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BC 485?~BC 414?]
트라키아 아브데라 출생. 소피스트로 자칭한 최초의 인물이다. 아테네를 여러 번 찾았고, 만년에는 시칠리아섬에 있으면서 명성을 떨쳤다.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었고, 새로이 건설된 남이탈리아의 식민지 투리오이(BC 441)의 헌법을 기초하였다. 그의 유명한 인간척도설(人間尺度說)은 플라톤에 의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라는 말로 전해진다. 이 말의 해석은 여러 갈래이나 일반적으로는 진리의 기준을 개개의 인간의 감각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유력하며, 그 때문에 이 말은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우주의 이법(理法)에 관해서 과학이 주장하는 것에 회의를 품었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불가지론(不可知論)의 태도를 취하였다.
· 오케아노스 [Okeano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
천공(天空:우라노스)과 대지(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신족(神族)의 한 사람이다. 고대의 그리스인(人)들은 세계를 편평한 원형의 대지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이 대지의 끝을 둘러싸고 흐르는 대하(大河)의 신이었다. 이 신은 대지 서쪽 끝에서 누이동생인 테티스를 아내로 삼아 함께 살고 있어 올림포스산(山)에서의 신들의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온세계의 모든 바다와 하천의 신이었던 3,000명의 아들과, 바다나 하천 또는 샘의 요정(妖精)이 된 3,000명의 딸 오케아니데스가 태어났다. 후에 오케아노스는 차차 지리적인 개념으로 변하여 지중해에 대해서 대륙을 둘러싼 대양(大洋)을 뜻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라고 한다.
· 탈레스 [Thales, BC 624?~BC 546?]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7현인(七賢人)의 제1인자이며 밀레토스학파의 시조.
별칭 물의 철학/출생지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출생이다. 페니키아인의 혈통이며, 당초에는 상인으로 재산을 모아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BC 585년 5월 28일 일식(日蝕)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적 지식에 의했던 듯하다. 이집트의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기하학을 확립하였다. ‘원(圓)은 지름에 의해서 2등분된다’,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그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 등의 정리(定理)는 그가 발견한 것이다. 또, 닮은꼴을 이용하여 해안에서 해상에 있는 배[船]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고, 자석(磁石)이 금속을 끌어당기는 작용도 그의 발견으로 전한다.또한 만물의 근원을 추구한 철학의 창시자이며 그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다(형이상학). 물은 생명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며, 또 물이 고체 ·액체 ·기체라는 3가지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에서 그렇게 추정한 듯하다(물활론). 변화하는 만물에 일관하는 본질적인 것을 문제로 한 점에 그의 불후의 공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대지(大地)는 둥근 편평상(扁平狀)이며 물 위에 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의 철학자라 불렸다.
· 카오스 [chaos]
여기서 모든 것이 생겼다고 생각하였다. ‘혼돈(混沌)’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으나, 원뜻은 ‘입을 벌리다(chainein)’로, 이것이 명사화하여 ‘캄캄한 텅빈 공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에서는 여기에서 암흑과 밤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오비디우스는 만물의 모든 가능성을 숨긴 종자(semina)의 혼합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신화적 카오스에 비해, 논리적 원리(arch)로서의 자연(physis)을 거론한 데서부터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우주론(kosmologia)이 시작되었다.
·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8.27~1831.11.14]
주요저서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논리학》,《법철학 강요》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생.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뒤빙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 J.C.F.휠데를린 및 F.W.셸링과 교우하였다. 졸업 후 7년간 베른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교 강사가 되었다.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나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 Phnomenologie desGeistes》을 내놓아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 무렵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폐쇄되자 밤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주저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1812∼1816)을 저술하였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 그 동안 《엔치클로페디 Enzyklop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17)를 발표하였으며, 1818년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곧 마지막 주저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1821)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1831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있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이상에 치중, 이 이상을 현실로 실현해야 하며 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그 이상이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알맞게 부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노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헤겔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 ·신(神)이 점차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理性)이고 그 본질(本質)은 자유(自由)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며, 단 한 사람 전제군주(專制君主)만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는 시대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현대는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그의 철학은 그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후세에 다대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 포퍼 [Popper, Karl Raimund, 1902.7.28~1994.9.14]
오스트리아 빈 출생. 1918년부터 빈대학에서, 1925년부터는 빈교육연구소에서 철학·수학·물리학·심리학 등을 배우고, 1928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유대계로서 1937년 뉴질랜드에 망명했다가 1946년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런던대학 강사를 거쳐 논리학·과학방법론 교수를 지내고, 1965년 기사 작위(爵位)를 받았다. 최초의 저서 《탐구의 논리》(1934)에서, 과학(지식)은 합리적인 가설의 제기와 그 반증(비판)을 통하여 시행착오적(試行錯誤的)으로 성장한다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인식론을 제창하였다. 그 후 이러한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사회과학론·역사론·인간론 등을 전개하였는데,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진리에 접근한다는 생각은 현대의 지적(知的) 세계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자유사회의 철학과 그 논적(論敵)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추측과 반박》 《객관적 지식》 등의 저서가 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4부로 된 철학적 산문시.
산 속에 숨어 살던 차라투스트라(고대 페르시아의 拜火敎祖 조로아스터의 독일 이름으로, 책 내용은 이 종교와 관계가 없다)가 ‘신은 죽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얻고 산을 내려와 여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이다. 이 가운데서 니체는 초인(超人)·권력에의 의지·영겁회귀(永劫回歸) 등 그의 중심적인 사상을 전개하고, 창조적인 삶의 긍정과 충실을 설명하였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고 아름다운 어구(語句), 시적 표현을 아로새겨서 이러한 사상을 구상화하여 후에 사상가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과 문학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 카뮈 [Camus, Albert, 1913.11.7~1960.1.4]
출생지 알제리 몽드비 주요수상 노벨문학상(1957)
주요저서 《이방인(異邦人)》(1942), 《전락(轉落)》(1956)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몽드비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버지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빈곤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L.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는 평생의 스승이 된 J.그르니에를 만났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이 보이며, 이때 이미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민, 존재의 부조리성(不條理性) 문제 등이 서정적인 에세이풍으로 서술되었다. 1942년 7월,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는데, 그의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tranger》(1942)은 발표되자, 칭송과 함께 그를 일약 문단의 총아(寵兒)로 만들어 놓았다.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시지프의 신화(神話)》(1942)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써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였다. 희곡 《오해(誤解)》(1944) 《칼리굴라 Caligula》(1945)에서도,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의 어려움을 역설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 《콩바》지(紙)의 주필로서 레지스탕스의 필봉(筆鋒)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나보다도 카뮈가 훨씬 더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일도 있다.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1945)는 전시 중에 썼던 4편의 서간형식의 ‘독일인론(獨逸人論)’으로서, 편협한 애국심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그 후 《페스트》(1947)는 그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었으며, 이것은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암시하면서 페스트의 유행과 싸우는 선의(善意)의 사람들의 행동을 단순 명쾌한 문체와 힘찬 필치로써 그렸다. 희곡 《계엄령》(1948)은 《페스트》의 주제를 극화한 것이다. 시사평론을 쓰면서 연극을 상연하여 청년층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그를 실존주의자로 보는 세상 사람들과 매스컴에 대해서는 항상 그것을 부정했으며, “실존주의가 끝난 데서부터 나는 출발하고 있다”라고 그는 언명하였다. 그러므로 《반항적 인간》(1951)을 둘러싸고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여 10년 가까이 맺어온 우정에 파탄이 갔다는 사실이 뜻밖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희곡 《정의(正義)의 사람들》(1949) 속에서 열렬히 변호되는 제정 러시아의 혁명당원의 행동을 주제로 한 에세이인데, 형이상적(形而上的)·역사적·예술적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반대하여, 점진적·개량적인 중용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발표된 《전락(轉落)》(1956)은 깊은 내성(內省)에서 우러나온, 어두우면서도 순수한 반짝임을 지닌 걸작으로, 사르트르도 절찬하였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 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정치참여에서 정관주의(靜觀主義)로 처신을 바꾼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그 침묵의 배후에 영혼의 격렬한 갈등과 고뇌가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최초의 본격적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 루소 [Rousseau, Jean-Jacques, 1712.6.28~1778.7.2]
주요저서 《신 엘로이즈》(1761) 《고백록》 《에밀》(1762)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17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galit parmi les hommes》(1755), 《정치 경제론 De l’conomie politique》(1755), 《언어기원론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re d’Alembert》(17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新) 엘로이즈 Nouvelle Hlose》(17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民約論) Du Contrat social》(17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 mile》(17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 ·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 Les Confessions》을 집필하였다. 1768년 17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Les R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 구조주의 [構造主義, structuralism]
1960년대에 들어와서 K.마르크스, M.하이데거, S.프로이트 등의 견해에 대립하여 프랑스에서 새로이 형성된 사상적 조류이다.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실존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명확한 형태를 갖춘 사상적 경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류학자·사회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M.푸코, 리시안 세바크, L.알튀세르, 정신분석학자 J.라캉 등이 구조주의를 주창한 주요 멤버인데, 그들 사이에서도 통일된 의견을 발견하기가 어렵다.공통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 등 이제까지의 사상적·사회과학적 업적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현대과학의 종합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특징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 점에 있고,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전개하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에 대해서, 그리고 의미론(意味論) 등을 재구성하려고 한다.현재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성에 주요 공격이 가해지며, 아울러 실존주의 ·인간주의에 대해서 현대적인 통렬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사조(思潮)로서 앞으로도 여러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다.
· 태극 [太極]
음양(陰陽)의 이기(二氣)가 태극의 일원(一元)에서 생성했다고 하는 사상은 《주역(周易)》의 〈계사상(繫辭上)〉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태극을 일원으로 보는 사상은 진한(秦漢) 때의 제서(諸書)에서 볼 수 있으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대악편(大樂篇)〉에는 음악의 근원을 태일(太一)에 있다 하고, 이 태일에서 양의(兩儀)와 음양이 생성한다고 풀이하였다. 또한 《예기(禮記)》의 〈예운편(禮運篇)〉에는 예의 근원을 대일(大一)에 있다 하고, 이 대일에서 천지·음양·사시(四時)가 생성한다고 하였다. 《순자(荀子)》의 〈예론편(禮論篇)〉에 나오는 것은 《예기》와 마찬가지여서, 중국 고대의 전통사상에서는 만물이 생성 전개하는 근원을 일원으로 보고, 이것을 태일·대일·태극 등으로 일컬었으며, 이 일원에서 이기·오행(五行)·만물이 화생(化生)한다고 설명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태일사상이 가장 오래되었고, 태극사상은 후에 정리되어 역사상(易思想)에 도입되었다.
· 고백록 [告白錄, Les Confessions]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작가인 J.J.루소(1712∼1778)의 자서전. 루소 자신의 생애를 사실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의 자아고백의 정열과 로마네스크한 매력 때문에 서양 근대문학의 선구자가 되었고 그 이후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부 1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6권, 1781), 제2부(6권, 1788) 모두 루소가 죽은 후에 출간되었다.제1부에서는 출생에서 1741년까지의 이야기를 적었고, 여기에는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하는 루소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청춘의 싱싱함이 넘쳐 있다. 1765년의 생피에르섬[島] 탈출까지의 이야기가 적힌 제2부에는 박해(迫害)에 대한 편집관념(偏執觀念) 때문에 그 흐름은 어둡고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추구한 자기변호의 색채가 강하다.
· 묵가 [墨家]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의 사상가 묵자(墨子)를 계승하는 학파.
그 사상과 학설은 《묵자》 53편(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비락(非樂) ·명귀(明鬼) ·비명(非命)등 10론(論)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매우 이색적이고, 전국시대의 세상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지향과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여 유가(儒家)와 대립한 유력 학파였다.이 집단은 거자(巨子)를 지도자로 하여 강력한 단결을 자랑하였으며, 그 기반은 지연공동체적인 농촌에 있었다. 묵가의 사적(事績)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대의 거자로서 금활리(禽滑釐) ·맹승(孟勝) ·전양자(田襄子) 등의 이름이 전한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顯學編)에 의하면 묵가는 전국 말기에 3파로 분립되었다고 하는데, 《묵자》 10론 하나하나에 내용이 대동소이한 상 ·중 ·하편(編)이 있는 것은 그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탄압을 받은 이후 쇠미해지다가 전한(前漢) 무제(武帝)에 의한 유교일존(儒敎一尊) 정책으로 완전히 소멸하였다.
· 로크 [Locke, John, 1632.8.29~1704.10.28]
주요저서 《인간오성론》(1690)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 ·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侍醫)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16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1690) 《제3서한》(1692) 《통치이론》(1690)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16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I.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反)스콜라적이었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G.버클리, D.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內在的現象論)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R.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派)의 본유관념(本有觀念)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人智)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實體)’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基體)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色) ·향(香) ·음(音)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延長) ·운동 ·고체성(固體性)과 같이 물(物)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前者)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實體形相)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보편개념의 설명 ·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意味論)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 ·가능성 ·종류 등을 논했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直覺知)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 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知覺)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된 이외에는 정리된 윤리서(倫理書)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 ·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神)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啓示)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理性的論證)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蓋然的)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理神論)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 파르메니데스 [BC 515?~BC 445?]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학파의 시조.
엘레아 출생. 철학시 《자연에 대하여》가 약 160행 남아 있으며, 그 사상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립하는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만이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근본사상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의 성질을 논리적으로 연역(演繹)하였다.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가분(不可分)인 것이며, 불변부동(不變不動)의 것으로서 완결된 둥근 구(球)처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사유(思惟), 즉 이성(理性)만이 진리이며, 이에 반하여 다수(多數) ·생성(生成) ·소멸 ·변화를 믿게 하는 감각(感覺)은 모두가 오류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감각의 세계는 ‘존재하는 것(빛)’과 ‘존재하지 않는 것(어둠)’을 병치(倂置)하며, 이 두 요소로부터 모든 것을 합성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철학의 중대문제를 시사하고, 후에 대두하는 존재론(存在論) 및 인식론(認識論)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존재의 철학자라 불린다.
· 데리다 [Derrida, Jacques, 1930.7.15~]
알제리 엘비아르 출생. 파리의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부터 이 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다.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을 배운 후, 구조주의의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였다. 언어의 기호체계(記號體系)가 자의적인 것이라는 인식에서 언어 위에 조립된 논리학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서기언어(書記言語) 에크리튀르가 수행하는 역할을 중시하였다. 한편, 시차성(示差性)이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하고, 실체(實體)와 직결된다고 생각되어온 개념들이 시차적 특징에 의해서만 뜻을 지니는 것이며, 차이를 재확인하고, 그 행위에 의한 지연과 우회를 거친 뒤에 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에 《근원 저편에 De la grammatologie》(1967) 《에크리튀르와 시차성 L’criture et la diffrence》(1967) 등이 있다.
· 소학언해 [小學諺解]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을 한글로 번역한 책.
저자 주희 /시대 조선 /소장 안동 도산서원
경진자본(庚辰字本). 6권 4책. 1586년(선조 19) 교정청(校正廳)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고, 이를 저본으로 하여 몇 차례의 재간행이 이루어졌다. 16세기의 사림(士林)들은 자기를 수양하는 것[修己]에서 출발하는 실천적 가치규범으로서 성리학을 체득하기 시작하였는데, 《소학》의 규범과 윤리를 몸에 익혀 실천함으로써 학문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중종 때의 사림은 먼저 《소학》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고 《구결소학(口訣小學)》 《소학편람(小學便覽)》 등을 만들어 그 이해를 도왔다. 이런 맥락에서 소학의 번역이 이루어져 1518년(중종 19) 《번역소학(飜譯小學)》이 간행되었으나, 후에 너무 의역(意譯)에 흘렀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직역을 원칙으로 한 《소학언해》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소학의 윤리가 서민의 생활까지 깊숙이 침투하고 성리학의 질서가 정착되어 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6세기 말엽의 국어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중세 국어와 근세 국어의 중요한 차이를 이루는 음운변화와 문법변화가 그때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교정청본이 안동(安東)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전질(全秩)이 간수되어 있다. 1744년(영조 20) 왕명으로 다시 수정한 《어제소학언해(御製小學諺解)》가 있다.
· 마르크스 [Marx, Karl Heinrich, 1818.5.5~1883.3.14]
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 고증학 [考證學]
중국의 명(明)말 ·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이기(理氣)니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 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 ·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 ·호위(胡謂) ·모기령(毛奇齡) ·만사대(萬斯大) ·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 ·훈고 ·수학 ·천문학 ·지리학 ·수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증학은 영 ·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김정호(金正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 콩트 [1798.1.19~1857.9.4]
남프랑스 몽펠리에 출생.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재학 중 교수 배척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였다. 그 후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정치 ·도덕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으며, 생시몽을 알게 되어 그의 잡지 편집을 도우면서 그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콩트는 여러 사회적 ·역사적 문제에 관하여, 온갖 추상적 사변(思辨)을 배제하고, 과학적 ·수학적 방법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절대적인 격률(格率:maxim)은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라는 그의 말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학설의 의(擬)=절대성을 배격하고, 감각적 경험에 의하여 확증할 수 있는 여러 사실과 이것들의 관계에만 전념한다는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또한 그의 유명한 3단계 법칙에서는, 인간의 지식의 발전단계를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인 3가지로 구분하고, 최후의 실증적 단계가 참다운 과학적 지식의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실증과학의 체계는 대상의 복잡성에 따라 차례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질서에 대응하는 社會靜學과 진보에 대응하는 社會動學으로 구분된다)으로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그는 만년에 클로틸드 드 보 부인과 사귀게 되어, 그녀를 환상적인 애정으로 사랑하였으나, 2년 후 그녀가 죽고, 또 실직하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였다. 그의 까다로운 성품 때문에 친구들이 이반(離反)하는 등, 당시의 상황도 원인이 되어 마침내 신비주의에 빠져 인간성을 숭배하는 인류교(그 자신이 대주교이며, 보 부인은 성녀)를 주창하게 되었다. 즉, 전기의 객관적 과학주의는 주관적 ·종교적 상징주의로 변모하였는데, 이 모순적인 변모 속에 인간 콩트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서로는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6권, 1830∼1842)와 《실증정치학 체계 Systme de politique positive, ou trait de sociologie, instituant la religion de l’humanit》(4권, 1851∼1854) 등이 있다.
· 교부철학 [敎父哲學, patris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의 철학 ·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교부의 저술이 정통교리의 권위로서 후대에서도 인용되었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통틀어 교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교부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교부학(敎父學)이라고 한다. 교부는 대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예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도인 사람도 있고 커서 개종한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대문명의 유산, 특히 시인과 철학가의 학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인데, 이들 교부들이 고대문명 속에서 불멸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이를 섭취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구조(構造)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 교부란 그리스어(語)로 저술활동을 한 동방의 교부를 말하고, 라틴 교부란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한 서유럽의 교부를 말한다. 19세기에 J.P.미뉴가 편찬한 《그리스 교부집성》 162권과 《라틴 교부집성》 221권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총괄적인 것이다. 그리스 교부는 사변적(思辨的)이어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궁극의 철학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이 혼재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조화된 그리스도 사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를 거친 다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접촉한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테나고라스는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철학”이라고 부르짖은 2세기의 교부이며 호교가였다.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의학교(敎義學校)를 지도한 클레멘스 ·오리게네스가 있고,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활약한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라틴 교부로는 그 유명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푸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한 로마의 변론가인 그는 이교도적 교양으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고백록》을 썼다. 이것은 이교문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고뇌와 환희를 한 사람의 내면의 역사로 부각시킨 것으로서, 정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가 여기에서 그려낸, 인간의 내면의 지주(支柱)가 되고 빛을 밝혀주는 ‘내면의 신(神)’의 사상은 그 후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 스콜라철학 [Scholasticism]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철학.
중세 초기에 샤를 대제(大帝)는 유럽 각지에 신학원(神學院)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을 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이다. 스콜라학은 이 때문에 중세의 신학(神學)·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 매우 다방면에 걸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도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여 중세철학의 본연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주석·해석이 그 첫째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서는 신(神)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서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은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다.
· 칸트 [Kant, Immanuel, 1724.4.22~1804.2.12]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邊境)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天界)의 일반자연사와 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力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星雲說)’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歸依)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神)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場)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要請)’이라는 형태로 신(神) ·영세(永世)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構想)은 그 후의 《종교론》(17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場)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美)와 유기체(有機體)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 스토아학파 [Stoicism]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 완적 [阮籍, 210~263]
자 사종(嗣宗). 진류(陳留:河南省開封 근처) 출생. 아버지는 후한(後漢) 말의 명사이자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완우(阮瑀)이다.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지냈으므로 완보병이라고도 하며, 혜강(康)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이다. 위나라 말기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강한 개성과 자아(自我) 및 반예교적(反禮敎的) 사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술과 기행(奇行)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살았다. 많은 기행 중 ‘청안백안(靑眼白眼)’의 고사는 유명하다. 정권을 빼앗으려는 사마씨(司馬氏)의 막료를 지냈으나, 권력과의 밀착을 싫어했고, 곤란한 처세와 고독한 사상을 시문에 의탁하였다. 대표작인 《영회(詠懷)》의 시 85수는 자기의 내면세계를 제재로 한 철학적 표백의 연작(連作)이었다. 그것은 뒷날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20수에서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59수에 이르는 장대한 오언시 연작의 선구였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이나 기성권력에 반항하는 자세를 노래한 몇 편의 부(賦) 작품 외에,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과 원초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추구하는 작품을 남겼다. 그 밖의 저서에 《달장론(達莊論)》 《통역론(通易論)》 등이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시문이 약간 수록되어 있고, 그의 전기는 《삼국지(三國志)》 21권, 《진서(晉書)》 49권에 실려 있다.
· 기하학 [幾何學, geometry]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연구의 대상 및 방법은 다양하다. 고대 이집트인(人)은 홍수로 나일강(江)이 범람한 후에는 토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기 위하여 측량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 측량에 의한 도형의 연구를 기하학의 기원(起源)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기하학은 영어로 geometry라 하는데, geo-는 토지를, metry는 측량을 뜻한다. 이집트인이 개발한 이와 같은 도형에 관한 지식은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로 전파되었는데, 경험적이었던 이집트인과는 대조적으로 추상적인 사고방식에 능했던 그리스인은 도형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형성하고, 연역적(演繹的)으로 이를 논하였으며, 특히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의 노력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두 삼각형의 합동, 비례정리 등은 탈레스의 발견이었고, 또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발견되고 증명되었다. 그 당시의 기하학에 관한 지식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Stoicheia》에 집대성됨으로써 유클리드기하학(초등기하학)의 체계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17세기에 접어들어 R.데카르트는 좌표라는 개념을 기하학에 도입하여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을 확립하였다. 이것은 L.오일러의 노력으로 더욱 진전되었고, 그 후 I.뉴턴과 G.W.라이프니츠에 의해서 미적분학이 발견됨에 따라 기하학은 다시 미분기하학(微分幾何學)으로 발전하였다.한편, 르네상스의 성당 건축의 필요에서 탄생된 석공술(石工術)과 축성술(築城術)에 자극을 받아 몽즈의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이 탄생되었고, 이것은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으로 발전하였다. 또 유클리드의 평행선공리는 그 이전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19세기에 접어들어 그것을 부정한 비(非)유클리드기하학이 N.I.로바체프스키, 보야이, G.F.B.리만에 의해 확립되었다. 또한 19세기 말 이래 위상수학(位相數學)의 탄생과 더불어 도형에의 위상도입, 두 도형의 동상(同相)과 위상사상(位相寫像) 등의 개념을 도입한 위상기하를 비롯해 군(群)과 다양체이론(多樣體理論)의 발전과 함께 탄생한 미분위상기하학 등은 수학뿐 아니라 자연과학 전반에 걸쳐 크게 기여하였다.
· 공자 : 생애
공자는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자는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다.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였다.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다. 그러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다.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명심보감 [明心寶鑑]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秋適)이 금언(金言), 명구(名句)를 모아 놓은 책.
1권 1책. 필사본.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장각도서. 원래 19편으로 되어 있다. 후에 어떤 학자가 증보(增補), 팔반가(八反歌), 효행(孝行), 염의(廉義), 권학(勸學) 등 5편을 더하였다. 각 편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금언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제1편은 계선편(繼善篇)이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는 공자의 말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천명(天命), 순명(順命), 효행, 정기(正己), 안분(安分), 존심(存心), 계성(戒性), 근학(勤學), 훈자(訓子), 성심(省心), 입교(立敎), 치정(治政), 치가(治家), 안의(安義), 준례(遵禮), 언어(言語), 교우(交友), 부행편(婦行篇)이 있다. 이 책은 하늘의 밝은 섭리를 설명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인간 본연의 양심을 보존함으로써 숭고한 인격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 대학 [大學]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통(正統)으로 나타내는 사서(四書) 중 중요한 경서(經書). 본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던 것을 송(宋)의 사마 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따로 떼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를 만들었다. 그 후 주자(朱子)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어 경(經) 1장(章), 전(傳) 10장으로 구별하여 주석(註釋)을 가하고 이를 존숭(尊崇)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졌다. 주자는, 경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기술(記述)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경에서는 명명덕(明明德: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지선(止至善: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하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八條目)으로 정리하여 유교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실천과정으로서는 8조목에 3강령이 포함되고, 격물 즉 사물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평천하의 궁극 목적과 연결된다는 것이 대학의 논리이다. 전은 경의 설명이라는 뜻이다. 주자는 본문에 착간(錯簡)과 오탈(誤脫)이 있다 하여 교정하고, 또 ‘격물’의 전을 보충하였다.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주자학을 비판하면서부터 주자의 《대학장구》, 특히 그 보전(補傳)은 유학자간의 논쟁(論爭)의 중심문제가 되었다. 왕양명은 대학고본(大學古本)에 의거하여 대학고본방석(大學古本旁釋)을 지었다.
· 공리주의 [功利主義, utilitarianism]
행위의 기준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즉 사회의 최대다수 구성원의 최대한의 행복을 구하는 윤리·주로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윤리로서, 정치학설에서 공중적 쾌락주의(universalistic)와 같은 뜻이다. 목적론적(目的論的) 윤리의 한 형태이지만, 이기적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또 내면적 윤리에 대해서 사회적·외면적 도덕의 경향을 나타낸다. 17∼18세기의 고전경험론(古典經驗論)과 신학자·고전경제학자, 19세기의 급진주의자에게서 이 주의를 찾아볼 수 있으나, 이를 단순명쾌하게 정식화한 사람은 J.벤담이며, J.S.밀 부자(父子)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또 밀 이후에도 진화론적 윤리학 및 H.시지윅, G.E.무어, 현대 영국 분석철학자의 규범의식(規範意識) 속에서도 그 경향이 보인다. 벤담과 밀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하였는데, 벤담은 쾌락의 계량가능성(計量可能性)을 주장하고 쾌락계산의 구상을 내건 ‘양적(量的) 쾌락주의자’였으나, 밀은 쾌락의 질적(質的) 차이를 인정하여 ‘질적 쾌락주의’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또 내면적인 동기·양심·자기도야(自己陶冶)의 중요성도 인정하여, 심정도덕(心情道德)·완성설(完成說)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 홉스 [Hobbes, Thomas, 1588.4.5~1679.12.4]
주요 저서인 《철학원리》는 제1부 〈물체론〉(1655), 제2부 〈인간론〉(1658), 제3부 〈시민론(市民論)〉(1642, 1647) 등 3부로 나누어졌는데 베이컨 학설보다 더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 제1부 〈물체론〉에서 그는 자연학(自然學)을 철학의 기초에 두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形相因)·목적인(目的因)을 버리고 전실재(全實在)를 물체와 그 운동이라는 동력인(動力因)만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 즉 자연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자연적 물체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을 인위적 물체인 ‘인간’이나 ‘국가’에도 미치게 하여, 감각·감성(感性) 등의 인식의 이론이나 정념론(情念論), 윤리학, 법·사회의 이론에도 적용하였다.
정신은 미세한 물체이고, 인식은 외계의 운동이 감관(感官)에 주는 인상에서 생기며 실재의 모사(模寫)가 아니고 주관적이라 하였다. 이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지적인 판단이나 추리는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후자도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의 물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추상적·보편적 개념은 기호(記號)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중세(中世)의 W.오컴 등에서 현저했고, 또 후일의 영국 경험론에서 보는 고유한 유명론(唯名論)의 전형적인 예이다. 수학(數學)은 앞에서 말한 기호로서의 보편자(普遍者)에 관계되는 지식의 모범이라 하였다.
감정이나 정서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외적 자극에 대한 이론적 반응이 감각인 데 반하여, 실천적 반응은 쾌(快)·불쾌(不快)의 감정이다. 선(善)이란 쾌이므로 인간이 바라는 것이고, 악(惡)이란 불쾌이므로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다. 의지(意志)는 외적으로 결정되며 결정론(決定論)은 필연이다.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없고, 선악(善惡)·정사(正邪)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에 그 판정의 기준이 생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금할 수 없고, 개인의 힘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自己保存)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에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이상적인 국가형태라고 생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자연법과 국가의 원리》(1640) 등이 있다.
· 심학 [心學]
중국의 정주학(程朱學)과 대립되는 ‘심즉리(心卽理)’의 학문체계.
넓은 뜻으로는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유교 전체를 말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송(宋)나라 때의 육상산(陸象山), 명(明)나라 때의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학문을 일컫는다. 왕양명은 정주학을 비판하는 한편, 육상산을 높이 평가하여 ‘성인(聖人)의 학문은 심학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심즉리’를 근본 명제(命題)로 하고 손쉬운 실천방법을 내세웠다. 그러나 정주학파로부터는 선학(禪學)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윽고 ‘심학횡류(心學橫流)’라는 폐단을 낳아 마침내 쇠퇴하였다. 이 심학이 유(儒) ·불(佛) ·도(道) 3교(敎)의 융합과 전위도덕으로부터의 해방 및 학문의 서민화(庶民化) 등에 끼친 영향은 크다.
· 막고야산 [邈姑射山]
북해의 바닷속에 있다고 전하는 신선들이 사는 곳을 이르는 말.
邈 : 아득할 막姑 : 시어미 고射 : 산이름 야山 : 뫼 산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말로, 묘고야로 읽기도 한다. 전설상에 전하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열자(列子)》 황제편(黃帝篇)에서는 열고야(列姑射)라 하고 있다.
《장자》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견오(肩吾)와 연숙(連叔)은 전설상의 신선이다. 어느날 견오가 연숙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초나라의 은사(隱士) 접여(接與)에게서 말을 들었는데, 그게 도무지 크기만 했지 합당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지 돌아올 줄 모르더군. 나는 그 이야기가 마치 은하수처럼 끝없이 이어져 두렵기까지 하였다네. 도대체 길과 뜰처럼 동떨어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네."
"그 말이 어떤 것이었는가?" 연숙이 묻자, 견오가 대답하였다. "막고야산에 신인이 살고 있는데, 피부는 얼음이나 눈처럼 희고, 몸매는 처녀같이 부드럽다네.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과 이슬을 빨아들이며, 구름의 정기를 타고 비룡을 부리면서 세상 밖에까지 나가 논다고 하네. 그가 정기를 한 곳에 모으면 만물이 병들지 않고 곡식이 잘 영근다네. 하도 허황된 이야기라서 믿어지지가 않는군." 그러자 연숙이 말하였다.
"그렇군. 장님은 그 때문에 색깔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그 때문에 종과 북소리를 듣지 못하네. 어찌 형체에만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겠는가. 지식에도 그와 같으니, 지금 자네 같은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일세. 신인의 덕은 만물을 섞어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라네. 세상은 그가 천하를 다스릴 것을 바라고 있으나, 그가 무엇 때문에 마음과 몸을 피로하게 하며 그 일을 하겠는가. 이 사람은 외계의 어떤 사물로도 해칠 수 없으니, 홍수가 나서 물이 하늘까지 닿아도 빠져 죽지 않고, 큰 가뭄에 금석이 녹아내려도 뜨겁다고 하지 않는다네. 먼지나 때, 작은 겨자씨로도 능히 요, 순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가 굳이 천하를 다스리려 하겠는가." 장자가 말하고 있는 막고야산은 바로 무위의 도를 갖춘 자유인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 리케이온 [Lykeion]
그리스 아테네에 있었던 아폴로·리케이우스 신전 근방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김나지움(교육기관)과 정원의 명칭.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곳에서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철학학교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많은 나라에서 학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 장자 [莊子]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莊周)의 저서. 당나라 현종(玄宗)에게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존칭을 받아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고도 한다.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모두 33편이다. 그 중 내편이 비교적 오래되었고 그 근본사상이 실려 있어 장자의 저서로, 외편과 잡편은 후학(後學)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자는 노자(老子)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그의 사상의 밑바탕에 동일한 흐름을 엿볼 수 있다.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분서(焚書)의 화를 입기도 하고, 한(漢) 때 분합(分合)·재편성되기도 하다가 진(晉)의 곽상(郭象) 이후 오늘의 33권으로 정해졌다. 이 곽상주(註)가 완본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본자료이다. 그 후에도 당(唐)나라 성현영(成玄英)의 《주소(註疏)》, 송(宋)나라 임희일(林希逸)의 《구의(口義)》 등 많은 주가 나왔다.《장자》의 문학적인 발상(發想)은 우언우화(寓言寓話)로 엮어졌는데, 종횡무진한 상상과 표현으로 우주본체(宇宙本體)·근원(根源), 물화현상(物化現象)을 설명하였고, 현실세계의 약삭빠른 지자(知者)를 경멸하기도 하였다. 그의 심현한 철학사상서이자 우수한 문학서인 이 《장자》는 위(魏)·진(晉) 때에 널리 읽히고 육조시대(六朝時代)까지 그 사상이 유행하였다.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이 그를 진령(眞靈)이라 하여 제3급에 올렸다.
· 러셀 [Russell, Bertrand Arthur William, 1872.5.18~1970.2.2]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수학자·사회사상가.
국적 영국
활동분야 철학·논리학·수학
출생지 영국 잉글랜드 몬머스셔 트렐렉
주요수상 노벨문학상(1950)
주요저서 《수학원리》(3권, 1910∼1913, 공저) 《철학의 제문제》(1912)
잉글랜드 몬머스셔 트렐렉에서 출생하였다. 명문 귀족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한때 동대학 강사로 근무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운동(反戰運動)이 화근이 되어 대학에서 쫓겨났고, 1918년에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었다. 그 후 유럽 각국과 러시아·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대학의 강의도 맡았으나, 주로 저술에 주력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며,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은 G.프레게의 업적을 계승, G.페아노, 쿠츨러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J.W.R.데데킨트, G.칸토르 등의 현대수학의 성과를 근거로, 19세기 전반에서 비롯된 기호논리학의 전사(前史)를 집대성하였다. A.N.화이트헤드와 공저(共著)인 《수학원리》(3권, 1910∼1913)는 바로 이의 성과이다. 그는 논리의 개념이나 연산(演算)을 기본으로 하여 전체 수학을 그것으로부터 도출(導出)했으며, 나아가 수학적 대상을 실재라고 간주하는 논리주의의 구상을 밝혔다. 그는 이 시도를 실수(實數)의 도출에까지 성공시켰으며 그 외에도 집합론 역리(逆理)의 발견, 그리고 그것의 해결을 꾀하는 계형이론(階型理論), 환원의 공리(公理), 기술이론(記述理論) 등 다양한 창의에 의한 공헌을 하였다. 논리주의의 구상이나 위의 여러 이론은 그 후 K.괴델 및 다른 학자에 의해 부정 또는 수정되었지만, 이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의 의의는 현재도 상실된 것은 아니다.
철학자 러셀의 성과는 특히 이론철학에서 현저하다. G.E.무어, L.비트겐슈타인 등과 함께 케임브리지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도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해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다만 그의 입장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게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한때지만 그는 영국 헤겔학파의 영향 밑에 있었으며, 마이농류(流)인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의 경향도 보였다. 이것에 관한 저서로는 《철학의 제문제》(1912)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 ·존재론의 일반적 경향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논리를 소재(素材) 방법으로 삼았으며, 다른 면에서는 영국 고유의 경험론의 전통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논리적 원자론의 이름에서도 명백한 바와 같이 실재의 이론적 단위를 설정하여, 그것에의 환원이나 분석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 점도 명백하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훗날의 영국 철학의 발전을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적 경력은 길고 또 그 다룬 주제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입장도 다양한 변천을 보인다. 기호논리학의 수법으로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영향은 20세기 철학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저서로는 위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외계의 지식》(1914) 《수리철학 서설》(1919) 《정신의 분석》(1921) 《물질의 분석》(1927) 《의미와 진실의 탐구》(1940) 《서양 철학사》(1945) 《자서전》(3권, 1969) 등이 있다.
· 푸코 [Foucault, Michel Paul, 1926.10.15~1984.6.25]
프랑스의 철학자./주요저서 《광기와 비이성(非理性)》(1961) 《앎[知]의 고고학》(1969)
구조주의의 대표자로 파리대학 반센 분교 철학교수를 거쳐 1970년 이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그 이론과 임상(臨床)을 연구하는 한편, 정신의학의 역사를 연구 《광기(狂氣)와 비이성(非理性)―고전시대에서의 광기의 역사》(1961)와 《임상의학의 탄생》(1963) 등을 저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앎[知]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는 사상에 도달하였다.거기에 바탕을 두고 《언어와 사물》(1966)과 《앎[知]의 고고학(考古學)》(1969)에서 무의식적인 심적 구조(心的構造)와 사회구조, 그리고 언어구조가 일체를 결정하며,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든가, 자아라고 하는 관념은 허망이라고 하는 반인간주의적(反人間主義的) 사상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구조주의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 《광기와 문화》(1962) 등의 저서가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였다.
· 데카르트 [1596.3.31~1650.2.11]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6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普遍數學)’의 구상에 이르렀다. 16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16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光學)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16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幻日)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自然學)을 포괄하는 《우주론 Le Traitde la monde》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이의 단죄사실(斷罪事實)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1637년 《방법서설(方法敍說) Discours de la m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기상학》《기하학》의 세 시론(試論)을 출간하였다.
16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4년에는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派)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延長)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l 헤라클레이토스 [Herakleitos, BC 540?~BC 480?]
에페소스 출생. 에페소스 왕가 출신으로 가독상속(家督相續)을 싫어하여 자기 집도 아우에게 줄 정도로 고매한 지조(志操)을 지닌 그는 때로는 오만불손하기도 하여 당시의 에페소스 시민들은 물론, 호메로스나 피타고라스 등 시인·철학자들까지도 통렬하게 비방하였다. 그가 '만물은 유전한다'고 말한 것은, 우주에는 서로 상반하는 것의 다툼이 있고, 만물은 이와 같은 다툼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요 만물의 왕'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툼 중에서도 그는 그 속에 숨겨진 조화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반발조화(反撥調和)'라 하였다. 이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로고스(理法)라 하였으며 그는 그러한 이법의 상징으로서 불[火]을 내세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불은 전화(轉化)하여 물이 되고, 물은 흙이 된다(下行의 길). 흙은 물이 되고, 물은 또다시 불로 환원(上行의 길)되는데, "하행의 길이나 상행의 길은 모두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이 하나하나의 전화과정은 항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사상을 잠언풍(箴言風)의 문체로 기술하였는데, 너무 난해하였기 때문에 '스코티노스(어두운 사람)'라는 별명이 붙었다.
· 맹자 [孟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이 죽은 후에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들도 있으나, 수미 일관된 체제 등을 들어 일반적으로 맹자의 직접 저술로 인정하고 있다. 송대의 유학자인 주자(朱子) 등에 의해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기의 조기(趙岐)와 주자가 붙인 주석이 가장 수준 높은 해설서로 통용된다. 양혜왕(梁惠王)·공손추(公孫丑)·등문공(文公)·이루(離婁)·만장(萬章)·고자(告子)·진심(盡心)의 7편으로 구성되었다. 양(梁)의 혜왕에게 ‘이(利)’를 구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왕께서는 오직 인의(仁義)를 말씀함에 그칠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는 어구로 쐐기를 박은 첫머리의 기사가 전체 저술의 개요를 이루는데, 공자의 인(仁)에 대해 의(義)를 더하여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다시 본성이 선하다고 전제하여 인간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성선설(性善說)과 민의(民意)에 의한 폭군의 교체를 합리화한 혁명론(革命論)을 중심 기둥으로 삼고 있다. 정의에 따른 사회생활을 강조하고 그 물질적 기반을 매우 중시하였으나, 대인(大人)의 일과 소인(小人)의 일을 구분하여 육체 노동자에 대한 정신 노동자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전체적인 사회·정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지만, 크게는 ‘성선설’로부터 구체적으로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에 이르는 견해들은 시대를 뛰어 넘어 인간 생활의 한 지침이 되고 있다. 빈틈없는 구성과 논리, 박력 있는 논변으로 인해 《장자(莊子)》 및 《좌씨전(左氏傳)》과 더불어 중국 진(秦) 이전의 3대 문장으로 꼽히는 등 문장 교범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으며 한문 수련의 필수적인 교재이다. 또 ‘오십보백보’ ‘알묘조장(苗助長)’ 등의 절묘한 비유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돋우고 논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준다.
· 중용 [中庸]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 알려졌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있는 <중용편(中庸篇)> 이 송(宋)나라 때 단행본이 된 것으로,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불리고 있으며, 송학(宋學)의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여기서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庸’이란 평상(平常)을 뜻한다.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이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다. 이 궁리를 교(敎)라고 한다. 《중용》은 요컨대 이 궁리를 연구한 책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誠)일진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 성으로 돌아가는가를 규명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한편 주자(朱子)는 《중용장구(中庸章句)》라고 하는 주석서(注釋書)를 지었는데, 여기서 주자는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을 위해 《중용》을 썼다고 말하였다.
서경 [書經]
58편(編). 상서(尙書)라고도 한다.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 등 당우(唐虞) 3대에 걸친 중국 고대의 기록이다. 상서는 상고(上古)의 책으로 숭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정권의 수수(授受), 정교(政敎) 등의 기록으로, 고대의 사적(史的) 사실이나 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책이다. 당시의 사관(史官) ·사신(史臣)이 기록한 것을 공자가 편찬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100편이었다고 하나,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焚書)로 산일(散逸)된 후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때 복생(伏生)이 구승(口承)한 것을 당시 통용되던 예서(隸書)로 베껴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한다. 그 후 경제(景帝) 때 노(魯)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을 부수고 발견한 진(晉)나라의 문자로 쓰인 것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한다. 《고문상서》는 일찍 없어지고 현재는 동진(東晉)의 매색(梅)이 원제(元帝)에게 바친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가 《금문상서(今文尙書)》와 함께 보급되었다.
· 예기 [禮記]
49편(編). 오경(五經)의 하나로,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라고 하며 《의례》가 예의 경문(經文)이라면 《예기》는 그 설명서에 해당한다. 그 성립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공자(孔子)의 제자를 비롯하여 한(漢)시대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된 《예기》 200편 중에서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곡례(曲禮) ·단궁(檀弓) ·왕제(王制) ·월령(月令) ·예운(禮運) ·예기(禮器) ·교특성(郊特性) ·명당위(明堂位) ·학기(學記) ·악기(樂記) ·제법(祭法) ·제의(祭儀) ·관의(冠儀) ·혼의(婚儀) ·향음주의(鄕飮酒儀) ·사의(射儀) 등의 제편(諸篇)이 있고, 예의 이론 및 실제를 논술한 것이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중용(中庸)》도 이 중 한 편이다. 《예기정의(禮記正儀)》는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주(注),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574~648)의 소(疏)로 되었으며, 《예기》의 주석서로 통용된다.
로고스 [logos]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인 법칙,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 이 법칙과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理性)을 뜻한다. 파토스(pathos)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본래는 고전 그리스어로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legein’의 명사형이며 ‘말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로고스’는 많은 종류의 파생적 의의를 낳아 고대철학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고대철학은 대개 ‘로고스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말한 것’은 먼저 ① ‘말’ ‘글’ ‘이야기’ ‘연설’이다. 언론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인의 특징으로, 여기서 수사학(修辭學:rhtorik)이 발생하였다.
② 이어서 그것은 사물의 ‘설명’ ‘이유’ ‘근거’를 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물의 정의(定義) ·논증(論證)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인은 로고스를 이런 뜻으로 추구하여 논증과학(論證科學:epistm, scientia)과 철학(哲學:philosophia, sapientia)을 탄생시켰다.
③ 또 로고스는 정의에 의하여 파악되는 사물의 ‘본질존재(本質存在:그‘무엇인가’)’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사물의 ‘성립(physis:자연 ·본성)’을 규정하고, 각 사물을 각각 고유하고 일정한 것이 되게 하는 ‘모양(eidos:forma, 本質構造)’이다. 그러나 사물이 일정한 것으로서 한정됨은 그것이 다른 사물과 구별됨으로써, 곧 다른 사물과의 관계 안에 놓이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로고스는 이 관계를 다루는 것으로서 어떤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비율(比率)’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에 ‘공유(共有)하는 것(koinon)’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여기서 만물은 하나의 로고스에 의하여 지배되고, 이 로고스를 인식하는 것 안에 지혜가 있다고 하였다.
④ 또한, 로고스는 말을 하고 사물의 존재의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인간의 ‘분별’ ‘이성’을 뜻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로고스에 의해 파악되는 사물의 존재는 감각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로고스와 감각의 구별을 강조하였다. 고대철학의 로고스성(性)은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단서가 제공되었다. 인간은 말을 함으로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하였다. 고대 말기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os)는 근원이 되는 ‘일자(一者)’는 로고스를 초월한다고 하였다(신비주의). 그리스도교 사상에서의 로고스는 세계창조에서의 신의 사상내용이며 제2의 위격(位格)인 ‘아들’이다. 이들 사상은 후세의 유럽 철학에 오래도록 많은 영향을 끼쳤다.
· 미메시스
플라톤에서 이데아와 개물(個物)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
모방(模倣) ·흉내와 함께 예술적 표현도 의미하는 수사학(修辭學) ·미학 용어다. BC 5세기경 피타고라스파(派)에 따르면 음악은 수(數)의 미메시스(모방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러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플라톤은 여러 가지 개체(個體)는 개체가 되도록 한 형상(形相: idea)을 흉내낸다고 하여, 이에 의해서 현상계(現象界)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이유로 삼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상계는 원형의 모방이다. 그는 주요저서 《국가론(國家論)》에서 목수나 화가나 작가가 모두가 집을 짓지만, 목수의 집에 비교해서 화가나 작가의 집은 허구(虛構)이며, 이것을 가상(假象)이라 하여 예술을 소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을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오히려 예술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 플라톤 [Platon, BC 429?~BC 347]
주요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향연》 《국가론》
아테네 출생.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愛知: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論題)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德)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前期對話篇:《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메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등), ②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壯麗)한 미토스(mythos:神話)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論)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론》 등), ③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파르메니데스》《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 ·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線分) ·동굴 ·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墓標)’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 사단칠정 [四端七情]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을 말하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말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측은지심)], 자신의 불의(不義)를 부끄러워하고 남의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수오지심)],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사양지심)],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시비지심)]의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칠정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에 나오는 말로 기쁨[喜]·노여움[怒]·슬픔[哀]·두려움[懼]·사랑[愛]·미움[惡]·욕망[欲]의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가리킨다.
원래 사단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과 관련된 윤리적 범주에, 칠정은 인간의 감정을 총칭하는 인성론의 범주에 각각 속하여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던 말이었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성리학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두 개념은 인간 심성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도덕적 성격을 띠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각각 나타내는 상반된 의미로 인식되어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곧 성리학에서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심성(心性)이 일치한다고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명제 아래, 우주 자연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바탕으로 이기론(理氣論)을 발달시켰고 다시 이를 근거로 하여 인간 심성의 발생 과정과 그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해명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단 칠정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 이데올로기 [Ideologie]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제형태.
‘관념형태’ 또는 ‘의식형태’로 번역되기도 하나 원어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사상이나 관념형태의 내용을 순수하게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이데아적 견해라 한다. 이에 대하여 관념형태를 본인의 사회적 기반과 관련시켜 그 이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이데올로기적 견해라 한다. 이데아적 견해는 자칫하면 인간의 의식형태를 현실 생활에서 분리하여 관념론으로 흐르게 하기 쉬운 것이었으나, 중세의 봉건사회가 변혁되어 F.베이컨이나 T.홉스에 의하여 이데아의 신비성이 부정된 결과 이데올로기적 견해가 유력해졌다.
· 시학 [詩學, Poetica]
원제는 peri poitiks인데, ‘시작(詩作)에 관하여’라는 뜻이다.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저서도 공간(公刊)을 목적으로 한 저자 자신의 저술이 아니고, 강의초안(講義草案) 또는 청강자의 필기 노트류로, 서술에 일관성이 없고 문체도 조잡하여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곤란한 부분이 많다. 현존하는 원본은 26장(章)으로 되어 있으나, 그 대부분은 비극론이 차지하고 있다. 비극론에 이어 희극을 논한 제2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 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또는 연극)을 문학의 최고 형식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의 창작론이 실질적으로 연극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예술활동 전반이 인간의 모방본능에 뿌리박고 있다는 유명한 모방설에서부터 논술은 전개된다. 모방의 수단 ·대상 ·방법에 의하여 예술의 장르가 나누어지는 것을 설명하고, 여기에 따라서 연극의 정의를 내린다. 이어 비극과 희극의 구별, 이들에 대한 기원을 설명하고 제6장에서는 앞의 말한 내용을 정리하여 비극의 정의를 내리는데, 유명한 ‘정화설(淨化說:카타르시스)’은 이 정의의 일부를 이룬다. 비극은 관중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을 유발시키고, 이러한 감정에 의하여 같은 종류의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흔히들 해석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 진의에 관해서는 예부터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비극의 구성요소로서 이야기의 줄거리 ·성격 ·문체 ·사상 ·시각적 효과 ·작곡 등 6가지 요소를 들고 각 구성요소에 관하여 실례를 들어 논술하고 저자가 가진 비극의 이상상(理想像)을 묘사해 보이고 있다. 20∼22의 3장은 문체에 관한 내용으로 거의 문법론 또는 문체론적인 것이다.
· 아포리즘 [aphorism]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와 파스칼의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은 가장 널리 알려진 아포리즘의 한 예이다. 문예 또는 철학적인 아포리즘을 모은 책으로는 라 로슈푸코의 《잠언집》, 콜리지의 《내성(內省)의 안내》, 니체의 《서광(曙光)》 등이 있다. 아포리즘은 일견 ‘이언(俚言)’이나 ‘속담’ ‘처세훈’과 흡사하지만, 이언이나 속담은 널리 유포되어 사용되면서도 작자가 분명하지 않으나 아포리즘은 작자의 독자적(獨自的)인 창작이며 또한 교훈적 가치보다도 순수한 이론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점이 ‘처세훈’과는 다르다
· 외경 [外經, Apocrypha]
성경의 편집 선정 과정에서 제외된 문서들.
외전(外典)·경외경(經外經)이라고도 한다. 정경(正經)과 대비되며, 그리스어 형용사 아포크리포스(apokryphos:감추어진)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구약의 ‘70인역’에는 포함되고 헤브라이어 성서에 들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처음엔 문학적 용어로 일반대중에는 금지된 책이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 쓰여진 14권 혹은 15권의 특별한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속하는 책은 다음과 같다. 《제1에스드라서》《제2에스드라서》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상(上)》 《마카베오하(下)》 등이다.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 경우 외경은 총 14권이 된다.
외경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명칭도 서로 다른데, 가톨릭 학자들은 외경을 제2정경(正經: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종교적인 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외경의 형성 경위는 이스라엘 역사 중 바빌로니아 포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해야만 하였던 이스라엘인들은 포로기 이후에 성전의 재건과 헤브라이어 성서의 정경화 작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헤브라이어 정경이 율법서(《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예언서(《여호수아서》부터 《12소선지서》까지), 성문서(聖文書:그 이외의 《시편》 《잠언》 등을 대표로 하는 문학서)로 확정되면서 유대인들에게 규범적인 문서로 등장하였다(90년경).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하면서 그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를 당시 국제공용어로 만든 이후로, 점차 모국어인 헤브라이어를 잊어 가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BC 3세기 중엽), 이 때 원래의 헤브라이어 성서에는 없던, 그리스어의 종교서적들이 삽입되었다. 이 외경의 종교적 가치에 대해서도 신 ·구교가 상이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대 동방교회가 4세기 이래 외경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반면, 라틴 교회에서는 외경에 큰 비중을 두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외경에 대한 이해는 루터의 견해를 빌려 설명할 수가 있는데, 그는 “외경, 이는 성서와 동등시될 수 없는 책이지만, 읽어서 유익하고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경은 역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구약외경은 특히 신약성서 이해에 큰 공헌을 해왔다.
· 존재와 시간 [存在-時間]
1926년 하이데거가 37세의 나이에 완성한 저작으로 1927년 초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펴낸 학술잡지 《철학 및 현상학 탐구 연보》 제8집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처음에는 2부 6편으로 구성되었으나 1부 1편인 현존재의 예비적 분석과 2편인 현존재와 시간성만이 저술되었다. 그가 《존재와 시간》에서 함께 저술하지 못한 부분들은 이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 《숲길》(1934∼1946),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 등의 연속되는 저서들에 의해서 보완되고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그가 의도한 것은 존재자의 존재 또는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존재자가 구체적인 사물로서 주관에 의해서 포착되는 것임에 반해 존재는 자신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자는 존재를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므로 존재자에 대한 탐구로부터 존재에 대한 단서를 가질 수 있다. 세계에는 무수한 존재자가 있다. 이중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갖는 존재자는 오직 현존재(인간)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존재에 대한 물음은 현존재의 분석으로부터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인 현존재의 분석이 현존재의 존재론적 분석이며 그것이 곧 기초존재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존재와 존재의 관계맺음의 방식으로부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하이데거는 해석학적 현상학을 방법론으로 사용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이 실존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현존재를 이미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로서 파악한다. 사물로서의 존재자나 도구적 존재자가 아닌 현존재는 세계 안의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맺음을 통해 존재 양식을 갖는다. 그러나 여기서 현존재의 고유성은 타인들의 존재 양식 속으로 해체되어 버린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계기의 일상성과 군중의 관습성, 평균성 등이 그 예이다. 현존재는 이러한 비본래적인 존재 양식으로부터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본래적인 자기로 존재할 것을 결단해야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 방식이 실존이다. 실존은 시간성 안에 놓여 있다. 이때 밝혀지는 현존재의 본질은 죽음을 향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죽음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려 한다. 이것은 또 다른 비본래적인 존재 양식이다. 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위해서 현존재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본질에 대해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본래성을 증명하는 현상이 바로 양심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에 의해 본래적인 존재 방식이 선택되는 것을 결의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결의성으로부터 현존재는 본래적 자기로서 존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기투한다. 세계 안에 이미 놓여 있으면서 동시에 죽음을 향하며 또한 본래적 존재 양식을 위해 기투하는 현존재의 존재 구조는 시간성 안에 놓여 있다. 즉 현존재의 존재는 시간성에서 현시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절된 시간 계기가 아니라 통일적 현상으로서 역사에서 지속하는 생기로 바라본다.
《존재와 시간》은 해석학, 현상학, 실존주의와 같은 현대 철학 분야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한스 요나스(Hans Jonas) 등은 그의 철학을 이어받아 사회철학과 생태윤리학 등에 새롭게 적용했다. 1962년 영어 번역판이 출판 되면서 영어권 국가의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유한성, 죽음, 실존 등의 개념 때문에 하이데거의 철학은 실존주의 철학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이 실존주의적으로 이해되는 것을 거부했다.
· 후한서 [後漢書]
120권.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송(宋)나라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으로, 후한의 13대(代) 196년간의 사실(史實)을 기록하였다. 기(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8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지(志) 30권은 진(晉)의 사마 표(司馬彪)가 저술한 것이다. 후한의 역사서로는 범엽 이전에 이미 《동관한기(東觀漢紀)》를 비롯하여 사승(謝承)·설형(薛瑩)·화교(華嶠)·사침(謝沈)·애산송(哀山松)·장번(張)·사마표 등의 《후한서》가 있었는데, 범엽은 이 저술들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 견해로 이 책을 쓴 것이다. 또한, 범엽 이전의 저술들은 모두 일실되고 없는 형편이어서 이 책이 후한서의 정사(正史)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의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한(韓) 및 왜(倭)의 전(傳)이 있어서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다음의 고전(古典)으로 알려져 있
· 천지지지자지아지 [天知地知子知我知]
양진은 후한의 안제(安帝) 때의 사람이다. 그는 관서(關西) 사람으로, 박학(博學)하고 청렴결백하여 사람들이 '관서의 공자(孔子)'라 불렀다. 그런 그가 동래군의 태수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는 도중에 창읍(昌邑)에서 묵게 되었다. 저녁 늦게 창읍의 현령인 왕밀(王密)이 찾아왔다. 왕밀은 양진이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 그의 학식을 높이 사 무재(茂才: 관리 등용 시험에 합격한 사람)로 뽑아 준 사람이었다. 이런 왕밀을 양진은 반갑게 맞이하였다. 지나온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왕밀은 소매 속에서 황금 열 근을 꺼내어 내밀었다. 양진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양진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나는 옛 지인으로서 자네의 학식과 인물도 기억하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잊은 것 같군." "아닙니다. 이건 뇌물이 아니라 지난날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뿐입니다." "자네가 영진(榮進)하여 나라를 위하여 진력하는 것이 나에 대한 보답이네." "지금은 밤중이고, 방안에는 태수님과 저뿐입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알지 않는가!" 왕밀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양진은 후에 태위(太尉)에까지 올랐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보여 준다.
· 베이컨 [Bacon, Francis, 1561.1.22~1626.4.9]
주요저서 《학문의 진보》(1605) 《노붐 오르가눔》《뉴 아틀란티스》(1627) 《수필집》(1597)
런던 출생.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임스 1세 치하에서는 사법장관과 기타 요직을 지내 ‘벨럼의 남작’, 이어서 ‘오르반즈의 자작’이 되었다. 1613년에 검찰총장, 1618년에 대법관 등 날로 권세가 높아갔으나, 수뢰(收賂) 사건으로 의회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정계에서 실각된 후 만년을 실의 속에 보내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냉정하면서도 유연한 지성을 가진 현실파 인물이었으며, 근세 초기의 사상가답게 그 역시 천동설을 신봉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대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완전히 불식하지 못한 전통적인 구(舊)사상의 영향하에 있던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인 의도는 스콜라 철학의 불비 ·결함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험론적 방법을 발견 ·제창하려는 데 있었다. 즉, 그는 우주 일체의 활동의 원인을, 특히 우리들 인간이 자유롭게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원인을 규명하려고 힘썼으며, 그러기 위해서 인류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지적 재산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거기에 무엇이 결핍되었고 무엇을 보충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저서 《학문의 진보》에서 말하였지만, 처음에 《학문의 대혁신》 전 6부의 집필을 구상하여 그 계획을 대규모로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간행된 것은 3부뿐이었고, 특히 제1부의 《학문의 진보 The Advancement of Learning》(1605)와 제2부의 《노붐 오르가눔 Novum Organum)》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서 《오르가논》에 대항하는 것)(1620)이 중요하다. 그는 기억 ·상상 ·이성이라는 인간의 정신능력 구분에 따라서 학문을 역사 ·시학 ·철학으로 구분하였고, 다시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최대의 관심과 공헌은 자연철학 분야에 있었고 과학방법론 ·귀납법 등의 논리 제창에 있었다.
그는 우선 인간 지성의 도리의 접근을 방해하는 편견으로서 4종의 이도라(idora:우상 또는 환영)를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① 종족의 우상, ② 동굴의 우상, ③ 시장의 우상, ④ 극장의 우상 등이다. ①은 인류라는 종족에 대한 보편적인 선입관이고, ②는 개인적 편견으로서, 마치 동굴 속에 있듯이 자연의 빛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비유한 것이며, ③은 언어의 부적당한 사용에 기인하는 것으로, 시장에서 있지도 않은 풍설이 나도는 것과 같은 것이며, ④는 논증의 잘못된 규칙이나 철학의 그릇된 학설과 체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치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가공의 이야기에 비유되는 것과 같은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편견을 일소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삼단논법은 지식의 확장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실험과 관찰에 기본을 둔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였다. 즉, 그것만이 다수의 사례를 모아서 표나 목록을 만들어 사상(事象)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이 말한 본질은 여전히 중세적 ‘형상(形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자연법칙의 의미도 명확하지 못하며, 수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자연 속의 보편적 법칙을 양적 관계로서 파악하는 수단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이론이 매우 불충분하였지만, 근대과학의 방법의 중요한 일면을 강조한 것만은 틀림없다. 바꾸어 말하면, 베이컨에 있어 ‘형상’의 탐구는 형이상학이었지만, 그 형이상학의 응용부문은 미신적 마술과 구별된 ‘자연적 마술’이었다. 여기에 르네상스적 마술이 근대과학의 공학적 기술로 전신(轉身)하려 한 전환점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새로운 마술, 즉 발명·발견을 뜻하는 대로 성취시킬 수 있는 기계공학적 마술의 달성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뉴 아틀란티스 The New Atlantis》(1627)라는 미완성의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항공기·잠수함 ·인공의 비 ·합성금속 등의 과학적 발명을 실현하고 있는 이상국의 꿈을 묘사하여 나타냈다.
· 감실 [龕室]
불교 ·유교 ·가톨릭 등 종교에서 신위(神位) 및 작은 불상 ·초상, 또는 성체(聖體) 등을 모셔둔 곳.
석굴 ·고분 등의 벽 가운데를 깊이 파서 석불을 안치하거나, 묘의 주인공의 초상을 그려 놓은 곳도 역시 감실이다. 석굴암 본존불(本尊佛) 주위를 둘러싼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 위에는 10개의 감실을 파서 감불을 안치하였다. 사찰의 법당 안 불좌(佛座) 위에 매다는 작은 집모양으로 된 닫집도 감실에 포함된다. 가톨릭교에서도 성당 안에 성체를 담은 성합(聖盒)을 넣어둔 곳을 감실이라고 하는데, 라틴어 ‘tabernaculum’의 역어이다. 유교에서는 사당 안에 신주(위패)를 모셔 두는 곳을 감실이라고 한다.
· 금권정치 [金權政治, plutocracy]
경제력이 있는 소수의 부유한 계층이 지배하는 정치. 한국에서는 흔히 금력(金力)에 의해서 좌우되는 정치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에서 사용된 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에 의한 정치(aristokratia)와 부에 의한 정치(plutokratia)를 대립시켰고, 플라톤은 종교의 지배와 부의 지배를 대립시켰다.
· 향연 [饗宴, Symposion]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찬미한 문예적인 내용의 중기(中期) 대화편(對話篇).
비극시인 아가톤의 집에서 열린 축연(祝宴)에서 에로스에 대한 찬미연설을 아리스티데스로부터 전해 들은 아폴로도로스가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즉 축연에 모인 손님들은 차례로 연애신(戀愛神) 에로스에 대한 찬사를 하게 되었는데, 파이도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릭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에 이어 소크라테스가, 옛날에 무녀(巫女) 디오티마에게서 들은 연애관을 피력한다. 육체의 미에 대한 추구에서 영혼의 미에 대한 추구로 승화되고, 마침내 미 자체의 관조(觀照)에 도달하는 것이 연애의 올바른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때 소크라테스의 신봉자 아르키비아데스가 취해서 들어와, 에로스 예찬을 갑자기 소크라테스 찬미로 바꾸어 버린다.
· 스피노자 [Spinoza, Baruch de, 1632.11.24~1677.2.21]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유대교단의 학교에서 헤브라이어와 성전(聖典)을 공부하였고, 카바라의 신비사상에도 접하였으나, 졸업 후에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쌓아 점차 이단적인 서구적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수학 ·자연과학도 공부하였고,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 학설에 의거하여 성전과 조상의 학문을 대담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려 1656년 끝내 파문선고를 받았다. 유대교 광신자 중에는 그의 암살을 기도하는 자까지 출현하였으므로, 그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한가한 시간이 생겨 연구생활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신(神) ·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짤막한 논문》 《지성 개선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을 집필하였고, 《데카르트 철학 원리 Renati de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1663)를 출판하였다.
1663년 폴부르크로 이사하였고, 1670년 다시 헤이그로 이사하였다. 16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 정교수로 초청하였으나, 사상의 자유와 《에티카(윤리학)》의 완성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 해에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이것이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15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주저 《에티카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1675년 완성)를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그 자체가 사후 100년 동안 무용지물로 매장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여가에 렌즈를 갈아서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는 《국가론 Tractatus politicus》(1677)을 마지막 저작으로 남기고 폐결핵으로 죽었다.
F.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평하여 ‘신에 취한 사람’이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이다”라고 하는 범신론(汎神論)의 사상을 역설하면서도 죽은 후에까지 유물론자 ·무신론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신이란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신이 아니고, ‘신은 즉 자연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에 있어 만물은 신의 형태를 빌린 것이고, 자연을 초월한 곳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개물(個物:個體)은 신의 내적 필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이 신에서 유래된 인과(因果)의 사슬에 의해 엄밀히 결정되는 필연(必然)의 세계를 말하면서, 인간의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스피노자는 사물에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자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근거로 정치와 도덕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간에게 있어 자율적인 이성의 작용이 자존성(自存性)이며, 도덕의 실제 목적은 이성의 작용으로 생기는 희열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 이성의 최고 작용은 신과의 필연적인 관계에서, ‘영원한 형상 밑에서’ 사물을 직관하는 것으로서 이것에 따르는 자족감이 바로 ‘신의 지적 사랑’이며, 여기에서 도덕의 최고 이상이 추구되었다. 스피노자 자신은 무신론자 ·유물론자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지만, 그의 철학 특히 자연이라는 범신론이나 연장(延長)의 속성 사고방식 속에는 이러한 해석을 낳을 소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