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좌랑(佐郞) 이공(李公)의 휘는 석규(碩揆)이고 자는 거공(鉅公)으로, 영의정 정숙공(貞肅公) 휘 성구(聖求)의 아들이다. 인조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에 오랑캐의 침략이 다급하여 정숙공은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공은 10세의 나이로 대부인을 따라 강화도로 피난했는데, 정축년(1637)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대부인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 이때 식구들이 혹은 적에게 사로잡히고 혹은 도망가고 혹은 죽었는데, 어린 공은 혼자 시신을 안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쳤다. 오랑캐가 시신을 끌어내 옷과 이불을 벗겨 가자 공이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슬피 부르짖으며 피 묻은 속옷을 달라고 빌자 오랑캐도 불쌍히 여겨서 주니, 공이 옷을 가슴에 품고 달아나서 형 참판공 당규(堂揆)와 남한산성 아래에서 만나 펼쳐 보고 부르짖다가 기절하였는데, 인조가 듣고 오랫동안 서글퍼하였다. 대부인의 성은 권씨(權氏)이고 관향은 안동(安東)이며,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권흔(權昕)의 따님으로, 훗날 국가에서 그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였다.
신사년(1641) 겨울에 정숙공이 다시 정승이 되어 조정에 들어갔다. 이때 오랑캐와 우리나라가 구경(九卿)은 모두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약조하여 정승의 아들도 인질로 가야 했는데, 승지공(承旨公) 동규(同揆)는 막 속환(贖還)된 터라 차마 다시 북쪽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고 참판공은 평소 병이 많았으므로 공이 청하여 아뢰기를 “제가 가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가 15세였으므로 정숙공이 불쌍해하면서도 기특하게 여겼다.
임오년(1642) 봄에 공이 심관(瀋館)에 인질로 갔다가 다음 해 가을에 비로소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심양은 다른 풍속의 외딴 나라인데, 공은 어린 나이에 곤란한 처지에 처해서도 자신을 단속하고 외물을 접함에 알맞게 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효종(孝宗)의 총애와 대우가 특별하여 공이 간혹 일로 인하여 풍자하는 뜻을 부치면, 번번이 낯빛을 고치고 술을 하사하였으니, 여러 수행원과 관료가 칭찬하고 기특하게 여기며 연배의 차이를 잊고 더불어 사귀었다. 이때 관외(關外)가 막 격파되자 진귀한 보물이 사방에 전파되어 심관에 같이 머무는 자 중에 손가락을 담그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듯이 지냈으며, 귀국한 뒤에도 행장에 북쪽 물건이 없어 정숙공이 매우 기뻐하였다.
갑신년(1644)에 정숙공의 상을 당하자, 상례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집행하였다. 이때 심기원(沈器遠)이 막 반란을 일으켜 인심이 흉흉하고 불안했는데, 오랑캐의 기마병이 이미 사현(沙峴)을 지났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도로에 피난민이 물 끓듯 하였다. 정숙공의 널이 바야흐로 빈소에 있는데도 공은 동요하지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그럴 리가 없다.” 하였는데, 나중에 과연 그러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공경(公卿)의 자제로서 일찍이 심양에 인질로 갔던 자는 으레 보직(補職)되었으나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애통함을 참으며 원수의 뜰에 갔던 것인데, 도리어 그것으로 관작을 구한다면 어떤 부끄러움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우뚝하게 장원을 했는데,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공을 내쳤으나 공은 태연히 원망하는 빛이 없었다. 이때부터 학업에 전념했는데, 《역(易)》을 더욱 좋아하여 글의 깊은 뜻을 사색하며 세월을 보냈으며, 한가할 때는 임천(林泉)에 자취를 남기니, 향리 사람들은 그 겸손함을 사랑하고 사우(士友)는 그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무술년(1658)에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에 제수되자 억지로 부임하였다. 임기가 찬 뒤에 의금부 도사로 옮겼다가 호조 좌랑으로 바뀌었다. 외직으로 나가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맡았는데,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 다스리니, 백성과 아전이 모두 떠받들었다.
병오년(1666, 현종7)에 관직을 버리기 위한 계책으로 임천(林川)의 농장에 돌아왔다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7월 5일이다. 향년은 40세이다. 공은 재능이 있으나 다 펴지 못했는데 하늘이 또한 수명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훗날 외아들이 숙종을 섬겼는데 고상한 문장과 맑은 의론으로 사류(士類)에게 추중을 받고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관찰사로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공의 배위인 민 숙인(閔淑人)을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하였다. 하늘의 도는 아마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처음에는 양주(楊州) 옹암(甕巖)에 장사 지냈다가, 훗날 통진(通津)의 산척산(山尺山) 계좌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선계(璿系 왕실의 계보)에서 태종(太宗)의 별자(別子)인 경녕군(敬寧君) 제간공(齊簡公) 휘 비(
)가 공의 7대조이다. 속적(屬籍)이 끝난 뒤에, 호가 국재(菊齋)이고 대사마(大司馬 병조 판서)를 지낸 휘가 희검(希儉)인 분이 있고, 호가 지봉(芝峯)이고 대총재(大冢宰 이조 판서)를 지낸 휘가 수광(睟光)인 분이 있는데, 두 분이 모두 상상(上相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실로 공의 증조와 조부이다.
민씨 부인의 관향은 여흥(驪興)이고, 호조 좌랑 민성복(閔聖復)의 따님이며,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의 당인(黨人)으로 호가 역헌(櫟軒)인 민기문(閔起文)의 4세손이다. 성품이 간결하고 부인의 덕을 잘 닦았으나 43세의 나이로 기유년(1669, 현종10) 3월 19일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 왼편에 합장하였다.
외아들 현조(玄祚)는 곧 관찰사이다. 5명의 사위는 참판 이담명(李聃命), 승지 박정(朴涏), 사서(司書) 성준(成儁), 감사 송정규(宋廷奎), 별검(別檢) 윤경제(尹景濟)이다.
관찰사는 후사가 없어 종질인 한보(漢輔)를 데려다 아들로 삼았으며, 측실 소생 아들은 한척(漢陟)이다.
한보의 세 아들은 덕주(德胄), 혜주(惠胄), 헌주(憲胄)이고, 두 딸은 사인(士人)에게 시집갔다. 외손 및 현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군자가 말하기를 “공이 모친의 시신을 안고 속적삼을 달라고 애걸하자 오랑캐가 다행히 공을 어린아이로 보고 죽이지 않았다. 공은 그가 죽이지 않을 것을 믿었을까? 자기가 죽을 것은 잊고 모친의 시신을 지켰으니, 법으로 볼 때 정표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효성은 정표함 당연한데 정표하지 않았고 / 孝則當旌旌不爲
학문 넉넉하여 벼슬했는데 벼슬 또한 낮았네 / 學優而仕仕又卑
수명이 요절을 면치 못해 참으로 탄식할 만하나 / 壽不免夭良足欷
아드님에게 드러났으니 하늘의 도 알겠네 / 發之令子天道知
선을 행함에 게을리하지 말고 이분을 볼지어다 / 爲善毋怠監于玆
[주-D001] 성구(聖求) : 이성구(李聖求, 1584~1644)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 시호는 정숙이다. 《東州集 文集 卷7 伯氏領議政分沙李公神道碑銘》[주-D002] 당규(堂揆) : 이당규(李堂揆, 1625~1684)로, 본관은 전주, 자는 기중(基仲), 호는 퇴촌(退村),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주-D003] 권흔(權昕) : 1568~1612. 본관은 안동, 자는 숙절(叔節)이다.[주-D004] 심관(瀋館) : 심양관(瀋陽館)이다.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삼정승과 육판서의 자제들이 심양에 인질로 갔을 때 머물던 처소 겸 집무소이다.[주-D005] 관외(關外) : 산해관(山海關) 이동(以東) 지역을 의미한다.[주-D006] 손가락을 담그지 : 얻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데 욕심 때문에 망녕되게 바라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정(鄭)나라 공자 자공(子公)이 자라 요리를 먹지 못하게 되자 자라 삶은 솥 속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그 손가락을 빨면서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宣公4年》[주-D007] 심기원(沈器遠) : ?~164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수지(遂之)이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644년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를 겸하게 되자, 이를 기화로 심복의 장사들을 호위대에 두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광주 부윤(廣州府尹) 권억(權澺)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하인 황헌(黃瀗), 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具仁垕)에게 밀고하여 거사 전에 죽음을 당하였다.[주-D008] 사현(沙峴) : 서울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던 고개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 漢城府 山川》[주-D009] 사마 양시(司馬兩試) : 생원시와 진사시를 말한다.[주-D010] 임천(林川) : 충남 부여군 임천면이다.[주-D011] 비(
) : 이비(李
, ?~1458)는 태종과 효빈(孝嬪) 김씨(金氏) 사이에 출생한 왕자이다. 자는 정숙(正淑), 시호는 제간이다.[주-D012] 속적(屬籍) : 왕실의 선원보(璿源譜)에 오르는 것이다.[주-D013] 희검(希儉) : 이희검(李希儉, 1516~1579)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경질(景質), 호는 동고(東皐)ㆍ국재이다.[주-D014] 수광(睟光) : 이수광(李睟光, 1563~1628)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15] 민기문(閔起文) : 1511~1574. 본관은 여흥, 자는 숙도(叔道), 호는 역암(櫟菴)이다.[주-D016] 현조(玄祚) : 이현조(李玄祚, 1654~1710)로, 본관은 전주, 자는 계상(啓商), 호는 경연당(景淵堂)이다.[주-D017] 한보(漢輔) : 이한보(李漢輔, 1675~1748)로, 본관은 전주, 자는 중호(仲皓), 호는 졸은(拙隱)이다. 생부는 이현량(李玄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