 좋아하지만 그 일시적인 기쁨이 반복될수록 마음은 더러워지고 깊이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참되신 하나님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을 탈출하시는 이유는 이 땅에는 참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바쁘셨습니다. 예수님도 인격적인 분으로서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서는 아버지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을 빨리빨리 하시고 다시 하늘로 가셔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공기를 숨 쉴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이 세상의 분위기를 숨 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 아버지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가는 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유대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온통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상 그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마음 채움에 있어서는 거짓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거짓 것을 끌어들이는 악한 기운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탈출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3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탈출하신 후에는 참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께 부딪히지 않고 튕겨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방향성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마음 채움의 기대에 유일하게 부응하실 수 있는 참된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일이 안 풀려서 괴롭다면 마음이 일에 사로잡혔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풀려서 마음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거짓임을 아는 것이 예수님과 같은 방향성을 갖는 것입니다. 동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십자가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방향성을 띠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한 몸이 되어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윗 왕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고,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사랑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어 야다(ידע)가 의미하는 대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서로를 알듯이 하나님의 좋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아는 증거는 이 세상 것을 바라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음 안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예수님과 같은 목적지와 방향성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동선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 예수님께 올라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결별 선언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참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거짓된 세상 것들로 채움의 기대를 가지고 마음에 끌어들이고 흡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의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달리는 기차에 수직으로 달려가서 올라타려는 것과 같습니다. 부딪혀서 튕겨 나오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처럼 동선상의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는 정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선 속에서 움직이는 사건입니다. 움직이는 사건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같은 방향성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 인격적 사건인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우리가 바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달리는 기차에는 어떤 것도 올라탈 수 없지만 바람은 들어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람처럼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붙박이로 붙잡힘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람처럼 세상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상에 묶임과 세상에 매임에 대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 올라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다만 우리가 올라타야 할 십자가 사건은 인격적 사건이기에 목적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거짓되기에 아무리 붙잡고 씨름을 해봐도 마음 채움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참되시기에 그 하나님의 좋음을 알기 위하여 하늘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방향성이 됩니다. 이 방향성이 있어야만 동선상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과 같은 방향과 속도가 될 수 있고 십자가에 올라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로 가야 되기 때문에 세상에 매임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에 매임이 없을 때 바람이 됩니다. 바람이 기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만이 바람이 되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늘로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매임을 끊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참되심과 하나님의 유일하게 좋음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세상에 매임이 끊어져야 한다는 것까지 인정하고 나면 십자가는 올라탈 수 있는 사건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밖에서 볼 때는 나도 예수님도 하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동선 위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방향성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결코 예수님께 올라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바라봄의 의미와 이유를 인격적으로 알 때 예수님과 같은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역사를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끝납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 아버지의 좋으심을 누리는 것, 그리고 이 땅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말과 행동으로 살게 되는 것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예수님께로 들어가고 나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생활화의 결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기에 앞서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동선 위를 움직이고 계시기에 우리의 방향성도 예수님과 같아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가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도 같이 움직이면서 제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께서는 동선을 향해 달려가시며 너희는 내 안으로 올라탈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듣는 자들 중에 속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방향성을 띠고 달려가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십자가 생활화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