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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난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 2022년 8월 7일 주일 예배
본문 / 창세기 1:24-2:3
제 인생에서 감격스런 순간을 뽑으라고 한다면 자식을 낳을 때일 겁니다. 다른 일도 있지만 자식을 낳았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아마 제 부모님도 그런 감격이 있었을 겁니다.
남의 자식이 태어났을 때 눈물이 납니까? 남의 자식은 아무리 태어나도 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생명과 사랑으로 세상에 나온 내 자식에 대해서는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에서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아기를 낳다가 죽는 사람도 거의 없고 산통을 좀 참다가 약물이나 수술로 고통 없이 낳지만 과거에는 아이를 낳다가 죽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죽지 않아도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은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 두려움과 고통을 다 잊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자기 아기를 낳는 고통을 잊게 하는 산모의 그 기쁨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고 심히 좋아하신 하나님의 기쁨의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더 기쁠까요? 자기 아기를 낳은 부모일까요?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일까요? 예수님은 사람이 악해도 자기 자식은 사랑한다고 하셨지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영이라 하시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자기 자식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해도 그것은 육신일 뿐이라는 겁니다. 육신은 생명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은 세상에 잠시 있다가 죽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세상에 있을 때뿐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어떠셨습니까? 31절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시작이 태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빛을 창조하신 첫째 날부터 사람을 창조하신 여섯째 날로 끝이 났습니다. 2장 1절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시작하신 그 창조에 대하여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보기에 좋았다.”와 “심히 좋았다.”에 담긴 하나님의 기쁨과 감격이 같은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비유로 말하자면 보기에 좋았다는 것은 남의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았을 때의 감정이라면 심히 좋았다는 것은 내 자식이 태어났을 때의 감격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낳은 것에 대한 감격은 알지만 자신을 낳은 부모님의 감격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사랑으로 낳은 아이가 나에게 심히 좋은 기쁨과 감격을 준 것처럼 나의 부모도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나를 낳았을 때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심히 좋은 감격과 기쁨이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내 생명과 사랑으로 세상에 태어난 자식에 대한 심히 좋은 기쁨과 감격은 궁극적으로는 나를 창조하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신 하나님의 그 기쁨이 곧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감격인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시고 태어날 때 기뻐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인간이 타락하여 악해도 자기 자식은 사랑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셔서 자기 생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생일을 맞으면 내 육신을 낳느라고 수고한 부모님께도 감사해야 하지만 나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시고 생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고 기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드셔서 지옥에 보내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심심해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인간은 외로워서 자식을 낳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정자를 사서 자식을 낳는 기가 막힌 짓을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식을 자기 존재의 연속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 유전자를 갖고 있는 자식을 낳아 대를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를 잇지 못하면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육은 무익하다고 하신 것처럼 자식은 결코 내 존재의 연속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아니 왜 사람을 만들어 지옥에 보네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할 법도 한 것이 천국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은 좁은 길이라고 하셨는데 지옥은 넓은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길로 가는 사람은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라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이 인간에게는 아! 하나님이 잘 하신 일이구나!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셔서 천국이라는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생각을 할 텐데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고 하니 아니 왜 사람들은 만들어서 지옥에 보내느냐고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그런 편견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아니 누가 지옥에 가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너는 지옥에 가라고 자기 형상대로 만들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그리고 기뻐하셨습니까? 어떤 부모가 악하다고 자기 자식을 낳고 저주를 퍼붓습니까? 그 자식이 잘 못되기를 바랍니까? 뱃속에 있는 자기 자식에게 너는 못 생기고 머리도 나쁘고 키도 작고 불행한 자가 되라고 저주를 합니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의 털은 부드럽다는 속담은 타락한 인간들의 자식 사랑에 대하여 하는 말입니다. 여러 사람을 흉악하게 죽인 연쇄 살인마도 자기 자식은 끔찍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내가 아이를 임심하였을 때 새벽에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배에 손을 얻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은 하나도 닮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닮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죄인인데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이 그 속성이 사랑과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여 세상에 보내시고 기뻐하신 그 하나님이 단 한 사람이라도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어떤 죄를 지은 악인이라고 회개하여 구원 받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심판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도 풍성하신 분이지만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결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부모가 악해도 자식이 죄를 지었다고 사형을 받고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은 지옥에 떨어져야 할 타락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죄인들의 모든 죄를 자기 죄로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나는 사랑이라고 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여 세상에 보낸 그 타락한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친아들보다 죄인들을 더 사랑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지옥에 한 사람도 가지 말라고 아들을 대신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회개하는 자들은 다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들어서 지옥에 보네냐는 소리가 나옵니까? 왜 나를 만들어서 지옥에 가게 하냐는 말이 나옵니까? 그런 사람들은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처럼 지금도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심한 모욕을 받을 때가 언제일까요?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부모에게 이런 망발을 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할까요?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는 못 할망정 왜 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나게 해서 고생하게 하냐고 불평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부모가 태어나는 자식이 어떤 놈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런 놈인 것을 미리 알았다면 낳았겠습니까? 부모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해 놓으신 그 자식을 낳을 뿐이지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왜 날 낳았냐고 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세상에 보내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여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과 완전한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왜 날 낳았냐고 불평하면 내가 너를 낳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너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고 왜 날 보냈냐고 원망하면 좋으신 하나님이 완전한 기쁨만이 있는 천국에서 너와 함께 영원히 그 기쁨을 누리려고 그러신다고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면 하나님은 왜 내 동의도 없이 태어나게 했냐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 동의가 있어야 일하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타락한 교만한 인간이 그딴 소리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뜻은 완전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세상에 보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낸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으셔서 보내신 겁니다. 할렐루야!
진짜 좋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옛날에 할머니들이 맛있는 것을 먹으면 종이에 싸서 손주에게 갖다 주지 않습니까? 이것 너무 맛있는데 너도 먹어보라는 겁니다.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생각해서 감사하게 먹는 겁니다. 그런데 싸가지 없이 뭐 이런 것을 창피하게 싸왔냐고 핀잔하고 할매나 먹으라고 하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이 시대의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그 사랑과 정성을 업신여기는 불의한 자들이 왜 없겠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천국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게 다 사단이 역사하며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기 위해 지금도 발악하며 역사하는 것이고 그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는 자들은 천국의 영원한 영광과 기쁨을 지옥의 영원한 고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를 물리쳐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마귀를 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요한복음 5장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그 능력을 통해서 저주와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을 자유와 거룩함과 생명과 천국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안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다 알지만 세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합니까? 얼마나 경쟁이 심합니까? 직장을 다니고 결혼생활과 자식을 키우는 것 어디 하나 쉬운 것이 있습니까? 죄와 그 유혹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 육체의 탐심으로 사람들과 경쟁할 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괴롭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에 육체의 정욕이 끌려가면 지옥으로 가는 것 같아 세상에 온 것이 저주가 아닌 가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잘 못된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내가 내 마음과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자아숭배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저주에 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저주에 떨어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주님의 은혜를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내 짐은 내가 져야 돼! 주님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하며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자들에게 평안이 있겠습니까? 좁은 길로 가는 주님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실족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맡길 짐은 내 인생의 짐이 아니라 죄의 짐입니다. 죄의 짐은 무엇입니까? 내가 주인 되어 나를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자아숭배입니다.
그 죄를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을 때 비로소 자유(평안)를 누리는 겁니다.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 자유와 구원을 쉼과 평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생은 나를 위해 사는 거라는 그 저주를 십자가에서 끊어내고 인생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거라는 창조의 질서와 생명을 회복하여 영적인 쉼과 평안과 자유와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짐이 싹 사라지는 것입니까? 구원 받으면 죄가 사라집니까? 미운 사람이 없어집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원 받기 전에는 지치고 곤고하여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갈 수 있는 즉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냐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을 알게 된 것이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완전한 안식에 대한 아주 강력한 소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이 그 안식을 세상에서 조금 맛을 보고는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환장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환장했는지는 믿음으로 산 (특별히 히브리서에서) 그리고 살고 있는 수많은 허다한 증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난 믿음은 그런 겁니다. 어중간하게 적당히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나를 섬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에 환장하는 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거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고난을 피하지 않고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해서 나를 낮추어 남을 높이고, 고난을 인내하고, 죄와 싸우며 정결하게 살고, 나를 미워하는 모욕하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그 능력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영광과 안식에 대한 소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식 즉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겁니다. 도저히 자기 정신으로는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지옥에 가더라도 내 마음대로, 내 뜻과 감정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겠습니까? 함께 안식을 누리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을 창조한 여섯 째 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 안식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와 함께 안식하자는 겁니다. 나와 함께 영원히 완전한 기쁨과 영광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게 싫습니까? 원치 않습니까? 그게 불만입니까? 좋으신 하나님의 그 선하신 뜻과 계획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나와 함께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하나님은 그래서 나를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세상에 온 게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이건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아멘? 그러나 그 축복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면 저주를 받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안식을 하게 되었습니까? 여섯 째날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바로 다음 날 안식한 것입니다. 사람의 안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사야 55장에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회개만 하면 의로운 자가 되어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정말 그 십자가를 믿으십니까? 그 십자가에서 내 죄가 대속되었음을 믿으십니까? 믿음으로 회개하고 거듭났습니까? 날마다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 만나보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것들이 심판대 앞에서도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자들은 주여 주여 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숭배하는 그 짐을 지고 가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 눈을 뽑고 손과 다리를 잘라내고라도 가지 말라고 하는 그 지옥에 가려고 합니까? 우리는 눈을 뽑고 손과 다리를 잘라내고라도 천국에 가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천국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나서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그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잠시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 인생에 매이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우리 모두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천국에서 만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