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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이번 부천문학에 처음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무망루(無忘樓)에서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가 바르르 몸서리를 쳤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앉아 기말시험 문제를 추려내느라 집중하고 있던 참이어서 익숙한 그 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화면 좌측 상단에 문자가 왔다는 노란 표지가 떠 무심코 열었더니 생각지도 않던 빈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말은 유창하나 글은 서툴러 자꾸만 ‘오랫만’이라고 쓰던 걸 몇 번이나 ‘오랜만’이라 써야 한다고 가르쳐줘도 소용이 없던 빈이 다시 연락을 해오면서는 제대로 썼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연락이 없어 아예 포기했던, 그러나 언젠가는 연락을 해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 ‘오랜만’이 얼마동안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빈과 나 사이에 이 말을 쓰려면 그 기간이 보름 정도였을 때나 적합할 것이다. 거의 매주 만나다가 어쩌다 한 주를 빼먹고 만났을 때, 그런 경우에나 쓰곤 했으니. 그것도 앞에 ‘너무’까지 넣어서.
우린 이 년여를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 싫어 안 만난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빈이 소식을 끊고 잠적해버렸던 것. 그러니 오랜만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았다. 굳이 이 말을 쓰려면 앞에다가 ‘너무’라는 부사를 몇 번을 넣어야할지 모른다. 그런데다, 잘 지내셨어요? 라니?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는가. 꼭 놀리는 것만 같아 그렇게 말하는 입이, 아니 문자가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곧 그런 기분은 바로 밀려나버리고 반가움이 온몸으로 엄습해왔다. 나는 그만큼 빈이 간절했다. 쉽게 답장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 화면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동으로 꺼져 부리나케 화면을 켜고 서둘러 말했다. 아니 문자를 했다.
“어디?”
이렇게 묻는 데에는 중국이 아니냐는 뜻까지 함유하고 있었다. 급한 사정이 생겨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내게 말하기가 곤란하여 연락을 못했다는 변명이라도 하길 바라는 내 심중의 일단이었다. 설령 중국으로 갔을지라도 연락을 하기로 맘먹으면 왜 못할까 싶지만.
“이번 주 토요일 12시에 남한산성에서 봬요.”
내 물음과는 다르게 빈은 이렇게 일방적이다시피 한 약속을 정했다.
남한산성, 우리가 자주 갔던 곳이다. 별 생각 없이 가던 나보다는 빈이 특별하게 여기는. 남한산성이 카페도 아니고 찾기 쉬운 건물도 아닌 몇 개의 산봉우리에 걸쳐 성곽 둘레가 10km에 달하지만 만날 곳을 서로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한산성이라 하면 수어장대(守禦將臺) 옆에 있는 무망루(無忘樓)나 매바위를 지칭하므로.
“좋아.”
당장 만나고 싶었지만 빈의 주문에 따랐다. 왜 내게서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는지는, 그래서 속을 시커멓게 태웠는지는 만나보면 알 것이다. 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앞으로 넘겼다. 이 년 동안 내가 애를 태우며 보냈던 수많은 문자들이, 읽지 않아 의미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이던 문자들이, ‘1’자가 지워짐으로 해서 비로소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신 볼 수 없다는 건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라도 알고 싶다. 미안해하지 말고 다시 연락해.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하찮은 것이었나?
현정, 연옥 그리고 빈. 처음 만났을 때는 현정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원래 연옥이 본명이라던 빈. 연옥이라는 순박한 이름보다 현정이라는 이름이 훨씬 한국적이고 세련되게 보여 바꿨다던. 그렇지만 현정이나 연옥이라는 이름은 내 입에서 한 번도 부른 적도 쓴 적도 없이 그녀의 고향 하얼빈을 따 나는 그냥 빈이라 불렀다. 이또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사살된 곳으로 널리 알려진 북만주의 땅. 아사달이라 불리는 단군 왕검의 도읍지. 우리의 역사에 수없이 등장하여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여진족의 활동무대이자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의 근간이 된 곳이었다. 해방 전, 그녀의 아버지가 남한산성 안에 있는 마을에 살다가 먹고 살기 힘들어 인삼이라도 팔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아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정착해 살았다는. 그중의 막내가 빈이고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져 한국바람이 거세게 동포 사회를 뒤흔들자 잘사는 이나 못사는 이나 너도나도 일확천금의 한국행을 꿈꾸었을 때, 그때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서울에 사는 사촌과 어렵게 연락이 닿아 그 연줄로 오게 되었단다. 자신이 하던 간호사 일과 남편의 교사직도 때려치우고. 그러나 얼마 못 가 남편이 공사판에서 사고를 당하여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중국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아 온갖 궂은일을 4년간 하다가 귀국하여 허리를 쓰지 못하는 남편과 1년을 살고 다시 돌아온다는 여자가 빈이다. 한국에서 지내는 4년은 중국에서 지낼 1년을 위해 살고 중국에서의 1년은 한국의 4년을 위해 산다는 그녀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한국 남자였기에.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내가 담당하는 국사의 마지막 문제를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왕자로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임금의 자리에 등극해 북벌을 꾀하다,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효종의 통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현판이 무엇인가로 바꿨다. 정약용에 대한 문제를 냈다가 갑작스레 빈이 등장함으로 인해 사감이 작용한 것이다. 내고 보니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사회 분위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답은 빈과 만나게 될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옆에 있는 무망루. 현판은 원래는 수어장대 안에 있었는데 나중에 따로 그 옆에 비각을 세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다른 선생들은 다 퇴근하고 나만 홀로 남아 있었다. 아내의 임종을 지켰던 빈. 빈은 내게 뭐라 변명할 것인가. 그녀는 불치의 병을 앓던 아내의 마지막 6개월을 지킨 간병인이었다. 처음엔 중국동포란 것도 몰랐다. 그만큼 그녀는 중국동포들이 풍기는 특유의 이미지, 촌스러운 외모나 말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옅은 금발로 물들인 단발머리나 갸름한 얼굴에 우수가 깃든 표정은 오히려 한국여자들보다 더 현대적으로 보여서 처음 봤을 때 저런 여자가 어찌 간병인을 하나, 의아해하며 아내의 투병에 지쳐 있던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 정도였으니. 육 일 밤낮을 잠실의 한강변에 있는 병원의 아내 곁에 꼬박 붙어 있다가 토요일 밤에나 나와 교대하여 대림동의 언니들이 있다는 집으로 가서 일요일 밤이면 돌아오곤 했는데, 그런 그녀가 몇 개월이 흐르자 내게 간병인이기보다는 차츰 아내의 자리를 대신할 여자로 다가왔었다. 나도 그렇지만 나를 대하는 그녀의 눈길도 애틋했다. 병원에서 만나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나 병문안을 오는 친척들은 간병인 하나는 참 잘 만났다고 이구동성으로 마흔 살의 아내보다 두 살 어린 그녀를 칭찬했다. 그만큼 빈은 아내를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달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가는 아내 곁을 지켰다. 가서 쉬라 해도 스스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여동생이 병원을 찾아와 불치의 아내보다 빈이 안쓰럽다며 자기가 병상을 지킬 테니 하루라도 좀 쉬었다 오라 했을 때, 아내도 덩달아 나보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라고 자꾸 권해 나랑 함께 나왔고 내 차를 탔으며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찾았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다가 막상 병원 밖으로 나오자 표정까지 달라져 이왕 나왔으니 한번 꼭 가보고 싶다는 곳이 그곳이었다. 그동안 병원 밖에서 은밀하게 만나고 싶은 늑대심보 같은 맘이 내게 왜 없었겠는가마는 그럴 기회도 없었고 기회가 있다한들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최고의 이유였던 아내, 그 아내의 강권이 아이러니였다.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지라는 남한산성. 벚꽃은 이미 다 지고 새로 돋아난 잎이 무성해지는 오월이었다. 그때 알았다. 그녀 아버지의 고향이 그곳 산성마을이란 것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대목이었다. 백여 년 전만 해도 그곳에 민가가 천 호가 넘었다니까. 한국에 들어온 지 수년이 흘렀어도 여유가 없어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고.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막 걷기 시작했을 때 빈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 싶은 맘이 아무리 간절해도 그렇게 내가 먼저 다가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래도 될까, 하는 께름함이 없지 않았으나 솔직히 누가 알까, 그랬다. 아내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망정 우리는 즐거운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관리 사무소에 들러 안내책자를 받아 솜사탕을 먹으며 행궁 주변을 둘러보고 탐방 1코스를 따라 산을 오르는 우리는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빈은 아무 데서나 자라고도 그 지형에 어울려 한껏 가지를 뻗은 소나무들의 멋들어진 자태에 탄성을 금치 못했다. 남한산성의 진정한 주인은 소나무인 것 같았다. 그만큼 요소요소에 뿌리를 내려 건강하고 푸르렀으며 자유가 느껴졌다. 나무 하나하나, 거기에 머무는 바람과 그 바람에 다시 실리는 솔향과 솔향을 머금은 설렘과 그 설렘으로 피어올라 무궁한 하늘의 여백을 채우는 구름, 구름들. 자연의 여유를 보고 있으니 나의 고뇌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었다.
옹성이 있는 연주봉에서 바라본 서울은 미궁 속 사바를 대변하는 것처럼 뿌유스름했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환한 얼굴이 된 빈은 잘 보이지도 않는 한강변을 가리키며 병원이 저기쯤 있을 거라고 손을 들어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자 아내의 처연했던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가. 빈의 사정은 아내를 통해 대강 알고 있었다. 중국에 있는 남편이 불구가 되었다는 것, 딸 하나가 있는데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려하는 자폐증세가 있다는 것, 그 딸의 자폐가 부부의 한국행을 결심하게 했다는 것, 번 돈 거의 다 보낸다는 것 등. 아내를 떠올린 나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던가, 빈은 내 뒤로 돌아가 팔을 둘러 나를 감싸 안고 뒷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팔짱이 이렇게 진화한다. 힘드시죠? 내 등짝에선 그녀의 젖가슴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순간 아찔해진 내 말도 같았다. 힘들지요?
서문을 거쳐 수어장대에 올랐다. 빈은 나보다도 더 꼼꼼히 책자에 나온 설명을 보고 유적을 살폈다. 산성 축조 당시 동남쪽을 맡았던 이회가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공사비를 추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 부인마저 그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나중에 모함이란 게 밝혀져 그들의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건립해 초상을 모셨다는 사당, 청량당에서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짓기도 했다.
남한산성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는 수어장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이층누각이 세월이 흘러 바라보는 능동적인 역할에서 바라보이는 수동적인 역할로 그 목적을 달리한 채 나긋한 봄바람을 맞으며 늠름하게 서있었다. 성안에 남아 있는 건축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는데 나의 눈높이로 단청 색깔이 화려하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웅장하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하긴 남한산성 건축물 중이라 한정했으니 그럴 만하기는 했다.
빈은 수어장대보다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걸린 비각에 오래 머물렀다. 자신의 처지가 비감해서였을까. 잊지 말자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울컥하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임금이었던 인조가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게 침략을 당하여 도성을 버리고 이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티다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오랑캐라 멸시했던 적장에게 잘못했노라고, 앞으로는 명(明)을 버리고 청(淸)을 섬기겠노라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이마를 땅바닥에 찧는 짓을 세 차례나 되풀이했다는(三拜九叩頭) 저 삼전도의 굴욕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영조의 다짐이 이제 우리 민족의 영원한 다짐이 되었을까. 남한산성 하면 떠오르게 되는 한의 근원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무망루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나도 선생님과 언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이 말은 아내와의 영영 이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만큼 아내의 병세는 심각했다. 오늘 당장 숨이 멈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그것은 빈과의 이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과 아줌마였다. 내가 학교 선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고 아내는 그녀를 현정 씨라 불렀지만 나는 그렇게 부를 수 없어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간병인을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나도 못 잊을 거요.”
내 말이 목적어를 잃고 비틀거렸다. 왜 그런지 병원에서처럼 아줌마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 나와 청소 일이며 식당 설거지, 여러 사람 간병도 하고 그랬지만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았거든요. 저 현판이 어떤 연유로 지어졌든 간에 저에겐 간절하게 다가왔어요.”
마음이 짠해왔다. 빈이 지금까지 어떤 대접을 받았기에 남과 별로 다를 게 없이 대해주는 우리에게 감격했다는 말인가. 원한이 서린 다짐일 수밖에 없던 무망루가 갑자기 신뢰가 어린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무망루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무망루 앞에 매바위가 있다. 바위 자체로 담장이 되는, 얼른 알아보긴 힘드나 한자로 수어장대가 분명하게 음각된, 나라에서 받은 공사비를 주색잡기로 탕진하느라 공사를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모함을 받은 이회가 참수 당하기에 앞서 하늘을 쳐다보며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진짜로 죄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그가 절명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구슬피 울다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전하는 바위였다. 나중에야 매사를 철저하게 점검을 하느라 공사가 늦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전체 성벽 공사 중에 그가 맡은 구간이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아 누명이 벗겨졌단다.
“저기 좀 보세요!”
그때까지 팔짱을 풀지 않고 이회의 사연을 책자에서 보고 심상치 않게 매바위를 살피던 빈이 담장 너머 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였다. 이제 막 가녀린 이파리를 피워 올리기 시작한.
“저런 데서도 나무가 자라다니요?”
수어장대가 있는 쪽은 바위가 갈라진 곳이 없는데 담장 너머 비탈진 곳으로 뻗어 내린 쪽이 갈라져 그 틈에서 각박한 자신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뒤틀린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바위에 붙은 뿌리 부분은 울퉁불퉁하게 엄청 굵었으나 위로 갈수록 급격히 줄기가 가늘어진.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 뿌리에서 빨아들이는 영양분만큼만 거두겠다는 듯 일부러 그렇게 기르는 분재처럼 가지와 잎은 빈약했다. 우린 자세히 보기 위해 담장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게! 상수리나무네요.”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를 보는 건 어느 산에서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빈의 기분에 맞춰주려 일부러 탄성을 질렀다. 도토리가 열리는 상수리나무였다. 잎과 껍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서울로 진격하는 왜군을 피해 급박한 피난길에 올라 변변한 먹을거리마저 없어 도토리가 선조의 밥상에 올랐다 해서 상수라나무라 부르다가 세월이 흘러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얘기를 해주려 빈을 쳐다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러는가.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하고 뭉클해져 얼굴을 돌렸다. 손수건이라도 있었으면… 짐작이 갔다. 자신의 신세가 나무와 닮았다고 느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어휴, 참.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맨손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풀었던 팔짱을 다시 끼며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를 이해하실까 모르겠어요.”
우린 수어장대의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빈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같은 민족이면서 중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국인이 되지 못하고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처지. 중국에서 살지만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무늬만 중국인이지 그 땅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머물러야만 하는 현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인삼보따리를 들고 만주를 찾았건만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낯선 땅에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결국 소망하던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이역에서 숨을 거두고 만 사연. 만약 아버지가 한국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자신이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저 나무 씨앗이 바위틈에 떨어지고 싶어 떨어졌겠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떨어졌을 것 아니에요. 그때 만약 바람이 더 세게 불었거나 아예 불지 않았거나 했더라면 아마 땅에 떨어졌겠지요. 그래서 좋은 영양분을 흡수해서 다른 나무와 똑같이 잘 자랐을 거고. 똑같은 도토리인데도 어디에서 싹을 틔우느냐에 따라 나무의 모습이 달라져요. 우리도 중국에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조선족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사람들은 그걸 흔히 운명이라 하지요. 너의 운명이다. 그런데도 여기 한국 사람들은 왜 거기에서 태어났느냐고 우리에게 뭐라 하는 거예요. 운명은 개척하기 나름이다, 그러면서도 거기 살지 뭐 하러 한국까지 오느냐는 거예요. 바위틈에서라도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데 왜 하필이면 거기에 뿌리를 내렸느냐고 하는 거랑 똑같아요.”
내 마음속에도 그런 야유가 분명히 있었다. 빈은 아니라 해도 금방 표가 나는 동포들을 보면. 동포들이 밀집해서 산다는 곳에서 유난히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두고도. 설령 중국에서 온 동포인 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느낌이 왜 생기겠는가.
“우리 보고 여기 사람들이 툭하면 그러잖아요. 그냥저냥 중국에서 살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한국에 나와서 괄시받으며 이 고생이냐고.”
나도 분명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내에게 빈이 중국에서 간호사로 일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건 나무 보고 뭣 때문에 남쪽으로 가지를 뻗느냐고 말하는 거랑 똑같아요.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받으려고 하는 나무로서의 본능이잖아요. 그런 나무의 본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주의 본질이자 질서일 수 있어요. 우리보고 왜 한국에 나왔느냐. 저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살아남으려고 왔어요. 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요. 그걸 뭐라 할 수 있어요?”
중국에서 간호사를 할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한들 그녀의 현실은 아내의 간병인에 불과했다. 그녀의 외모로 인하여 그녀를 보는 내 눈이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그녀는 중국인이고 조선족이라는 데엔 변함이 없었다. 내 의식수준이 대학을 나오고 고등학교 선생으로서 더군다나 한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역사인식에 깊이가 있고 객관적이라 할지라도 내 의식 저편에선 무의식에 가까운 차별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내 의식이 이기를 좇게 마련인 인간 본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차별의 보편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녀의 상수리나무를 빗댄 깊이 있는 항변은 나를 미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할 말이 없네요.”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이나 아프신 언니 같은 분들만 계시다면 그런 말이 왜 나오겠어요. 다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고요. 우리로 인해 피해를 본다 생각하니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반대로 우릴 동정해서 그럴 수도 있고요. 여길 와서 보니 참 여러 가지로 감개무량해지네요. 그래서 괜히 투정부려 본 거예요. 아버지가 저 아래 성안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아요. 저 옛날 제 고향땅에 살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고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도요. 그리고 오늘날 그 땅에 살던 제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해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것도 아이러니하고요.”
인간사의 행과 불운이나 역사에서 명암이 교차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남한산성은 무망루가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사의 불행과 같이 역사의 어두운 시간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일 수 있었다. 우리는 성곽을 따라 지화문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남문을 거쳐 주차장 부근으로 내려왔다. 점심때였다.
“집사람이 맛있는 거 사주라 했는데?”
“그래요, 맛있는 거 사 주세요.”
빈은 팔짱 낀 내 팔을 더욱 가슴에 밀착시켜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우린 근처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갖은 나물로 상차림을 한 산채정식을 먹으며 마신 술이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동병상련의 심정이 통하여 서로를 더욱 가깝게 여기게 됐을까. 식당을 나왔을 때는 빈의 어깨를 내가 안고 그녀의 팔은 내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금방 마음이 일치했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해선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병원으로 가기 위해선 술 냄새가 완전히 가셔야 한다는 것에 대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는 서로의 간절함을, 그것이 무엇인지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우리에게 돌을 던질 자가 많다한들 우리를 변명할 구실도 많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우리 안의 도덕과 윤리도 그 순간에는 우리를 제어할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모텔로 향했다. 우리의 시작이었다.
그런 지 며칠 후 아내는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나보다 세 살이 적은 마흔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시기가 문제지 예상한 결과였다. 나보다도 더 빈이 슬퍼했다. 우린 시간을 잠재우는 우리만의 의식을 치렀다. 그 의식도 우리를 위무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간 사람은 간 사람이었다. 우린 빈이 다른 환자를 돌보게 되었어도 새로운 관계가 되어 새로운 만남을 이어갔다. 내가 빈이라 부르기 시작한 게 그 즈음이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주말이면 꼭 만났고 한풀이하듯이 굶주렸던 열망을 다스렸다. 빈의 남편이 성적으로도 불구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도 우린 서로의 처지를 존중했다. 하여 그녀에게 내 집에서 함께 살기를 종용하지 않았고 그녀도 내게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아내의 투병으로 인해 나의 경제가 그리 넉넉한 편은 되지 못하지만 그녀의 형편을 고려해 용돈을 주려했으나 화를 내는 통에 오히려 내가 무안했고 선물 같은 것도 비싼 건 아예 받으려하질 않았다. 우리의 연애에는 동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선의의 정리마저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기의 계산이나 얄팍한 꼼수 같은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내 욕심 같으면 그녀가 짐만 되는 중국의 남편과 이혼하고 나와 결합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걸 요구할 정도로 내 윤리(엄연한 불륜을 저지르면서 윤리를 논한다는 게 얼토당토않지만)가 형편없진 않았다. 나와 결혼하게 되면 아무래도 고생을 덜하고 몇 년에 한 번씩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진다는 걸 빈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의 이혼이 선행돼야만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녀도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몸이 성치 않는 남편을 버리고 나와 합칠 만큼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빈이 그런 식으로 해서 나와 합치기를 원했다면 내가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에 남한산성은 우리 사랑의 성지가 되어갔다. 처음 갔던 1코스뿐만 아니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땐 숭렬전과 국청사, 서문을 돌아 수어장대에 들렀다가 남문으로 가지 않고 바로 내려오는 2코스를 택했고 여유가 있을 땐 현절사와 장경사 및 망월사를 도는 코스를 택하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성곽 전체를 따라 도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들른 곳은 우리가 맨 처음 갔을 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수어장대였다. 특히 빈은 무망루와 매바위의 상수리나무에 애정을 쏟았다. 비각 앞에 들꽃을 놓아둘 때도 있었고, 매바위의 상수리나무가 우리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며 그 바위틈에서 꿋꿋이 견뎌냈을지라도, 그래서 굳건히 뿌리를 내려 이제 와서 잘못될 리도 없건만 뜨거운 여름날엔 꼭 물병을 챙겨가 물을 부어주기도 하고 심지어 꽃집에서 영양제를 사 바위 사이에 꽂아두기도 했다.
가을엔 그 나무에 도토리가 열렸다. 딱 두 알. 나무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다 익을 무렵 빈은 다람쥐가 채가기 전에 심어야 한다며 담장 바깥으로 돌아가 도토리를 땄고 바위 사이가 아닌 바위 밑 낙엽이 썩어 기름진 흙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묻었다. 하나는 내 나무고 또 하나는 자기 나무라며. 그리고 이듬해 봄 중국으로 돌아갔다. 법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시켰고 어쩔 수 없는 그 기간이 오히려 불구의 남편과 딸에 대한 그녀 나름의 예의의 시간이 되었다.
그녀가 없는 1년은 내게 허전함을 넘어 무력감마저 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빈이 그리워 남한산성을 혼자 돌기도 하고 그녀가 한 것처럼 상수리나무를 돌보기도 했다. 우리가 심어놓은 도토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곳에 갈 때마다 나는 매바위 밑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없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 됐어도 싹은커녕 비슷하게 여길만한 새끼나무도 그 바위 부근엔 나지 않았다. 빈이 알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우리 사랑의 전조로 여기지는 않을까. 불길했다. 그리하여 나는 모종삽을 들고 가 우리가 심은 도토리가 싹을 틔운 것처럼 여기도록 다른 곳에서 그 해에 나왔을 거라 짐작되는 묘목을 뿌리가 다치지 않게끔 흙까지 고스란히 떠서 그 자리에 심었다. 나의 정성에 감복했던지 묘목은 그대로 잘 자랐다. 나중에 빈이 볼 걸 대비하여 나뭇가지를 잘라 동그랗게 울타리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빈을 향한 나의 정성은 그렇게 지극했다. 그러한 나의 행위는 나만의 제의이자 주술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했다. 하여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하얼빈과 가까운 길림성 장춘으로 가 열흘 가량을 빈과 함께 보내며 주변을 관광하고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빈은 행복해했다. 남편에게는 뭐라 하고 내게 왔는지는 나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남편에 대한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장춘은 하얼빈에서 기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다음해에 빈은 다시 왔다. 우리는 예전처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만났고 남한산성을 내 집 드나들 듯 찾곤 했으며 바위틈의 상수리나무를 돌보고 그 새끼라 믿은 묘목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빈이 그 묘목을 보고 감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산성 밖으로 범위를 넓혀 등산로를 따라 수어장대를 거쳐 남한산성 입구까지 걷기도 하고 다른 날에는 역으로 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또 하나 사랑의 성지를 만들었다. 영장산을 올라 갈마치고개에서 이배재고개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소나무 연리지였다. 수령이 30년이라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신기하게도 가지끼리 붙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가 되기까지 두 그루의 나무가 쏟았을 공력이 눈물겨웠다. 부딪치고 또 부딪쳤을 것이다. 비벼대고 또 비벼댔을 것이다. 상처가 나고 그 상처가 난 자리에서 내가 즙을 내고 너도 즙을 냈을 것이다. 마침내 즙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받아먹는 나도 달고 너도 달았을 것이다. 마침내 상처가 아물고 즙의 교환은 계속 이어져 마침내 한 몸이 되었다. 물론 그러기까지엔 바람이 무시로 불어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기까지의 절묘함! 그 기막힌 인연이 우리를 상징하는 듯했다. 나무들도 좁은 공간에서 자라게 되면 서로 햇빛과 영양분을 두고 경쟁을 하기 마련이고 싸움에서 진 나무는 죽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는데 이 두 그루의 소나무는 사이좋게 손을 맞잡은 형상이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주변의 다른 나무들보다 더 잘 자라고 있다니 연인들의 소망인 사랑으로 인한 상생의 본보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듯 울타리를 쳐놓고 보호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연리지 사랑의 자물쇠’라는 팻말과 함께 철망을 설치하여 자물통을 걸을 수 있게 해놓았다. 조금은 유치해 보여도 우리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그 다음 주에 바로 자물통을 걸고는 거기에서 한참 떨어진 무망루까지 와 우리 사랑이 영원히 변치 말기를 바라는 새끼손가락 언약식을 한 후 매바위 밑 숲으로 다신 찾을 수 없게 열쇠를 던졌다.
우리는 통화보다는 카카오톡 문자로 소통하는 걸 선호했다. 그해 겨울,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 서정을 놓칠 우리가 아니었다. 바로 빈에게 문자를 보냈다.
“눈이 오는데 가만있을 수 없잖아?”
그런데 답장이 없었다. 금방금방 오곤 하던 답장이 눈이 그치고도 오지 않아 전화기를 켜보니 읽지도 않은 상태였다.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웬일일까? 그때부터 얼마나 전화를 해댔는지.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리라곤 전혀 생각을 못했으니.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겨울이 다 가도록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일은 없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읽지도 않는 문자를 보내고 또 보내고. 숱하게 내려줬던 대림역 근처 성모병원 부근에 차를 끌고 가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탓했다. 빈이 언니들과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사는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조차 알지 못하다니, 그제야 얼마나 내가 빈에게 무심했던가, 후회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중엔 대림동에 나도 모르게 향할 때마다 내가 왜 그곳에 가는지 한심하게 여겨졌다. 혹시나 빈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어림도 없는데, 어림도 없으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나는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가곤했다. 그만큼 숨이 막히도록 빈이 그리웠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들숨날숨 한 번씩 날 때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빈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빈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하얼빈으로 날아갔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았으니. 흑룡강성의 성도, 송화강이 인접해 흐르는 만주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공항은 아담했다. 리무진을 타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호텔에 들었고 3일 동안 눈에 덮인 하얼빈시내 곳곳을 누볐다.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돔 모양의 지붕을 한 아이보리, 연두색 등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유럽풍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기차역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관람하고 중앙로를 따라 박물관과 얼통공원과 성소피아 성당을 거쳐 스탈린공원까지 걸었다. 잿빛 하늘 아래 우뚝 솟은 고동색 벽돌과 초록색 돔 지붕, 황금빛 십자가가 어우러진 성소피아 성당은 동화 속 궁전처럼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빈은 없는데 내 머릿속은 온통 빈으로 가득이었다. 그런 하얼빈은 추웠다. 지독히도 추웠다. 그곳에서 돌아오는 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여기까진가 보다. 이젠 잊어야 하는가 보다. 그런 화두로 또 1년을 보내고 있었다. 빈과의 관계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술친구이며 수학을 가르치는 김 선생은 여자는 여자로 잊어야 한다며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선생을 물색하고 있었다. 아내를 대신하여 빈이 왔듯이 빈을 대신하는, 가슴 설레게 하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참에 빈으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다.
토요일을 기다리는 이틀간은 다시 만나게 되는 빈과 어떻게 보낼까하는 생각으로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빈의 집도, 언니도 억지를 써서라도 알아두리라 맘을 먹었다. 또한 빈이 거절해도 남편의 약값이라도 하라고 도와줄 방도를 찾아보리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다른 뜻은 없었다. 빈의 고통을, 빈을 만나지 못하는 나의 고통을 덜 수 있으리라는 생각 외엔.
일찌감치 집을 나서 눈을 맞아 지저분해진 차 안팎을 세차장에서 닦고 거의 1년 만에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며칠 있으면 방학이었다. 만약 빈이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며칠이라도 따뜻한 제주도에 다녀왔으면 싶었다. 왜 연락을 안 했느냐고 따지지 말자. 빈이 그럴 때는 내게 얘기하기 힘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예전과 같이 주차장에 차를 두고 가장 빠른 길인 무기제작소였다는 침괘정을 지나 취성암을 거쳐 수어장대에 올랐다. 열두시가 되려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빈은 어떻게 오려나. 오는 데 불편할 것을 고려하여 같이 가자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산성역에서 오는 버스가 있다는 건 알고 있으리라.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산 여기저기에 쌓여있었다. 토요일이고 그리 춥지는 않은 날씨지만 등산객은 많지 않고 한산했다. 청량당은 언제나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음울하기도 해 이회와 부인의 원혼을 달래는 무당의 공수가 아직도 주변을 떠돌며 맴도는 것 같았다.
무망루 앞에 섰다. 올 봄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의 단원고 학생들이 배가 침몰하면서 무더기로 바다에 수장되었다. 배의 위기상황에서 먼저 승객의 안전을 도모해야할 선장과 승무원들은 팬티 바람으로 탈출하기에 바빴다. 더 많은 승객들이 구조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우왕좌왕하고 선박회사나 당국의 대응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국민들은 그 속수무책을 두 눈 벌겋게 뜨고 바라봐야만 했다. 그 속수무책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국민들의 공분이 있었다. 그러면서 ‘잊지 않겠습니다’를 뜻하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짐했다. 그러나 배의 침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불황의 골이 깊어지자 그 탓이 세월호에 있는 양 여론을 호도하는 세력이 생기고, 사건을 끝까지 규명하자는 유족을 험담하는 유언비어까지 난무하기 시작했다. 왜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구할 수 있었던 생명들이 왜 수장될 수밖에 없었는지, 책임의 소재는 어디까지인지, 그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한 채 진실도 수장될 위기에 처하고, 그 안타까운 참사가, 절대로 잊지 않겠다던 다짐이, 서서히 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 실정인 것이다. 이렇게 무망루의 다짐은 언제까지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될 것인지.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수십만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끌려간 여성들은 성노리개감이 되었고. 그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본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그 여성들이 돌아오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힌 화냥년이라 능멸했다. 속수무책이 속수무책을! 그리고 270년 뒤 그 치욕을 잊지 말자던 무망루의 정신은 어디로 가버리고 조선은 망했다. 말로만 무망루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도 정작 잊고 있었다. 매바위 밑에 심은 상수리묘목을. 매바위로 다가가다 상수리나무를 쳐다보는 순간이 돼서야 어찌 됐을까 궁금해졌던 것이다. 아직도 시간은 충분했다.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나와 담장을 따라 바위 밑으로 갔다. 아, 씩씩했다. 두 그루 다. 언젠가 내가 나뭇가지로 만든 울타리도 조금 삭아 내리긴 했지만 형태를 유지한 채 그대로였다. 많이 컸다. 줄기도 많이 뻗고. 좋은 징조였다. 빈과 만난다는 즐거움 뒤에 숨어 있다가 불뚝불뚝 튀어나오는 불길한 생각들이 저만치 사라지는 듯했다. 이쯤에서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해요나 우린 만나선 안 될 사람들이었어요, 같은.
다시 무망루 앞으로 갔다. 한 여자가 모자까지 딸린 두툼한 파커를 입은 채 다소곳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빈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를 보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 선생님 아니세요?”
내가 영문을 몰라 왜 그러느냐는 식으로 빤히 쳐다봤다.
“임연옥이를 아시지요? 선생님께서 빈이라고 하신다는.”
빈을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전혀 다른 인물의 등장에 나는 당황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제가 한이엽입니다.”
“저 연옥이 언니예요.”
빈과는 체형도 생김새도 닮은 데가 없었다. 아니 빈과는 달라도 중국동포와 비슷한 데가 있긴 있었다. 특유의 억양과 왠지 유행과는 거리가 먼 차림새. 그때 멀리 달아났던 불길한 생각이 툭 불거져 나왔다. 나는 긴장했다.
“죄송한데요, 제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빈이 아니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연옥인 지금 중국에 있어요. 걔가 진즉에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라고 했지만 못하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우리 제부가 어서 죽기만 바랐거든요.”
죽기를 바랐다? 마땅히 앉을 만한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산을 내려가 찻집이라도 들어가서 차분하게 앉아 들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나는 한시바삐 빈의 소식을 듣고 싶었으니. 언니도 서서 얘기하는 걸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나와 빈이 사귀는 걸 벌써부터 알았단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된 남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왕 그렇게 된 것, 빈이라도 행복해지길 바라고 불장난이 됐든 진정한 사랑이 됐든 기꺼이 환영하며 박수를 쳤다고. 그리고 계속해서 지켜보니 순간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더란다. 그리하여 나를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단다.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니라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심정으로. 어차피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만 남편에게 내가 어느 정도 보상만 할 수 있다면 이혼하게 해서 우리가 합치도록 도와주겠노라는. 그런데 빈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더란다. 만약 언니가 그런 일로 나를 만나게 된다면 나와의 관계마저 바로 끝내겠다며. 그래서 선택한 게 자신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 빈도 모르게 남편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자존심을 생각하여 내 얘기는 하지 않고 빈을 이제 놓아주었으면 한다고. 그랬더니 순순히 그러자고 하더란다. 자신도 충분히 알고 있다며. 그 결과가 음독일 줄이야. 빈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였다.
“사람 목숨이 질기긴 질긴 모양이에요. 딸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실려 가 겨우 살긴 살았는데… 천벌을 받을 말인 줄 모르겠지만 서로를 위해 그때 죽었어야 했어요. 식도가 녹아내려서 밥도 못 먹거든요. 그래서 곧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관을 삽입해서 아직까지도 살아있어요. 여러 사람 못할 일 시키는 거예요.”
그녀는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정신이 아뜩해져 있었다. 내가 그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빈과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그는 한국에 가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갖은 공상에 시달렸을 것이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기 마련인 불륜의 모습들. 아내라고 별 수 있으랴. 아내를 믿고 싶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는 아내가 수도 없이 그려졌을 것이고. 그러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몇 번이나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냥 콱 죽었으면 싶었으리라. 그러나 막상 죽으려니 너무 원통하고, 살아있자니 짐인데다 불구의 인생이고.
“연옥이가 엊그제 또 전화가 와서 그러는 거예요. 제발 선생님께 말을 좀 해달라고. 늦으면 늦을수록 선생님께 죄를 짓는 거라고요. 차마 자신이 직접 말하진 못하겠다고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란다고. 그게 진심일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저도 이제 지쳤어요. 이 전화도 이제 해지할 거예요. 바로 걔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남편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
“지금도 오늘 내일 하는가 봐요. 눈만 떠있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요.”
“생활은 어떻게 하고요?”
“물론 어렵지요. 온 집안이 다 거덜 난 상태예요.”
무거운 짐이 가슴을 콱 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가 죄인입니다.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무슨 죄가 있어요. 우리 연옥이 사랑한 죄밖에 더 있어요? 이제 그 마음도 거두세요. 좋은 사람 만나세요. 그게 연옥이 바람이에요.”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렇겠지만 세월이 약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곧 내려갈 태세였다. 이렇게 보내선 안 된다. 언뜻 떠오른 게 빈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내려가서 식사라도 같이 하시지요?”
“아니에요. 이제 저도 솔직히 홀가분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뵙고 나니까 선생님이 아까워 죽겠지만요. 우리 연옥이가 여기서 선생님을 자주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이 앞에서 사랑의 맹세도 했다고요. 걔 복이 딱 거기까진가 봐요. 저도 아버지 고향이 여기라는데도 오늘 처음 와 봤어요.”
나는 그럼 계좌라도 적어주고 가길 부탁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 같다고. 그러나 그녀는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여기 한국 사람들은요, 우리가 돈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한다고들 그러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부담 드리려고 만나자는 것 아니었어요. 연옥이 잊으시라고 만나자는 거였어요. 전화로 해도 되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고 저도 여기 남한산성에 꼭 와보고 싶었거든요.”
돈으로 마음의 부담을 줄이려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전화번호라도 알려주길 청했으나 그녀는 그마저 거절했다. 우리들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또 만나지지 않겠느냐면서. 그녀는 돌아섰다. 나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무망루 앞에서 한 나의 다짐이었다. 빈을 기다리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102매)
무망루(無忘樓)에서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가 바르르 몸서리를 쳤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앉아 기말시험 문제를 추려내느라 집중하고 있던 참이어서 익숙한 그 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화면 좌측 상단에 문자가 왔다는 노란 표지가 떠 무심코 열었더니 생각지도 않던 빈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말은 유창하나 글은 서툴러 자꾸만 ‘오랫만’이라고 쓰던 걸 몇 번이나 ‘오랜만’이라 써야 한다고 가르쳐줘도 소용이 없던 빈이 다시 연락을 해오면서는 제대로 썼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연락이 없어 아예 포기했던, 그러나 언젠가는 연락을 해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 ‘오랜만’이 얼마동안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빈과 나 사이에 이 말을 쓰려면 그 기간이 보름 정도였을 때나 적합할 것이다. 거의 매주 만나다가 어쩌다 한 주를 빼먹고 만났을 때, 그런 경우에나 쓰곤 했으니. 그것도 앞에 ‘너무’까지 넣어서.
우린 이 년여를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 싫어 안 만난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빈이 소식을 끊고 잠적해버렸던 것. 그러니 오랜만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았다. 굳이 이 말을 쓰려면 앞에다가 ‘너무’라는 부사를 몇 번을 넣어야할지 모른다. 그런데다, 잘 지내셨어요? 라니?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는가. 꼭 놀리는 것만 같아 그렇게 말하는 입이, 아니 문자가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곧 그런 기분은 바로 밀려나버리고 반가움이 온몸으로 엄습해왔다. 나는 그만큼 빈이 간절했다. 쉽게 답장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 화면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동으로 꺼져 부리나케 화면을 켜고 서둘러 말했다. 아니 문자를 했다.
“어디?”
이렇게 묻는 데에는 중국이 아니냐는 뜻까지 함유하고 있었다. 급한 사정이 생겨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내게 말하기가 곤란하여 연락을 못했다는 변명이라도 하길 바라는 내 심중의 일단이었다. 설령 중국으로 갔을지라도 연락을 하기로 맘먹으면 왜 못할까 싶지만.
“이번 주 토요일 12시에 남한산성에서 봬요.”
내 물음과는 다르게 빈은 이렇게 일방적이다시피 한 약속을 정했다.
남한산성, 우리가 자주 갔던 곳이다. 별 생각 없이 가던 나보다는 빈이 특별하게 여기는. 남한산성이 카페도 아니고 찾기 쉬운 건물도 아닌 몇 개의 산봉우리에 걸쳐 성곽 둘레가 10km에 달하지만 만날 곳을 서로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한산성이라 하면 수어장대(守禦將臺) 옆에 있는 무망루(無忘樓)나 매바위를 지칭하므로.
“좋아.”
당장 만나고 싶었지만 빈의 주문에 따랐다. 왜 내게서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는지는, 그래서 속을 시커멓게 태웠는지는 만나보면 알 것이다. 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앞으로 넘겼다. 이 년 동안 내가 애를 태우며 보냈던 수많은 문자들이, 읽지 않아 의미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이던 문자들이, ‘1’자가 지워짐으로 해서 비로소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신 볼 수 없다는 건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라도 알고 싶다. 미안해하지 말고 다시 연락해.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하찮은 것이었나?
현정, 연옥 그리고 빈. 처음 만났을 때는 현정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원래 연옥이 본명이라던 빈. 연옥이라는 순박한 이름보다 현정이라는 이름이 훨씬 한국적이고 세련되게 보여 바꿨다던. 그렇지만 현정이나 연옥이라는 이름은 내 입에서 한 번도 부른 적도 쓴 적도 없이 그녀의 고향 하얼빈을 따 나는 그냥 빈이라 불렀다. 이또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사살된 곳으로 널리 알려진 북만주의 땅. 아사달이라 불리는 단군 왕검의 도읍지. 우리의 역사에 수없이 등장하여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여진족의 활동무대이자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의 근간이 된 곳이었다. 해방 전, 그녀의 아버지가 남한산성 안에 있는 마을에 살다가 먹고 살기 힘들어 인삼이라도 팔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아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정착해 살았다는. 그중의 막내가 빈이고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져 한국바람이 거세게 동포 사회를 뒤흔들자 잘사는 이나 못사는 이나 너도나도 일확천금의 한국행을 꿈꾸었을 때, 그때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서울에 사는 사촌과 어렵게 연락이 닿아 그 연줄로 오게 되었단다. 자신이 하던 간호사 일과 남편의 교사직도 때려치우고. 그러나 얼마 못 가 남편이 공사판에서 사고를 당하여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중국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아 온갖 궂은일을 4년간 하다가 귀국하여 허리를 쓰지 못하는 남편과 1년을 살고 다시 돌아온다는 여자가 빈이다. 한국에서 지내는 4년은 중국에서 지낼 1년을 위해 살고 중국에서의 1년은 한국의 4년을 위해 산다는 그녀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한국 남자였기에.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내가 담당하는 국사의 마지막 문제를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왕자로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임금의 자리에 등극해 북벌을 꾀하다,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효종의 통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현판이 무엇인가로 바꿨다. 정약용에 대한 문제를 냈다가 갑작스레 빈이 등장함으로 인해 사감이 작용한 것이다. 내고 보니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사회 분위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답은 빈과 만나게 될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옆에 있는 무망루. 현판은 원래는 수어장대 안에 있었는데 나중에 따로 그 옆에 비각을 세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다른 선생들은 다 퇴근하고 나만 홀로 남아 있었다. 아내의 임종을 지켰던 빈. 빈은 내게 뭐라 변명할 것인가. 그녀는 불치의 병을 앓던 아내의 마지막 6개월을 지킨 간병인이었다. 처음엔 중국동포란 것도 몰랐다. 그만큼 그녀는 중국동포들이 풍기는 특유의 이미지, 촌스러운 외모나 말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옅은 금발로 물들인 단발머리나 갸름한 얼굴에 우수가 깃든 표정은 오히려 한국여자들보다 더 현대적으로 보여서 처음 봤을 때 저런 여자가 어찌 간병인을 하나, 의아해하며 아내의 투병에 지쳐 있던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 정도였으니. 육 일 밤낮을 잠실의 한강변에 있는 병원의 아내 곁에 꼬박 붙어 있다가 토요일 밤에나 나와 교대하여 대림동의 언니들이 있다는 집으로 가서 일요일 밤이면 돌아오곤 했는데, 그런 그녀가 몇 개월이 흐르자 내게 간병인이기보다는 차츰 아내의 자리를 대신할 여자로 다가왔었다. 나도 그렇지만 나를 대하는 그녀의 눈길도 애틋했다. 병원에서 만나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나 병문안을 오는 친척들은 간병인 하나는 참 잘 만났다고 이구동성으로 마흔 살의 아내보다 두 살 어린 그녀를 칭찬했다. 그만큼 빈은 아내를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달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가는 아내 곁을 지켰다. 가서 쉬라 해도 스스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여동생이 병원을 찾아와 불치의 아내보다 빈이 안쓰럽다며 자기가 병상을 지킬 테니 하루라도 좀 쉬었다 오라 했을 때, 아내도 덩달아 나보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라고 자꾸 권해 나랑 함께 나왔고 내 차를 탔으며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찾았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다가 막상 병원 밖으로 나오자 표정까지 달라져 이왕 나왔으니 한번 꼭 가보고 싶다는 곳이 그곳이었다. 그동안 병원 밖에서 은밀하게 만나고 싶은 늑대심보 같은 맘이 내게 왜 없었겠는가마는 그럴 기회도 없었고 기회가 있다한들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최고의 이유였던 아내, 그 아내의 강권이 아이러니였다.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지라는 남한산성. 벚꽃은 이미 다 지고 새로 돋아난 잎이 무성해지는 오월이었다. 그때 알았다. 그녀 아버지의 고향이 그곳 산성마을이란 것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대목이었다. 백여 년 전만 해도 그곳에 민가가 천 호가 넘었다니까. 한국에 들어온 지 수년이 흘렀어도 여유가 없어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고.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막 걷기 시작했을 때 빈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 싶은 맘이 아무리 간절해도 그렇게 내가 먼저 다가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래도 될까, 하는 께름함이 없지 않았으나 솔직히 누가 알까, 그랬다. 아내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망정 우리는 즐거운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관리 사무소에 들러 안내책자를 받아 솜사탕을 먹으며 행궁 주변을 둘러보고 탐방 1코스를 따라 산을 오르는 우리는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빈은 아무 데서나 자라고도 그 지형에 어울려 한껏 가지를 뻗은 소나무들의 멋들어진 자태에 탄성을 금치 못했다. 남한산성의 진정한 주인은 소나무인 것 같았다. 그만큼 요소요소에 뿌리를 내려 건강하고 푸르렀으며 자유가 느껴졌다. 나무 하나하나, 거기에 머무는 바람과 그 바람에 다시 실리는 솔향과 솔향을 머금은 설렘과 그 설렘으로 피어올라 무궁한 하늘의 여백을 채우는 구름, 구름들. 자연의 여유를 보고 있으니 나의 고뇌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었다.
옹성이 있는 연주봉에서 바라본 서울은 미궁 속 사바를 대변하는 것처럼 뿌유스름했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환한 얼굴이 된 빈은 잘 보이지도 않는 한강변을 가리키며 병원이 저기쯤 있을 거라고 손을 들어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자 아내의 처연했던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가. 빈의 사정은 아내를 통해 대강 알고 있었다. 중국에 있는 남편이 불구가 되었다는 것, 딸 하나가 있는데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려하는 자폐증세가 있다는 것, 그 딸의 자폐가 부부의 한국행을 결심하게 했다는 것, 번 돈 거의 다 보낸다는 것 등. 아내를 떠올린 나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던가, 빈은 내 뒤로 돌아가 팔을 둘러 나를 감싸 안고 뒷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팔짱이 이렇게 진화한다. 힘드시죠? 내 등짝에선 그녀의 젖가슴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순간 아찔해진 내 말도 같았다. 힘들지요?
서문을 거쳐 수어장대에 올랐다. 빈은 나보다도 더 꼼꼼히 책자에 나온 설명을 보고 유적을 살폈다. 산성 축조 당시 동남쪽을 맡았던 이회가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공사비를 추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 부인마저 그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나중에 모함이란 게 밝혀져 그들의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건립해 초상을 모셨다는 사당, 청량당에서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짓기도 했다.
남한산성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는 수어장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이층누각이 세월이 흘러 바라보는 능동적인 역할에서 바라보이는 수동적인 역할로 그 목적을 달리한 채 나긋한 봄바람을 맞으며 늠름하게 서있었다. 성안에 남아 있는 건축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는데 나의 눈높이로 단청 색깔이 화려하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웅장하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하긴 남한산성 건축물 중이라 한정했으니 그럴 만하기는 했다.
빈은 수어장대보다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걸린 비각에 오래 머물렀다. 자신의 처지가 비감해서였을까. 잊지 말자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울컥하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임금이었던 인조가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게 침략을 당하여 도성을 버리고 이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티다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오랑캐라 멸시했던 적장에게 잘못했노라고, 앞으로는 명(明)을 버리고 청(淸)을 섬기겠노라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이마를 땅바닥에 찧는 짓을 세 차례나 되풀이했다는(三拜九叩頭) 저 삼전도의 굴욕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영조의 다짐이 이제 우리 민족의 영원한 다짐이 되었을까. 남한산성 하면 떠오르게 되는 한의 근원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무망루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나도 선생님과 언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이 말은 아내와의 영영 이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만큼 아내의 병세는 심각했다. 오늘 당장 숨이 멈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그것은 빈과의 이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과 아줌마였다. 내가 학교 선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고 아내는 그녀를 현정 씨라 불렀지만 나는 그렇게 부를 수 없어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간병인을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나도 못 잊을 거요.”
내 말이 목적어를 잃고 비틀거렸다. 왜 그런지 병원에서처럼 아줌마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 나와 청소 일이며 식당 설거지, 여러 사람 간병도 하고 그랬지만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았거든요. 저 현판이 어떤 연유로 지어졌든 간에 저에겐 간절하게 다가왔어요.”
마음이 짠해왔다. 빈이 지금까지 어떤 대접을 받았기에 남과 별로 다를 게 없이 대해주는 우리에게 감격했다는 말인가. 원한이 서린 다짐일 수밖에 없던 무망루가 갑자기 신뢰가 어린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무망루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무망루 앞에 매바위가 있다. 바위 자체로 담장이 되는, 얼른 알아보긴 힘드나 한자로 수어장대가 분명하게 음각된, 나라에서 받은 공사비를 주색잡기로 탕진하느라 공사를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모함을 받은 이회가 참수 당하기에 앞서 하늘을 쳐다보며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진짜로 죄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그가 절명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구슬피 울다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전하는 바위였다. 나중에야 매사를 철저하게 점검을 하느라 공사가 늦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전체 성벽 공사 중에 그가 맡은 구간이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아 누명이 벗겨졌단다.
“저기 좀 보세요!”
그때까지 팔짱을 풀지 않고 이회의 사연을 책자에서 보고 심상치 않게 매바위를 살피던 빈이 담장 너머 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였다. 이제 막 가녀린 이파리를 피워 올리기 시작한.
“저런 데서도 나무가 자라다니요?”
수어장대가 있는 쪽은 바위가 갈라진 곳이 없는데 담장 너머 비탈진 곳으로 뻗어 내린 쪽이 갈라져 그 틈에서 각박한 자신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뒤틀린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바위에 붙은 뿌리 부분은 울퉁불퉁하게 엄청 굵었으나 위로 갈수록 급격히 줄기가 가늘어진.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 뿌리에서 빨아들이는 영양분만큼만 거두겠다는 듯 일부러 그렇게 기르는 분재처럼 가지와 잎은 빈약했다. 우린 자세히 보기 위해 담장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게! 상수리나무네요.”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를 보는 건 어느 산에서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빈의 기분에 맞춰주려 일부러 탄성을 질렀다. 도토리가 열리는 상수리나무였다. 잎과 껍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서울로 진격하는 왜군을 피해 급박한 피난길에 올라 변변한 먹을거리마저 없어 도토리가 선조의 밥상에 올랐다 해서 상수라나무라 부르다가 세월이 흘러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얘기를 해주려 빈을 쳐다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러는가.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하고 뭉클해져 얼굴을 돌렸다. 손수건이라도 있었으면… 짐작이 갔다. 자신의 신세가 나무와 닮았다고 느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어휴, 참.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맨손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풀었던 팔짱을 다시 끼며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를 이해하실까 모르겠어요.”
우린 수어장대의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빈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같은 민족이면서 중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국인이 되지 못하고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처지. 중국에서 살지만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무늬만 중국인이지 그 땅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머물러야만 하는 현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인삼보따리를 들고 만주를 찾았건만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낯선 땅에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결국 소망하던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이역에서 숨을 거두고 만 사연. 만약 아버지가 한국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자신이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저 나무 씨앗이 바위틈에 떨어지고 싶어 떨어졌겠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떨어졌을 것 아니에요. 그때 만약 바람이 더 세게 불었거나 아예 불지 않았거나 했더라면 아마 땅에 떨어졌겠지요. 그래서 좋은 영양분을 흡수해서 다른 나무와 똑같이 잘 자랐을 거고. 똑같은 도토리인데도 어디에서 싹을 틔우느냐에 따라 나무의 모습이 달라져요. 우리도 중국에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조선족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사람들은 그걸 흔히 운명이라 하지요. 너의 운명이다. 그런데도 여기 한국 사람들은 왜 거기에서 태어났느냐고 우리에게 뭐라 하는 거예요. 운명은 개척하기 나름이다, 그러면서도 거기 살지 뭐 하러 한국까지 오느냐는 거예요. 바위틈에서라도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데 왜 하필이면 거기에 뿌리를 내렸느냐고 하는 거랑 똑같아요.”
내 마음속에도 그런 야유가 분명히 있었다. 빈은 아니라 해도 금방 표가 나는 동포들을 보면. 동포들이 밀집해서 산다는 곳에서 유난히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두고도. 설령 중국에서 온 동포인 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느낌이 왜 생기겠는가.
“우리 보고 여기 사람들이 툭하면 그러잖아요. 그냥저냥 중국에서 살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한국에 나와서 괄시받으며 이 고생이냐고.”
나도 분명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내에게 빈이 중국에서 간호사로 일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건 나무 보고 뭣 때문에 남쪽으로 가지를 뻗느냐고 말하는 거랑 똑같아요.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받으려고 하는 나무로서의 본능이잖아요. 그런 나무의 본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주의 본질이자 질서일 수 있어요. 우리보고 왜 한국에 나왔느냐. 저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살아남으려고 왔어요. 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요. 그걸 뭐라 할 수 있어요?”
중국에서 간호사를 할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한들 그녀의 현실은 아내의 간병인에 불과했다. 그녀의 외모로 인하여 그녀를 보는 내 눈이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그녀는 중국인이고 조선족이라는 데엔 변함이 없었다. 내 의식수준이 대학을 나오고 고등학교 선생으로서 더군다나 한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역사인식에 깊이가 있고 객관적이라 할지라도 내 의식 저편에선 무의식에 가까운 차별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내 의식이 이기를 좇게 마련인 인간 본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차별의 보편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녀의 상수리나무를 빗댄 깊이 있는 항변은 나를 미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할 말이 없네요.”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이나 아프신 언니 같은 분들만 계시다면 그런 말이 왜 나오겠어요. 다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고요. 우리로 인해 피해를 본다 생각하니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반대로 우릴 동정해서 그럴 수도 있고요. 여길 와서 보니 참 여러 가지로 감개무량해지네요. 그래서 괜히 투정부려 본 거예요. 아버지가 저 아래 성안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아요. 저 옛날 제 고향땅에 살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고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도요. 그리고 오늘날 그 땅에 살던 제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해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것도 아이러니하고요.”
인간사의 행과 불운이나 역사에서 명암이 교차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남한산성은 무망루가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사의 불행과 같이 역사의 어두운 시간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일 수 있었다. 우리는 성곽을 따라 지화문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남문을 거쳐 주차장 부근으로 내려왔다. 점심때였다.
“집사람이 맛있는 거 사주라 했는데?”
“그래요, 맛있는 거 사 주세요.”
빈은 팔짱 낀 내 팔을 더욱 가슴에 밀착시켜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우린 근처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갖은 나물로 상차림을 한 산채정식을 먹으며 마신 술이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동병상련의 심정이 통하여 서로를 더욱 가깝게 여기게 됐을까. 식당을 나왔을 때는 빈의 어깨를 내가 안고 그녀의 팔은 내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금방 마음이 일치했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해선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병원으로 가기 위해선 술 냄새가 완전히 가셔야 한다는 것에 대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는 서로의 간절함을, 그것이 무엇인지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우리에게 돌을 던질 자가 많다한들 우리를 변명할 구실도 많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우리 안의 도덕과 윤리도 그 순간에는 우리를 제어할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모텔로 향했다. 우리의 시작이었다.
그런 지 며칠 후 아내는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나보다 세 살이 적은 마흔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시기가 문제지 예상한 결과였다. 나보다도 더 빈이 슬퍼했다. 우린 시간을 잠재우는 우리만의 의식을 치렀다. 그 의식도 우리를 위무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간 사람은 간 사람이었다. 우린 빈이 다른 환자를 돌보게 되었어도 새로운 관계가 되어 새로운 만남을 이어갔다. 내가 빈이라 부르기 시작한 게 그 즈음이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주말이면 꼭 만났고 한풀이하듯이 굶주렸던 열망을 다스렸다. 빈의 남편이 성적으로도 불구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도 우린 서로의 처지를 존중했다. 하여 그녀에게 내 집에서 함께 살기를 종용하지 않았고 그녀도 내게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아내의 투병으로 인해 나의 경제가 그리 넉넉한 편은 되지 못하지만 그녀의 형편을 고려해 용돈을 주려했으나 화를 내는 통에 오히려 내가 무안했고 선물 같은 것도 비싼 건 아예 받으려하질 않았다. 우리의 연애에는 동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선의의 정리마저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기의 계산이나 얄팍한 꼼수 같은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내 욕심 같으면 그녀가 짐만 되는 중국의 남편과 이혼하고 나와 결합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걸 요구할 정도로 내 윤리(엄연한 불륜을 저지르면서 윤리를 논한다는 게 얼토당토않지만)가 형편없진 않았다. 나와 결혼하게 되면 아무래도 고생을 덜하고 몇 년에 한 번씩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진다는 걸 빈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의 이혼이 선행돼야만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녀도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몸이 성치 않는 남편을 버리고 나와 합칠 만큼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빈이 그런 식으로 해서 나와 합치기를 원했다면 내가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에 남한산성은 우리 사랑의 성지가 되어갔다. 처음 갔던 1코스뿐만 아니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땐 숭렬전과 국청사, 서문을 돌아 수어장대에 들렀다가 남문으로 가지 않고 바로 내려오는 2코스를 택했고 여유가 있을 땐 현절사와 장경사 및 망월사를 도는 코스를 택하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성곽 전체를 따라 도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들른 곳은 우리가 맨 처음 갔을 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수어장대였다. 특히 빈은 무망루와 매바위의 상수리나무에 애정을 쏟았다. 비각 앞에 들꽃을 놓아둘 때도 있었고, 매바위의 상수리나무가 우리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며 그 바위틈에서 꿋꿋이 견뎌냈을지라도, 그래서 굳건히 뿌리를 내려 이제 와서 잘못될 리도 없건만 뜨거운 여름날엔 꼭 물병을 챙겨가 물을 부어주기도 하고 심지어 꽃집에서 영양제를 사 바위 사이에 꽂아두기도 했다.
가을엔 그 나무에 도토리가 열렸다. 딱 두 알. 나무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다 익을 무렵 빈은 다람쥐가 채가기 전에 심어야 한다며 담장 바깥으로 돌아가 도토리를 땄고 바위 사이가 아닌 바위 밑 낙엽이 썩어 기름진 흙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묻었다. 하나는 내 나무고 또 하나는 자기 나무라며. 그리고 이듬해 봄 중국으로 돌아갔다. 법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시켰고 어쩔 수 없는 그 기간이 오히려 불구의 남편과 딸에 대한 그녀 나름의 예의의 시간이 되었다.
그녀가 없는 1년은 내게 허전함을 넘어 무력감마저 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빈이 그리워 남한산성을 혼자 돌기도 하고 그녀가 한 것처럼 상수리나무를 돌보기도 했다. 우리가 심어놓은 도토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곳에 갈 때마다 나는 매바위 밑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없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 됐어도 싹은커녕 비슷하게 여길만한 새끼나무도 그 바위 부근엔 나지 않았다. 빈이 알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우리 사랑의 전조로 여기지는 않을까. 불길했다. 그리하여 나는 모종삽을 들고 가 우리가 심은 도토리가 싹을 틔운 것처럼 여기도록 다른 곳에서 그 해에 나왔을 거라 짐작되는 묘목을 뿌리가 다치지 않게끔 흙까지 고스란히 떠서 그 자리에 심었다. 나의 정성에 감복했던지 묘목은 그대로 잘 자랐다. 나중에 빈이 볼 걸 대비하여 나뭇가지를 잘라 동그랗게 울타리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빈을 향한 나의 정성은 그렇게 지극했다. 그러한 나의 행위는 나만의 제의이자 주술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했다. 하여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하얼빈과 가까운 길림성 장춘으로 가 열흘 가량을 빈과 함께 보내며 주변을 관광하고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빈은 행복해했다. 남편에게는 뭐라 하고 내게 왔는지는 나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남편에 대한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장춘은 하얼빈에서 기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다음해에 빈은 다시 왔다. 우리는 예전처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만났고 남한산성을 내 집 드나들 듯 찾곤 했으며 바위틈의 상수리나무를 돌보고 그 새끼라 믿은 묘목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빈이 그 묘목을 보고 감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산성 밖으로 범위를 넓혀 등산로를 따라 수어장대를 거쳐 남한산성 입구까지 걷기도 하고 다른 날에는 역으로 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또 하나 사랑의 성지를 만들었다. 영장산을 올라 갈마치고개에서 이배재고개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소나무 연리지였다. 수령이 30년이라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신기하게도 가지끼리 붙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가 되기까지 두 그루의 나무가 쏟았을 공력이 눈물겨웠다. 부딪치고 또 부딪쳤을 것이다. 비벼대고 또 비벼댔을 것이다. 상처가 나고 그 상처가 난 자리에서 내가 즙을 내고 너도 즙을 냈을 것이다. 마침내 즙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받아먹는 나도 달고 너도 달았을 것이다. 마침내 상처가 아물고 즙의 교환은 계속 이어져 마침내 한 몸이 되었다. 물론 그러기까지엔 바람이 무시로 불어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기까지의 절묘함! 그 기막힌 인연이 우리를 상징하는 듯했다. 나무들도 좁은 공간에서 자라게 되면 서로 햇빛과 영양분을 두고 경쟁을 하기 마련이고 싸움에서 진 나무는 죽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는데 이 두 그루의 소나무는 사이좋게 손을 맞잡은 형상이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주변의 다른 나무들보다 더 잘 자라고 있다니 연인들의 소망인 사랑으로 인한 상생의 본보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듯 울타리를 쳐놓고 보호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연리지 사랑의 자물쇠’라는 팻말과 함께 철망을 설치하여 자물통을 걸을 수 있게 해놓았다. 조금은 유치해 보여도 우리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그 다음 주에 바로 자물통을 걸고는 거기에서 한참 떨어진 무망루까지 와 우리 사랑이 영원히 변치 말기를 바라는 새끼손가락 언약식을 한 후 매바위 밑 숲으로 다신 찾을 수 없게 열쇠를 던졌다.
우리는 통화보다는 카카오톡 문자로 소통하는 걸 선호했다. 그해 겨울,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 서정을 놓칠 우리가 아니었다. 바로 빈에게 문자를 보냈다.
“눈이 오는데 가만있을 수 없잖아?”
그런데 답장이 없었다. 금방금방 오곤 하던 답장이 눈이 그치고도 오지 않아 전화기를 켜보니 읽지도 않은 상태였다.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웬일일까? 그때부터 얼마나 전화를 해댔는지.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리라곤 전혀 생각을 못했으니.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겨울이 다 가도록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일은 없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읽지도 않는 문자를 보내고 또 보내고. 숱하게 내려줬던 대림역 근처 성모병원 부근에 차를 끌고 가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탓했다. 빈이 언니들과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사는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조차 알지 못하다니, 그제야 얼마나 내가 빈에게 무심했던가, 후회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중엔 대림동에 나도 모르게 향할 때마다 내가 왜 그곳에 가는지 한심하게 여겨졌다. 혹시나 빈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어림도 없는데, 어림도 없으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나는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가곤했다. 그만큼 숨이 막히도록 빈이 그리웠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들숨날숨 한 번씩 날 때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빈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빈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하얼빈으로 날아갔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았으니. 흑룡강성의 성도, 송화강이 인접해 흐르는 만주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공항은 아담했다. 리무진을 타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호텔에 들었고 3일 동안 눈에 덮인 하얼빈시내 곳곳을 누볐다.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돔 모양의 지붕을 한 아이보리, 연두색 등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유럽풍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기차역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관람하고 중앙로를 따라 박물관과 얼통공원과 성소피아 성당을 거쳐 스탈린공원까지 걸었다. 잿빛 하늘 아래 우뚝 솟은 고동색 벽돌과 초록색 돔 지붕, 황금빛 십자가가 어우러진 성소피아 성당은 동화 속 궁전처럼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빈은 없는데 내 머릿속은 온통 빈으로 가득이었다. 그런 하얼빈은 추웠다. 지독히도 추웠다. 그곳에서 돌아오는 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여기까진가 보다. 이젠 잊어야 하는가 보다. 그런 화두로 또 1년을 보내고 있었다. 빈과의 관계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술친구이며 수학을 가르치는 김 선생은 여자는 여자로 잊어야 한다며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선생을 물색하고 있었다. 아내를 대신하여 빈이 왔듯이 빈을 대신하는, 가슴 설레게 하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참에 빈으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다.
토요일을 기다리는 이틀간은 다시 만나게 되는 빈과 어떻게 보낼까하는 생각으로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빈의 집도, 언니도 억지를 써서라도 알아두리라 맘을 먹었다. 또한 빈이 거절해도 남편의 약값이라도 하라고 도와줄 방도를 찾아보리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다른 뜻은 없었다. 빈의 고통을, 빈을 만나지 못하는 나의 고통을 덜 수 있으리라는 생각 외엔.
일찌감치 집을 나서 눈을 맞아 지저분해진 차 안팎을 세차장에서 닦고 거의 1년 만에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며칠 있으면 방학이었다. 만약 빈이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며칠이라도 따뜻한 제주도에 다녀왔으면 싶었다. 왜 연락을 안 했느냐고 따지지 말자. 빈이 그럴 때는 내게 얘기하기 힘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예전과 같이 주차장에 차를 두고 가장 빠른 길인 무기제작소였다는 침괘정을 지나 취성암을 거쳐 수어장대에 올랐다. 열두시가 되려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빈은 어떻게 오려나. 오는 데 불편할 것을 고려하여 같이 가자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산성역에서 오는 버스가 있다는 건 알고 있으리라.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산 여기저기에 쌓여있었다. 토요일이고 그리 춥지는 않은 날씨지만 등산객은 많지 않고 한산했다. 청량당은 언제나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음울하기도 해 이회와 부인의 원혼을 달래는 무당의 공수가 아직도 주변을 떠돌며 맴도는 것 같았다.
무망루 앞에 섰다. 올 봄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의 단원고 학생들이 배가 침몰하면서 무더기로 바다에 수장되었다. 배의 위기상황에서 먼저 승객의 안전을 도모해야할 선장과 승무원들은 팬티 바람으로 탈출하기에 바빴다. 더 많은 승객들이 구조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우왕좌왕하고 선박회사나 당국의 대응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국민들은 그 속수무책을 두 눈 벌겋게 뜨고 바라봐야만 했다. 그 속수무책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국민들의 공분이 있었다. 그러면서 ‘잊지 않겠습니다’를 뜻하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짐했다. 그러나 배의 침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불황의 골이 깊어지자 그 탓이 세월호에 있는 양 여론을 호도하는 세력이 생기고, 사건을 끝까지 규명하자는 유족을 험담하는 유언비어까지 난무하기 시작했다. 왜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구할 수 있었던 생명들이 왜 수장될 수밖에 없었는지, 책임의 소재는 어디까지인지, 그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한 채 진실도 수장될 위기에 처하고, 그 안타까운 참사가, 절대로 잊지 않겠다던 다짐이, 서서히 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 실정인 것이다. 이렇게 무망루의 다짐은 언제까지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될 것인지.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수십만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끌려간 여성들은 성노리개감이 되었고. 그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본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그 여성들이 돌아오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힌 화냥년이라 능멸했다. 속수무책이 속수무책을! 그리고 270년 뒤 그 치욕을 잊지 말자던 무망루의 정신은 어디로 가버리고 조선은 망했다. 말로만 무망루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도 정작 잊고 있었다. 매바위 밑에 심은 상수리묘목을. 매바위로 다가가다 상수리나무를 쳐다보는 순간이 돼서야 어찌 됐을까 궁금해졌던 것이다. 아직도 시간은 충분했다.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나와 담장을 따라 바위 밑으로 갔다. 아, 씩씩했다. 두 그루 다. 언젠가 내가 나뭇가지로 만든 울타리도 조금 삭아 내리긴 했지만 형태를 유지한 채 그대로였다. 많이 컸다. 줄기도 많이 뻗고. 좋은 징조였다. 빈과 만난다는 즐거움 뒤에 숨어 있다가 불뚝불뚝 튀어나오는 불길한 생각들이 저만치 사라지는 듯했다. 이쯤에서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해요나 우린 만나선 안 될 사람들이었어요, 같은.
다시 무망루 앞으로 갔다. 한 여자가 모자까지 딸린 두툼한 파커를 입은 채 다소곳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빈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를 보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 선생님 아니세요?”
내가 영문을 몰라 왜 그러느냐는 식으로 빤히 쳐다봤다.
“임연옥이를 아시지요? 선생님께서 빈이라고 하신다는.”
빈을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전혀 다른 인물의 등장에 나는 당황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제가 한이엽입니다.”
“저 연옥이 언니예요.”
빈과는 체형도 생김새도 닮은 데가 없었다. 아니 빈과는 달라도 중국동포와 비슷한 데가 있긴 있었다. 특유의 억양과 왠지 유행과는 거리가 먼 차림새. 그때 멀리 달아났던 불길한 생각이 툭 불거져 나왔다. 나는 긴장했다.
“죄송한데요, 제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빈이 아니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연옥인 지금 중국에 있어요. 걔가 진즉에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라고 했지만 못하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우리 제부가 어서 죽기만 바랐거든요.”
죽기를 바랐다? 마땅히 앉을 만한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산을 내려가 찻집이라도 들어가서 차분하게 앉아 들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나는 한시바삐 빈의 소식을 듣고 싶었으니. 언니도 서서 얘기하는 걸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나와 빈이 사귀는 걸 벌써부터 알았단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된 남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왕 그렇게 된 것, 빈이라도 행복해지길 바라고 불장난이 됐든 진정한 사랑이 됐든 기꺼이 환영하며 박수를 쳤다고. 그리고 계속해서 지켜보니 순간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더란다. 그리하여 나를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단다.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니라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심정으로. 어차피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만 남편에게 내가 어느 정도 보상만 할 수 있다면 이혼하게 해서 우리가 합치도록 도와주겠노라는. 그런데 빈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더란다. 만약 언니가 그런 일로 나를 만나게 된다면 나와의 관계마저 바로 끝내겠다며. 그래서 선택한 게 자신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 빈도 모르게 남편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자존심을 생각하여 내 얘기는 하지 않고 빈을 이제 놓아주었으면 한다고. 그랬더니 순순히 그러자고 하더란다. 자신도 충분히 알고 있다며. 그 결과가 음독일 줄이야. 빈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였다.
“사람 목숨이 질기긴 질긴 모양이에요. 딸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실려 가 겨우 살긴 살았는데… 천벌을 받을 말인 줄 모르겠지만 서로를 위해 그때 죽었어야 했어요. 식도가 녹아내려서 밥도 못 먹거든요. 그래서 곧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관을 삽입해서 아직까지도 살아있어요. 여러 사람 못할 일 시키는 거예요.”
그녀는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정신이 아뜩해져 있었다. 내가 그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빈과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그는 한국에 가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갖은 공상에 시달렸을 것이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기 마련인 불륜의 모습들. 아내라고 별 수 있으랴. 아내를 믿고 싶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는 아내가 수도 없이 그려졌을 것이고. 그러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몇 번이나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냥 콱 죽었으면 싶었으리라. 그러나 막상 죽으려니 너무 원통하고, 살아있자니 짐인데다 불구의 인생이고.
“연옥이가 엊그제 또 전화가 와서 그러는 거예요. 제발 선생님께 말을 좀 해달라고. 늦으면 늦을수록 선생님께 죄를 짓는 거라고요. 차마 자신이 직접 말하진 못하겠다고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란다고. 그게 진심일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저도 이제 지쳤어요. 이 전화도 이제 해지할 거예요. 바로 걔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남편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
“지금도 오늘 내일 하는가 봐요. 눈만 떠있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요.”
“생활은 어떻게 하고요?”
“물론 어렵지요. 온 집안이 다 거덜 난 상태예요.”
무거운 짐이 가슴을 콱 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가 죄인입니다.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무슨 죄가 있어요. 우리 연옥이 사랑한 죄밖에 더 있어요? 이제 그 마음도 거두세요. 좋은 사람 만나세요. 그게 연옥이 바람이에요.”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렇겠지만 세월이 약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곧 내려갈 태세였다. 이렇게 보내선 안 된다. 언뜻 떠오른 게 빈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내려가서 식사라도 같이 하시지요?”
“아니에요. 이제 저도 솔직히 홀가분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뵙고 나니까 선생님이 아까워 죽겠지만요. 우리 연옥이가 여기서 선생님을 자주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이 앞에서 사랑의 맹세도 했다고요. 걔 복이 딱 거기까진가 봐요. 저도 아버지 고향이 여기라는데도 오늘 처음 와 봤어요.”
나는 그럼 계좌라도 적어주고 가길 부탁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 같다고. 그러나 그녀는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여기 한국 사람들은요, 우리가 돈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한다고들 그러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부담 드리려고 만나자는 것 아니었어요. 연옥이 잊으시라고 만나자는 거였어요. 전화로 해도 되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고 저도 여기 남한산성에 꼭 와보고 싶었거든요.”
돈으로 마음의 부담을 줄이려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전화번호라도 알려주길 청했으나 그녀는 그마저 거절했다. 우리들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또 만나지지 않겠느냐면서. 그녀는 돌아섰다. 나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무망루 앞에서 한 나의 다짐이었다. 빈을 기다리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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