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리적 현상(30-31)은 바로 낮은 단계의 영적 체험이라는 존슨의 이해
-무의식으로서 꿈과 적극적 명상의 관계-
무의식은 의식의 반대편에 따로 존재하는 저장고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과 중첩되어 작동하는 하나의 현실이다. 그 에너지가 의식과 관계 맺지 못하면 증상·충동·강박·우울·꿈 같은 형태로 우회하여 나타나고, 의식이 그것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같은 에너지가 의미·상징·창조성·삶의 방향을 회복시키는 자원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병리 속에 좋은 것이 숨어 있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존슨이 말하려는 구조는 더 역동적이다.
1. 무의식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문장이 이것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어떤 형태로든 내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내면세계는 “끊임없이 우리 주의를 환기”시킨다고 한다. 즉 무의식은 내가 관심을 가지면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작동하고 있다. 꿈을 꾸고, 이유 없이 어떤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고, 별것 아닌 말에 지나치게 상처받고, 반복해서 같은 관계에 빠지고, 설명하기 힘든 불안이나 충동이 생기는 것까지—융적 관점에서는 의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심리적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를 이렇게 보면 명료하다.
무의식의 에너지 → 의식에게 도달하려 함 → 꿈·상징·감정·환상·충동 등을 통해 표현됨
여기까지가 첫 번째 핵심이다
2. 그런데 현대인은 그 신호를 읽는 ‘종교적·상징적 통로’를 잃었다
존슨은 현대인이 “신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를 발견하거나 신 체험을 하는” 종교적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단순히 “현대인은 종교를 안 믿어서 병든다”는 뜻으로 읽으면 좁게 읽는 것이다. 존슨이 주목하는 것은 상징적 삶(symbolic life)의 상실이다.
과거에는 꿈, 기도, 의례, 신화, 명상 같은 문화적 장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경험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 통로가 약화되면 어떻게 될까? 무의식의 에너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는 그대로 있는데 그것을 담고 해석하고 관계 맺을 통로가 약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존슨에게 현대인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무의식의 에너지
→ 의식에게 무언가를 요구함
→ 그러나 의식이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함
→ 에너지가 다른 출구를 찾음
→ 강박·충동·우울·불안·신경증적 반복 등으로 나타날 수 있음
그래서 사진의 강연 제목, 즉 “당신이 고통받는 신경증이 바로 낮은 단계의 영적 체험입니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이해된다.
3. 여기서 ‘낮은 단계의 영적 체험’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정신질환 자체가 영적 체험이다라는 현대 임상적 명제가 아니다. 그렇게 일반화하면 위험합니다. 존슨이 융 심리학의 맥락에서 제시하는 해석이다. 그가 보려는 것은 증상의 의미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반복적인 불안에 시달린다고 하자.
보통의 질문은 “어떻게 이 불안을 없앨 것인가?”이다. 존슨의 내면작업은 거기에 다른 질문 하나를 추가한다. “이 불안을 통해 내 정신의 어떤 부분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이 전환이 중요하다. 증상을 없애야 할 적으로만 보면 에너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게 된다. 그러나 증상을 아직 번역되지 않은 내면의 신호로도 바라보기 시작하면 관계가 달라진다. 그래서 ‘낮은 단계’라는 말은 일종의 미분화 상태로 이해하면 훨씬 좋다.
원초적인 심리적 에너지 → 아직 의식되지 않음 → 증상적·강박적 형태 → 상징을 통한 관계 → 의미의 발견 → 의식의 확장
즉 동일한 심리적 에너지가 어떤 방식으로 의식과 관계 맺느냐가 관건이다.
4. 그래서 책 36쪽의 ‘힘과 자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존슨은 말한다. “심오한 차원의 무의식을 발견하고 그 안 깊은 곳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힘과 자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하다.
무의식은 단순히 상처와 억압의 창고가 아니다. 융과 존슨에게 무의식에는 의식적 자아(ego)가 아직 갖지 못한 가능성도 있다. 새로운 관점, 창조성, 상징, 정서적 에너지, 삶의 방향, 자아가 배제해온 성격의 측면 등이 그곳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곳과 나를 변화시킬 자원이 발견되는 곳이 완전히 별개의 장소가 아닐 수 있는 셈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불안의 밑바닥에 경계하고자 하는 힘이 있을 수도 있고,
분노의 밑바닥에 존엄을 지키려는 힘이 있을 수도 있으며,
반복되는 꿈 속에 의식이 아직 인정하지 않은 새로운 삶의 방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기계적으로 “우울에는 이런 의미, 불안에는 저런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슨은 그 사람 자신의 상징과 직접 관계를 맺는 작업을 중요하게 본다.
5. 바로 이 지점에서 ‘적극적 상상’이 필요하다
여기까지 오면 적극적 상상이 왜 필요한지가 선명해진다. 무의식이 상징으로 말한다면, 의식은 그 상징을 단순히 분석의 대상으로만 삼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꿈에 검은 집이 나왔다고 하자.
“집은 자아를 의미하고 검정은 우울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석하고 끝내는 것은 존슨이 말하는 깊은 내면작업과 다르다. 적극적 상상에서는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집 앞에 서 봅니다.
문이 열리는지 기다립니다.
그곳에서 누가 나오는지 봅니다.
그 존재에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내가 예상하지 않은 말을 하도록 허용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상상해서 답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르다. 의식이 무의식에게 내용을 지시하지 않고, 무의식에서 무엇이 올라오는지 기다리면서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 상상은 일종의 대화 공간이다.
의식 ↔ 상징 ↔ 무의식
꿈에서는 무의식이 주도권을 많이 갖는다. 반대로 깨어 있는 일상에서는 의식이 주도권을 갖는다. 적극적 상상은 그 중간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6.그래서 존슨에게 치유란 ‘무의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존슨은 꿈에 대한 적극적 명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을 말한다.
① 무의식은 이미 내 삶 속에서 활동한다.
↓
② 그것은 꿈·상징·감정·충동 등을 통해 의식에 접근한다.
↓
③ 의식이 이를 듣지 못하면 에너지는 때때로 반복적·신경증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
④ 그러므로 증상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
⑤ 그 에너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만난다.
↓
⑥ 적극적 상상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관계가 생긴다.
↓
⑦ 무의식에 묶여 있던 에너지와 가능성이 의식의 삶으로 통합된다.
↓
⑧ 의식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래서 존슨이 말한 “내면작업의 핵심은 의식을 확장하는 데 있다”는 문장이 전체 논의의 결론인 것이다. 적극적 상상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결국 “나는 이미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가 아니라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니 이것이 스스로 말하도록 기다리겠다.”에 가깝다. 즉,
증상 → 즉시 제거가 아니라 증상 → 멈춤 → 경청,
상징 → 즉시 해석이 아니라 상징 → 머묾 → 관계,
무의식 → 정복이 아니라 무의식 → 대화,
그리고 그 결과가 의식의 확장이다.
그래서 존슨의 적극적 상상을 단순한 ‘상상 훈련’으로 이해하면 핵심을 놓친다. 그것은 오히려 의식이 자신보다 더 큰 내면의 삶 앞에서 잠시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것이 상징을 통해 말을 걸도록 공간을 내주는 훈련에 가깝다. 이렇게 이해하면 존슨의 꿈작업 → 적극적 상상 → 의식의 확장 → 개성화가 사실 하나의 연속된 운동이라는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계에서 중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무의식의 에너지가 의식으로 통합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인가?”이다. 이걸 개성화와 연결하면 존슨의 전체 그림이 거의 완성된다.
참고로 그가 말한 ‘낮은 단계’라는 말의 의미는 가치가 낮거나 사람이 미성숙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에너지가 아직 분화되고 상징화되지 못했다는 뜻에 가깝다. 그의 스펙트럼은 이렇다.
무의식의 에너지 → 압도·충동·반복 → 상징 → 대화 → 의미 → 삶의 변화
처음에는 어떤 힘이 나를 붙잡는다. 불안이 나를 붙잡고, 강박이 나를 몰아붙이고, 설명할 수 없는 수치심이나 분노가 나를 지배한다. 나는 그것을 ‘나에게 일어나는 병리적 현상’으로 경험한다. 그런데 내면작업을 하면서 질문이 달라진다. “왜 이것이 나를 괴롭히는가?”에서 “이것을 통해 내 안의 무엇이 나에게 도달하려 하는가?”로 이동한다. 이 순간부터 증상 자체를 영적인 것으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을 일으키고 있는 심층의 에너지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다. 그래서 ‘신경증’과 ‘영적 체험’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둘 다 일상적 자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나에게 찾아오는 경험일 수 있다. 신경증적 경험에서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멈출 수가 없다”인데, 내면작업이 진행되면 같은 심리적 현실을 향해 “내가 아직 모르는 무엇이 여기에서 표현되고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차이는 에너지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에너지와 의식의 관계에 있다.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는 내가 그것에게 사로잡힌다. 상징적 관계가 생기면 내가 그것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신경증적 고통에는 융적으로 보면 역설적으로 “지금의 의식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라는 신호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존슨의 표현은 신경증을 ‘영적 성취’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더 큰 정신적 현실이 왜곡되고 미분화된 형태로 의식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증상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변형시킨다. 이것을 하는 것이 적극적 명상(active imagination)이다.
즉, 불안 → 제거해야 할 것 → 통제라는 구조에서 존슨은 불안 → 무엇인가를 운반하고 있는 현상 → 그것이 가진 이미지·상징·감정에 접근 → 그 안에 있는 요구를 발견 → 의식의 삶과 관계 맺음으로 나가게 적극적 명상을 하는 것이다. 신경증적 에너지가 상징적 경험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힘과 자원의 의미에 대한 존슨의 이해가 놓여있다. 존슨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라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 깊은 곳에는 의식이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증상 뒤에 있는 에너지를 따라 내려갔더니 단순히 상처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억압했던 공격성에서 자기주장의 힘이,
두려움에서 자기보호의 지혜가,
외로움에서 관계를 갈망하는 능력이,
무기력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중단하려는 요구가,
발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증상은 에너지 그 자체가 아니라, 에너지가 현재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형태로 본다. 에너지 ≠ 증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내면작업은 증상적 표현 → 상징 → 관계 → 의미 → 에너지의 새로운 사용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슨의 자원이자 영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존슨에게 영성은 반드시 초자연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ego가 자기 자신만을 전체라고 여기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보다 더 큰 정신적 현실과 관계를 맺는 경험과 밀접해진다. 흥미롭게도 존슨과 젠들린은 중요한 하나의 질문에 같이 선다.
“왜 내가 이러지?” “내가 통제해야 해.”가 아니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내 삶의 무엇이 여기 있는가?” 이 질문에서 존슨의 『내면작업』 전체가 시작된다. 곧 무의식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관계 맺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단순히 잊어버린 기억의 창고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의식적 삶과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또 하나의 심리적 현실이다.
문제는 그 현실이 의식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존슨에게 무의식의 주요 언어는 상징이다. 그리고 꿈과 상상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연결하는 자연스러운 통로이다.
“내 안의 무엇이 이것을 통해 나에게 도달하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