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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소견대로 행하는 삶은 망나니 칼춤>의 줄거리 :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의 결론입니다. 여기서 소견은 작은 의견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 소(所)'와 '볼 견(見)'을 써서, 글자 그대로는 '본바', 즉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생긴 자기 나름의 판단이나 견해를 의미합니다. 이런 소견을 따라 사는 삶은 망나니 칼춤의 삶입니다. 소견은 양날의 칼이라서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자기를 베고 내 주변의 사람을 벱니다. 지금 내가 칼춤을 추고 있는지를 알아채고 멈춰야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내 소견대로 행하는 칼춤의 삶
(사사기 21:1~25)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본문은 사사기 마지막 장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패색이 짙어지자 600명은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 외에는 베냐민 지파의 남자는 전멸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든 다시 살리려고 도망한 600명에게 화친을 전달하고 이들에게 배필을 정해주는 과정이 본문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25절에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베냐민 지파의 회생 절차와 묶어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다시 회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총회가 결단을 내리는 모습이 이 구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야 본문의 의도 속에 담긴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내 소견대로 행하는 칼춤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내 소견대로 행하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 칼춤을 추는 것이라는 의미의 제목입니다. 칼춤을 추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끊기고 베어지고 잘라 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소견대로 살 때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견은 언뜻 생각하기에 작은 의견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 소견에는’이라고 말하면 ‘저의 작은 뜻에는’이라는 의미로 나를 낮추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견이 그런 뜻이라면 본문에서 자기 소견에 대해 문제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자로 소견은 바 소(所)에 볼 견(見)을 씁니다. 바 소(所)는 ‘생각하는바, 뜻하는바, 기대하는 바’라고 할 때의 바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본 뒤에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이 소견(所見)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살펴본 바대로라면 이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여겨서 내놓는 생각이나 의견이 소견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제 소견에는 이번에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단순히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저 사람이 대체 누구이기에 자기 소견을 이야기하는가?’라고 여기는 것이 타당합니다. ‘자기가 앞뒤 전후를 살펴본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릴 그러한 자격이 있는가?’라는 반응이 소견이라는 단어에 어울립니다. 소견이라는 표현에서 겸손을 떠올리는 것은 오해임을 염두에 두고 사사기의 결론을 생각해 봅니다.
25절을 보면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왕이 없음이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지침을 내릴 외부의 절대적 권위나 기준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오직 각 사람이 자기 행동의 지침을 찾았습니다. 이는 곧 자기가 잘 살펴보고 나서, 자기 눈으로 보고 나서 떠오르는 생각대로 행동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아인(עַיִן)으로써 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부분을 직역하면 “자기 눈에 옳은 대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견(所見)이라는 단어가 보고 나서 나름대로 판단하여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임을 염두에 두자면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의견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고 좋고 나쁨을 판단합니다. 마음이 느끼는 대로 좋은 것은 추구하려 하고 나쁜 것은 피하려는 중에 의견과 생각이 떠오르고 의지와 뜻이 떠오르는 것이 소견입니다. 자기 눈으로 살피고 난 뒤에 갖게 되는 의견이나 생각이 소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눈으로 보면서 자식 문제의 전후 사정을 헤아리고 마음에 좋고 나쁨의 느낌을 받습니다. 그럴 때 좋음의 느낌을 따라서 추구하려 하고, 나쁨의 느낌을 따라서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소견을 따라 사는 모습입니다. 자녀에게 이래라저래라할 때도 좋음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나쁨을 피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기 소견대로 사는 모습인데 본문은 이것이 마치 칼춤을 추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부모가 자식과의 관계에서 소견을 따라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칼춤을 추게 되면 자식이 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 전반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소견을 따라 살면 칼춤을 추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나서 좋고 나쁨의 기분을 따라 생각과 의견을 갖고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칼을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소견이 무서운 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나 자신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들을 베어 버립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이란 칼춤을 추며 산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 베냐민 지파의 회생 절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베냐민 지파의 회생 절차는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 인식을 기준으로 바라볼 일은 아닙니다. 현시대의 윤리 의식이나 도덕관을 가지고 이 상황을 본다면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살아남은 베냐민 지파의 남자 600명에게 배필을 주려고 합니다. 총회의 장로들이 모여서 어떻게 배필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너무나 악한 기브아의 인간 말종들의 행위를 감싸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총회는 우리의 딸들을 베냐민 지파에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멸절할 정도로 악함이 곯아버린 사람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그들에게 딸을 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총회는 전쟁에서 이겨 베냐민 지파의 남녀노소를 멸절시켰고, 이제 남은 자들은 전쟁에 참여했다가 림몬 바위로 도망한 600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결과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가 지구상에서 없어지게 생겼습니다. 이제는 베냐민 지파의 악행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 중에 십이분의 일이 사라지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이 점에 착안하여 통탄하고 애곡하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냐민의 악행에 분노하여 이들을 멸절해야 마땅하다고 여겼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자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악행을 보면 멸절해 마땅한 대상이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 중에서 십이분의 일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며 통곡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베냐민의 악행을 보면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의도를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결실이 지구상에서 없어진다는 것에 착안하면서 통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사기의 결론이 제시하는 내용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긴 의도가 중단되거나 끊기거나 말살되는 상황에 대해서 너희도 안타까움을 갖고 있느냐?’라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 마지막 장에 담긴 내용입니다.
나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긴 의도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뜻과 계획을 받아들이면 내가 관계하는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미칩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계산에 넣으시고 뜻과 계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지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끊길 것을 생각하며 통곡하듯이, 나와 나를 통해 다른 대상에게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긴 의도가 끊기는 것에 대해 통곡하며 안타까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는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향해 갖고 계시는 뜻과 계획이 담긴 의도의 끊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사사기 마지막에는 특이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보존하기 위하여 이들이 아내를 구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현시대의 기준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주석들과 목사님들이 이 사건에 대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에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만 우리는 이 사건 속에 담긴 본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살아남은 남자가 600명이었기에 신부도 600명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총회의 인원을 다시 한번 점검합니다.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총회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다 죽일 것이라고 맹세했는데, 전쟁 당시에는 40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모였기에 정확히 누가 참석하고 안 했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전쟁이 끝난 후에 세세히 따져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요단강 동편 므낫세 반 지파에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에서는 야베스 길르앗에 12,000명의 군사를 파견해서 이들을 멸절시키고 남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은 처녀 400명을 구해옵니다. 그래서 이들을 남은 베냐민 지파 남자들에게 배필로 줍니다.
다만 아직 신부 200명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총회는 추가로 신부를 구할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막이 실로에 있을 때 실로의 처녀들은 장막절과 같은 명절에 춤을 추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3대 절기가 있는데 당시에는 신앙이 흐릿해졌기에 이러한 절기도 전국적인 규모로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남은 베냐민 남자 200명을 실로로 보냅니다. 그리고 실로의 처녀들이 장막절에 춤을 추기 위해 나왔을 때 밤에 이들을 보쌈하여 아내로 삼게 합니다. 졸지에 딸을 빼앗긴 가족들은 크게 항의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총회의 장로들이 상황을 설명하며 이들을 설득합니다.
쉽게 말해 ‘당신들이 은혜를 베풀어 달라.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 중에 십이분의 일이 없어질 판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냐민 지파에 딸을 주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했다. 그 맹세를 어길 수 없으니 베냐민 사람들이 나서서 여자를 보쌈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가 한 일이니 너희도 딸을 주지 않겠다는 서약을 어긴 것은 아니다. 베냐민 지파가 괘씸하더라도 이 땅에 선민을 두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아까워하는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갖길 바란다. 이들을 용납하고 사위로 삼기를 바란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그렇게 하여 남은 베냐민 지파의 남은 200명도 아내를 얻게 되고, 최종적으로 600쌍의 부부가 베냐민 지파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꺼져가는 하나님 의도의 불씨를 이스라엘 총회가 살려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사사기의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온 이스라엘은 통곡하는 마음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 순간에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관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냐민 지파의 회생을 계기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긴 의도가 끊어지는 일이 얼마나 통곡하고 애통해야 할 일인가를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가지라는 것으로 사사기의 마지막 메시지로 전달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아깝습니다. 건강이 아깝습니다. 승진이 아깝습니다. 형통이 아깝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아까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의 뜻만을 아까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 안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주권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준비하신 뜻만 있으면 그 뜻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삶의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출애굽과 광야 40년 생활로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잡고 있었을 뿐 이스라엘에는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초강대국 애굽의 권력 아래 있던 노예들의 해방은 모세나 아론이나 바로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출애굽이 모세의 뜻이었다면 엄청난 군사력을 동원해서 애굽을 쳐부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있었을 뿐인데 출애굽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한 250만 명은 광야에서 물도 음식도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하나님의 뜻만 있었습니다. 그 뜻 안에는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고, 날씨부터 하늘과 땅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고, 무엇이든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고 전설도 아닙니다. 2026년을 살고 있는 우리와 상관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까?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아버지가 주관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겐 적용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 순간이 없고, 그 뜻 안에는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는 나를 향한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백번 죽고 태어나도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백 명, 천 명, 만 명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자식 사랑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합니까? 이웃의 마음대로 되어야 합니까? 나를 사랑하는 부모나 가족들의 마음대로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는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고,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시고, 250만 명이 죽음의 땅 광야에서 40년을 살아갈 수 있는 전지전능하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계좌의 돈이 아깝습니까? 건강이 아깝습니까? 자식들의 성공과 형통이 그렇게 아깝습니까? 물건과 집이 아깝습니까? 집이 없고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뜻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그 뜻으로 사는 것이지 계좌에 있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식에 투자해서 얻는 이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것입니다. 건강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몸에 사탄의 가시로 별명 지어질 만큼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있는 병이라면 꼭 있어야 될 것이고 최선의 선물로서 그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담겨 있는 뜻 안에서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내 삶이 이끌려집니다. 그럴 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선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까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끊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와 기브아 사람들이 그랬듯이 눈으로 보는 것에 마음이 달라붙어서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빗나갔기에 땅에 머물러 있습니다. 뱀이 땅에 배를 붙이고 기어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백이기 때문에 좋음으로 채워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다니면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소견을 갖게 됩니다. 마음이 땅에 있으니까 눈으로 보는 것에 마음이 붙어서 좋고 나쁨을 느낍니다. 좋으면 추구하고 나쁘면 피하려고 합니다. 이로부터 생각과 의지와 뜻이 생깁니다. 이것이 소견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소견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바 갖고 계시는 생각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바 생각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내 소견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눈으로 보는 대상에 대해서 좋고 나쁨을 직접 느끼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대상과 나에 대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은 칼로 끊겨 나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끊는 모습은 마치 조선시대 망나니가 참수형 죄수들을 앉혀놓고 칼춤을 추는 것과 같습니다. 머리를 풀어 헤친 망나니가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춤을 춥니다. 입에 술을 머금었다가 칼에 뿜어대며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목을 잘라버립니다. 마음이 땅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을 빗나간 죄 속에서 썩은 입맛의 저주를 따르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죄와 저주 속에 있는 마음은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이렇듯 좋음을 느끼는 대로 추구하고 나쁨을 느끼는 대로 피하려는 소견을 따라 산다는 것은 칼춤을 추는 것과 같습니다. 나와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모든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사정없이 끊어내는 칼춤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결론입니다. 마음이 땅에 붙은 채로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 스스로 좋고 나쁨을 느낍니다. 좋음은 가지려 하고 나쁨은 피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 생각과 의견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나와 내가 마주하는 대상을 향하여 내려오는 하나님의 의도를 칼로 쳐내는 것입니다. ‘이 의도를 아까워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의 소견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라고 사사기는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그렇다면 이 칼춤을 막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악 된 칼춤에 칼부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칼부림을 당하신 십자가 죽음을 따라 칼춤을 추는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악 된 인간들의 칼부림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봄만이 내게서 소견을 따라 행하는 칼춤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마주할 때 눈으로는 배우자를 보되 마음은 눈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마음은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눈으로 보는 대상을 따라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나의 죄와 저주를 끊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칼춤을 추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끊어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끊을 것인가 나의 소견이라는 칼춤을 중단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대상 앞에서 내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억하면 내 칼춤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의도가 이어져 내려옵니다. 반대로 눈으로 보는 대상 앞에서 내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쳐버리면 마음이 직접 느끼는 좋음과 나쁨을 따라 소견대로 칼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나와 내가 보는 대상을 향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의도는 사정없이 끊겨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의견을 내느라 하나님의 의도를 끊을 것인지, 하나님의 의도가 너무나 아까워 나의 소견대로 사는 칼춤을 끊을 것인지 본문을 통해 너무나도 분명한 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올바른 답을 머리로만 깨닫지 않게 하시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그 답대로 실행에 옮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으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육체의 눈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의도가 이 땅에서 보존되어 열매 맺고 유지되는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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