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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간 곳
●숲 쟁 이
한국 순교자의 꽃, 유중철 · 이순이 동정 부부와 수많은 순교자들의 치명 터
전주 숲정이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로 일찍부터 중죄인들의 형장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가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터로 변모하였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의 가족 등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치명터이다. 현재 성지는 본래 치명터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새로 조성되었다.
현재 전주 가톨릭신학원이 위치해 있는 숲정이(윤호관) 성지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정이’ 혹은 ‘숲머리’라고도 하는데 신유박해 때 1801년 12월 28일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처 신희, 유관검(柳觀儉, 1768~1801, 세례명 불명)의 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일명 유희, 1782~1802, 루갈다) 등 유항검 가족이 처음으로 처형되면서부터 순교자들의 처형이 이어졌다.
숲정이 순교자 중 이순이는 전주 감옥에서 순교한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과 동정 부부로 살았던 순교자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며느리이기도 한 이 루갈다는 성모 마리아를 닮아 평생 동정이기를 결심하였다. 루갈다의 결심을 알고 있었던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는 호남 전교 길에 유항검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장남 중철이 역시 동정으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혼사를 주선,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 부부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4년 동안 정결한 생활을 해 온 이들 부부는 마침내 신유박해를 만나 순교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유항검 일가가 순교한 이래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유혈이 있었다. 1839년 5월 29일에는 13년간 옥고를 치른 신태보(申太甫, ?~1839, 베드로), 이태권(李太權, 1782~1839, 베드로), 이일언(李日彦, 1767~1839, 욥), 정태봉(鄭太奉, 관명 만보, 1796~1839, 바오로), 김대권(金大權, ?~1839, 베드로) 5명이 참수됐다.1866년 12월 13일에는 소양면 신리골의 정문호(일명 계식, 1801~1866, 바르톨로메오), 손선지(1820~1866, 베드로),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베드로)과 성지동의 조화서(1815~1866, 베드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정원지(일명 원조, 1846~1866, 베드로) 여섯 명이 치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올랐다.
◆ 고마운 은인 오사현
숲정이에서 처형된 분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사람은 향리(鄕吏) 신분인 오사현이라는 외교인이었다. 그는 성지동과 인접한 유상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지동은 1840년대에 형성된 교우촌 이었고, 대성동 신리골 역시 이 무렵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오사현은 이 두 마을이 신도들의 교우촌 인줄을 모르고 지냈다. 성지동과 대성동 신리골에 사는 신도들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일상생활의 몸가짐은 누구나 본받을 만큼 모범적이었다. 오사현은 두 마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내밀히 알아 본 결과 놀랍게도 나라가 금하고 있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의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참 인간됨을 가르치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향리의 신분으로 천주교도들을 관가에 고발해야 했지만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도 언젠가는 천주교를 믿겠다고 내심 다짐하고는, 그들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그는 훗날 진안 서촌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교한 후 착실히 수계범절을 하다가 선종했다. 그리고 평소 성지동에 사는 조화서 성인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지냈다.
오사현은 마음으로 아끼던 천주교도들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자 신도들을 구명하기 위해 전주 감영으로 찾아가 평소 친분이 있는 관원들을 만나서 그들이 살아 날 방도가 없을까 물었다. 관원들의 대답은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당장 풀어줄 뿐 아니라 압수한 재물도 돌려주겠는데 저들이 막무가내로 죽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오사현은 신도들을 살려볼 요량으로 그들이 갇혀있는 옥으로 찾아가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배교하라고 했다.
오사현만 아니라 영장도 처형 직전까지 여러 번 설득했지만, 신도들은 끝까지 유혹을 물리치고 체포된 지 여드레만인 1866년 12월 13일 참수 당했다. 목격자 오사현의 아들 오순보의 말에 의하면 순교자들이 참수될 때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처형장에 있던 거지들이 시체의 옷을 벗겨 가려고 몰려오자 오순보는 거지들을 쫓아내고 여섯 순교자의 머리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관졸들의 양해를 얻어 잘려진 머리를 각자의 몸에 차례대로 맞추어 놓고 거적으로 덮어 주었다. 오사현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 만에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개와 일꾼 열두 명을 사서 형장으로 갔다. 그는 여섯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군지휘소) 건너 범바위(현재 鎭北寺가 있는 곳) 아래 도랑가에다가 가매장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무덤 앞에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 올때 달고 나왔던 명패를 세워 놓았다.
■ 순교자
◆ 성 조화서 베드로(1815∼1866)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조화서는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한 뒤 한 막달레나와 혼인하여 아들 윤호를 두었으며, 한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 일을 맡았다. 1864년에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였고, 아내가 죽은 뒤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는데, 부자가 옥에서 순교를 다짐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아들과 함께 예닐곱 차례의 신문을 받은 조화서는 후손이 끊기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정원지 베드로(1846∼1866)‘원조’로도 불리는 정원지는 충청도 진잠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전주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 지역으로 이사하였고, 1866년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화서가 체포되던 1866년 12월 5일 정원지는 산에 피신해 있었는데, 동정을 살피러 내려온 사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다. 지극한 효성으로 노모를 생각하며 여러 번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함께 체포된 성지동 교우들의 위로와 권면에 힘입어 끝까지 혹형과 고문을 참아 냈다. 마침내 12월 13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다.
◆ 복자 신태보 베드로 (1768∼1839년)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
◆ 복자 이태권 베드로 (1782∼1839년)
이태권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후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은 그의 삼촌이다. 그는 열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후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나갔다. 1827년에 다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김대권(베드로), 이태문(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 있다 1839년의 기해박해 5월 29일(음력 4월 17일)에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 복자 이일언 욥 (1767∼1839년)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일언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이후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일언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하다며 사흘 후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 복자 정태봉 바오로 (1796∼1839년)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5촌 당숙의 손에 의해 자라났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래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였던 그는 고아가 겪어야만 하였던 시련들을 인내와 체념으로 견디어냈다. 또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용담에서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 정해박해 때 밀고자가 모든 사실을 관아에 일러바쳤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이일언(욥),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동료들과 함께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 복자 김대권 베드로 ( ? ∼1839년)
김대권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야고보)은 그의 아우이다. 한때 베드로는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아내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며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열심히 수계하며 살아가던 중 아우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 원의를 나타냈다. 그 후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포졸들에게 웃는 얼굴로 잡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기해박해 때,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복자 오종례 야고보 (1821-1840년)
오종례 야고보는 충청도 은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로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결혼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형과 다른 교우 여럿과 함께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는 관장의 배교 유혹에도 꿋꿋하게 이를 참아낸 다음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 전부터 원하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다른 증거자들과 고통을 나누었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 복자 이조이 막달레나 (1808∼1840년)
이조이(李召史) 막달레나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장성한 뒤 그녀는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을 하였으나 20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에 앞서 그녀에게 수계를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식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맡았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조이 막달레나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문초를 받는 동안 과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갖가지 형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괴로움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 있는 신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 복자 최조이 바르바라 (1790∼1840년)
최조이(崔召史) 바르바라는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성한 뒤 바르바라는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는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후 바르바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미약하나마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1801년에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고백하고 자신의 시아버지 신태보는 올 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1780∼1840년)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루가)은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또 장성한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된 후,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한 동안 냉담 생활을 하였다가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1832년 조정에서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자, 광주 관장은 마음을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였으나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광주에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광주의 관장은 문초를 하고 전주로 이송시켰으나 전주 감사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프로타시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여섯 번째 간 곳
● 치명자산
유항검과 부인 신희 등 일가 7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중바위 치명자 성지
전주 중바위 치명자산 성지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 일가 합장묘가 있다.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부인 신희, 두 아들 유문석(柳文碩, 일명 문철, 1784~1801, 요한), 유중성(柳重誠, 일명 完碩, ?~1802, 마태오),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 이순이(李順伊, 일명 유희, 1782~1802, 루갈다) 등 일곱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에 가매장됐다가 1914년 사순절 때 전동 본당 초대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전동 본당 회장들을 동행하여 재남리 바우백이에 매장된 무덤을 파묘하고 그 유해를 발굴했고, 4월 19일에 치명자산에 이장하였다.
1993년 11월 29일에 이 묘소를 개장,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전주 남문 밖(현 전동 성당), 전주 감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이 산은 예부터 승암산(중바위 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 산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선인들이 해발 300m의 산정에 님들을 모신
뜻은 세계 교회가 ‘진주중의 진주’ 라고 찬탄하는 동정 부부 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 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순교 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 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 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트르(순교자의 산)다.
◆ 몽마르뜨 성지란?
몽마르트르는 프랑스 파리 북동쪽에 있는 표고 130m의 작은 언덕으로 ‘순교의 언덕’(mons martyrum)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성인 디오니시오가 이산에서 순교하여 「순교자의 산」이란 뜻으로 「몽 데 마르뜨르」 라고 불러 오다가 후에 「몽마르트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1870년 독일과의 교전으로 시련을 겪게 된 프랑스 국민들이 거국적으로 성금을 모아 1910년에 건립한 거대한 백악(白堊)의 아름다운 예수성심 대성당이 정상에 세워져 파리의 명소가 되었지만, 실은 유서 깊은 천주교 순교 성지요 파리를 지켜주는 축복의 언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명자 산」또한 「전주의 몽마르뜨」라 부르는 것이다.
▒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주교
원래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이탈리아 태생 주교였으나 250년에 선교사로서 프랑스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6명의 주교들이 프랑스로 갔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불과 몇 년을 선교하다가 자신의 사제인 성 루스티쿠스(Rusticus)와 부제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와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이 세 성인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파리 근교에서 참수되었는데, 참수된 곳을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곧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렀다. 이곳이 오늘날의 몽마르트르 거리이다. 그들의 유해는 센(Seine) 강에 던져졌으나 곧 찾아냈으며,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었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생 드니의 베네딕토 수도원이 되었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로도 불린다.
축일은 10월 9일이며, 활동연도는 258년(?)경이다.
■ 순교자
◆ 복자 유문석 요한 (1784∼1801년) 유문석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 이에서는 그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중순 그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 복자 유중성 마태오 ( ? ∼1802년) 유중성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 유배지로 가며 사람들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 복자 유중철 요한 (1779∼1801년)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7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3세였다.
◆ 복자 이순이 루갈다 (1782∼1802년)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주 신부의 주선으로 전주 유중철과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결과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일곱 번째 간 곳
●초 남 이
'호남의 사도'이며 순교자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초남 부락은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고향이자 전라도 천주교회의 발상지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인 유 요한과 이 루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 는 동정 서원을 하며 혼례를 올린 곳이다.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유항검은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대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의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권일신을 대부로 하고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에서 체포된 200여 명 대부분이 그가 전교한 사람들이었다.
.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홍낙민(洪樂敏, 1751~1801, 루카), 최창현(崔昌顯, 호 관천, 1759~1801, 요한),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었으나 1787년 그 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尹有一, 1760~1795, 바오로)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남 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邪敎)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의 죄를 적용해 능지처참형을 언도받고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이에 앞서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李順伊, 일명 유희, 1782~1802, 루갈다)와 동생 문철 요한, 사촌 동생 중성 마태오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802년 1월 31일(음 12월 28일 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이곳은 1797년 혼 배한 큰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가
1801년 치명할 때까지 4년간의 동정 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루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이었다
. ▒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聖務)를 집행했던 제도.
한국천주교회 창설가인 1786년부터 1787년경까지 이승훈, 권일신, 유항검,
홍낙민 등 10여 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神品)을 안 받은 채 사제(신부)로서 미사성제를 드리고 고해 등 각종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유항검은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 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의 이름으로 씌어져 1789년 10월(음),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을 통해 북경의 북당선교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 회답에서 선교사들은 성사를 마구 집전한 것을 무지로 돌리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의 동정생활
1795년에 유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유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또한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유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이순이 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 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 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
◆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 편지
어머님 전상서"문안 아뢰옵나이다. 여러 가지 근심되는 중에 생각하오니, 어머님 슬하를 떠나 온지 지금 4년에 허다한 말씀 아뢰고 싶사오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사옵고, 다만 몇 줄 글자만 아뢰옵나이다."(중략) "어머님 소녀가 시댁에 들어오는 날 평생에 쌓였던 일만 근심이 완연히 풀린 것은 일찍이 마음에 맺고 결정하였던 원을 한 평생에 어떻게 보존하여 지낼까 염려된바 말 할 수 없어서 근심 걱정이 심중에 구비 구비 맺혀 쌓였더니, 우리 내외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을 형제같이 살매, 그 사이에 혹독한 유혹이 몇 번 있어 대개 열 번이나 거의 무너질 뻔 하였사오나, 공경하올 성혈 공로로 마귀의 계교를 물리쳤나이다.(중략)“이런 말씀을 하옵는 것은 어머님께서 혹시나 이 일로 걱정 하실까 함이오니, 이 글월을 받으실 때 소녀의 얼굴을 대하심 같이 받으시옵소서. 다시 또 말씀 드리오니 아무쪼록 근심 마옵소서. 이 세상은 헛되고 거짓됨이 옳소이다. 할 말씀 많사오나 더 쓸 수 없사와 그치옵니다." 유중철이 순교한 뒤 그의 옷 속에서는 자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 순교자
◆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1760∼1801년)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항검의 집은 전주의 초남 이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고 그 뒤를 이어 김천애와 유항검의 맏아들인 유중철(요한)이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혹은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1756∼1801년)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 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안드레아)와 최여겸(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에 따라 그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여덟 번째 간 곳
●천호성지
성인, 순교자들의 묘와 한국 천주교의 큰 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성지
천호 성지에는 1866년 병인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손선지(1820~1866, 베드로), 정문호(일명 계식, 1801~1866, 바르톨로메오),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베드로)과 1866년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1806~1866,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 여산에 서 순교한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으며, 이들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이 천호 산에 종적을 알리지 않은 채 묻혀 있다.
천호 성지는 성인들의 묘와 순교자들의 묘뿐만이 아닌 한국 천주교의 큰 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성지다.천호 성지에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성인이 묻힌 것은
1867년이었다. 세 성인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 골에서 함께 거주하다가 체포되었고,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처형되었다. 생전에 친분도 두터웠는데, 그들 가족이 천호 마을로 피신해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명서는 세 성인들과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였지만 다른 곳(진안 어은동)에 묻혀 있다가 1988년 이곳에 안장되었다.관아에서는 여산 순교자들을 처형한 후
미나리꽝에다가 집어 던졌다. 그래서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야음을 틈타 목숨을 걸고 건져 내었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둔 신도들은 이들을 묻을 장소로 천호 산을 택했다. 어떤 순교자들은 야음에 천호 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묻었지만 어떤 순교자들은 다급한 나머지 적당한 곳에 가매장했다가 훗날 전주의 순교자들 곁에 묻었다. 천호 성지 성인들 묘소 아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볼 수 있다.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이곳 여산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천호 성지는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교우촌 천호 공소의 천호 산기슭에 있다. 천호 마을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였는데 주로 충청도 신도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신도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성인들의 묘지 맞은 편 골짜기인 무능 골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 골짜기 밑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다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마을 터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호 성지 지역에는 박해 시대에 다리실 공소를 포함한 총 7개의 공소가 있었다. 이 공소가 구성된 각 지역은 《택리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라 말할 정도로 첩첩산중에 묻혀 있었다. 이런 곳으로 숨어 들어와 밭을 일구고 기도 생활을 하던 교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한국 천주교를 일구었다.
◆ 천호 공소(다리실·용추네)
천호 공소는 다리실 또는 용추 네라는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데, 박해시대에는 다리실 또는 용추 네라고 불렀다. 다리실 은 월곡(月谷)이라고도 썼으며, 용추네는 본래 용이 등천한 내(川)가 있다 해서 용천 내라고 했는데 용추네는 용천 내가 변한 이름이다. 천호라는 행정명은 후대에 교우 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천 내가 천호로 바뀐 듯하다.
천호 마을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였는데 주로 충청도 신자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신자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성인들의 묘지 맞은편 골짜기인 무능 골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 골짜기 밑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다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마을 터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호 성지에 묻힌 순교 성인 중, 손선지 베드로와 한재권 요셉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중 다리실 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 골로 옮겨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1866년 12월 13일 손선지 성인이 처형된 후 그의 아들 손순화(요한)는 70여세 된 할머니 임 세실리아와 어머니 루시아와 동생들을 데리고 천호 마을로 다시 피신해 왔다. 이 때 성 한재권과 성 정문호의 가족들은 무능 골과 인접한 시목 동으로 피신해 왔다.
◆ 다리실 신앙공동체가 겪은 박해
1868년(고종 5년, 무진년)에는 다리실 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혔다.
그래서 6월 9일 문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신도들이 여산으로 끌려갔는데, 그 중 장윤경 회장은 1868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사망했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다리실 신도들이 체포되던 날이었다.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는 병으로 앓아 누운 지 스무날이나 되어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포교 일행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마태오를 욱지르며 신도들이 도망간 곳을 대라고 하다가는 체포한 신도들의 압수한 재산을 가지고 여산 관아로 갔다. 그날 밤 마태오의 큰형 요한은 환자가 걱정이 되어 집에 왔다가 환자로부터 포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는 환자인 마태오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런데 마침 장마철이어서 찬비를 맞으며 3, 4일을 지내고 나니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포졸들이 찾아 올 것이 두려워 자기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태오는 불안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요한은 환자가 무엇이든 먹어야 살 것 같아 음식을 주었지만 먹지를 못하더니 마침내 풍증(風症)으로 1868년 6월 12일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입전으로는 이런 말이 전해 져 오고 있다. 환자가 몹시 앓고 있는데 포졸들이 다시 마을에 와서 집을 뒤지고 다니다가 환자와 요한이 숨어 있는 집 울안에까지 왔다. 환자는 고열의 고통을 못 이겨 신음하고 있던 터였다. 형 요한은 발각되는 날에는 숨은 곳이 발각되어 떼죽음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환자의 신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 씌워 누르고 있다가 포졸들이 떠난 후에 이불을 걷어 보니 질식해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해시대에 천호 산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천호),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개의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후대에 터를 옮겨 새로이 시작한 산수골 공소만이 남아 있는데 이들 공소 중 다리실 공소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공소이다. 1877년 한국천주교회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밖에 없었는데, 블랑 신부는 1877년 으럼골을 사목활동의 거점지로 하여 정착한 후, 리우빌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 등 3명의 선교사가 10여 년 동안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들이 주로 머문 곳은 천호 공소였다. 오늘의 천호 공소는 150여년의 전통을 지닌 교우촌답게 주민 전체가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 순교자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1801∼1866)‘계식’으로도 불렸던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지만, 미처 소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
◆ 성 손선지 베드로 (1820∼1866)‘승운’이라고도 불렸던 손선지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 옥에 갇혔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손선지는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가,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 성 한재권 요셉 (1836∼1866)
한때 ‘원서’라고도 알려졌던 한재권은 충청도 진잠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를 본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진잠 지역 회장이 되었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다음에는 직책 없이 교회 일을 하였다. 1866년 12월 5일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자 그의 아버지는 친구를 통해 아들이 석방되도록 교섭하는 한편 감옥을 찾아와 배교하라고 간청하였지만, 한재권은 끝내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숲정이에서 31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성 이명서 베드로 (1821∼1866)
‘재덕’으로도 불렸던 이명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성지 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 동을 습격하자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관장은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강요하였지만,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열심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명서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의 참 고향이 천국임을 항상 깨닫고 살아갈 수 있도록 빌어 주소서.
○ 성 손선지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관리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한재권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사회에 참된 정의가 구현되도록 빌어 주소서.
순례란?
하느님이 임재 하였거나 다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는 곳, 혹은 특별히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의미하며 성지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경신(敬紳)행위의 하나다.
순례의 기원은 뚜렷하지 않지만 유태교에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유월절(Pesah)과 오순절(Shavout) 및 초막절(Sukkot) 등 매년 3번씩 예루살렘의 성전의 가서 그들이 수확한 곡식을 바치던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리스도교 시대에 들어오면 순례는 신에 대한 흠숭의 의미뿐 아니라 회개하는 행위로, 혹은 성인에 대한 존경의 행위로, 혹은 영적인 은혜를 받기위한 행위로, 혹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던 팔레스티나로 순례하였고, 그 후에는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진 로마에서의 순례도 성행하였다. 8세기 이후부터 순례는 신자들의 의무에 속한다는 관습이 생겨나 대 순례 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순례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그 의의가 감소되어 차츰 활기를 잃었다. 현대에는 팔레스티나와 로마 이외에도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 등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에도 순례한다. 이러한 곳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순례를 위해 몰려든다.
모든 종교인은 ‘순례’라는 이름으로 성스러운 종교 여행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성지순례는 단순히 진리를 추구하고, 정신적 풍요를 체험하고자 나서는 여정이 아니다. 성지순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깊은 신앙의 표현이다. 이러한 참뜻을 올바로 알고 실천할 때, 한국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이상적인 영성인 순교 영성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더욱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지순례는 ‘회심의 여정’이라고 강조한다.
대부분 순례는 깊은 영적 변화를 갈망하면서 자신의 내적 불완전함을 돌아보고,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국내 순교성지를 순례하는 여정은 한국교회 고유의 순교 영성을 매개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기회가 되기보다는 여전히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는 ‘성지 관광’ 식의 순례를 비롯해 무엇보다 한국 교회 고유의 순교 영성을 체득하려는 노력도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더구나 최근 주교회의에서 선정한 111곳의 순교자 성지를 순례하도록 책자를 발간했는데 단지 도장 받기 위해 다니는 순례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은 처음 시작은 그렇게 하다 곧 후회하고 다시 처음부터 참된 순례를 하는 분들도 있다는 점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지난 2010년 세계 순례와 순례지 사목 대회에 앞서 발표한 서한을 통해 “순례자는 최종 목적지가 없는 방랑자와는 달리, 때로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목적을 갖고 있다”며 “순례지 는 주님을 찾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 고 밝힌 바 있다.
순례의 정신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성지는 그러한 복음화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2번째
순례의 향기의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5. 11. 8 . 전주성지순례를 마치며
김홍숙 혜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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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번째 전주 상반기 순례체험기-2
순교자님들의 순교 경위를 자세히 조사하고 카페에 게시하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정말감사함니다야고보순례단을 사랑하기에 글을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