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깊어가니 가을이 가득하다.
친구 넷이 모였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 셋, 중학 친구 한명이다.
한 친구가 일흔낭만이라고 카톡방 이름을 지었다.
다들 사는 곳이 다른지라 전주에서 모여 한 차로 가는 2박3일 일정이다.
1일차 : 전주 출발→거창 서상면소재지(중식)→월성계곡→성불사→허브팜민들레울→북상면 임씨고가 한옥→수승대
→금원산자연휴양림→만찬
2일차 : 휴양림→금원산생태수목원→거연정,동호정→황산마을 돌담길→농월정(중식)→개평마을(일두 고택, 소나무군락지)
→함양 상림→대봉산자연휴양림→만찬
3일차 : 휴양림→대봉휴양랜드 모노레일→대봉산정상→지안재,오두재→마천,산내,운봉→전주
여행은 항상 즐겁다.
이번 친구들과의 여행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계절도 얼마나 좋은가?
만산 홍엽에 노란 단풍이 띠를 두른다.
길거리에는 낙엽이 쌓이고 흩어진다.
가는 날 늦가을비가 오고, 찬 바람에 낙엽비가 내리니 기가 막히다.
여행기간 동안에 잠시나마 첫눈 같은 눈도 내렸다. 먼 산에 무지개도 떴다.
하루동안에도 날씨가 뒤바뀌니 가는 가을 서러운게 있었나 보다.
거창 땅은 이른 겨울과 늦가을이 교차하고 있었다.
남덕유산에서 내려온 물은 유유히 흐르고, 우리는 물길따라 간다.
월성계곡은 한 여름에만 좋은게 아니었다.
허브팜민들레울은 월성계곡을 자연 그대로 활용한,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카페이다.
카페에 정자가 있고, 정자 위 탁자에서 커피를 마신다.
바위 마다 테이블이 있고, 색갈이 다 다르다.
허브 농원도 있어, 허브향이 가득하다.
좋은 곳에 가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다.
수승대는 거창 제일의 관광지답게 잘 정돈되어 있고 경관이 빼어났다.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가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다.
수승대 원래 명칭은 수송대(愁送臺)란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백제 사신을 신라로 보낼 때 '근심어린 마음으로 보내는 곳'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조선시대 퇴계 이황선생이 이곳에 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수승대(搜勝臺 승리를 찾은 곳)로 고쳤다 한다.
이곳이 전라도 땅이었다면 어림없는 일이다.
이름은 씁쓸했으나 풍광만은 수려했다.
금원산휴양림 가는 길목에 사과과수원이 여러 곳이다.
한 곳을 들렸다.
사과가 선별기를 타면서 크기에 따라 자동으로 굴러 내린다.
예를들면, 17호 칸에는 17호에 맞는 크기의 사과만 굴러 내려온다.
17호는 5Kg 사과박스에 17개가 포장되는 크기이다.
사과박스가 10Kg짜리이면 위 아래로 17개씩 담겨 포장된다.
위는 좋은 것으로, 안 보이는 아래는 안 좋은 것으로 그렇게 포장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주인은 맛보라고 권하면서, B품이라며 큰 걸로 한아름 담아서 봉지째 준다.
댓가를 치르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냥 가져 가란다. 아직 인심이 살아 있다.
거창 사과이다.
막 딴 것이라 숙성이 안 됐음에도 정말 달고 맛있다.
친구들은 이튿 날 그 과수원에 가서 사기도 하고, 택배를 보냈다.
택배는 떨어져 사는 아들 딸들에게 보내는 택배이다.
저녁이다.
저녁은 술이다.
술을 좋아 하는 사람에게 술은 곧 행복이다.
과음은 몸에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술이 좋다는 유혹을 참지 못한다. 행복이기 때문이다.
주당간에는 죽도 잘 맞는다.
한잔 술에 또 한 잔이 오간다.
주도권이 술이 센 사람에게 넘어간 느낌이다.
네명 모두 달랐다.
잘 걷고, 술도 잘 먹는 친구.
잘 걷지만, 술은 못하는 친구.
잘 걷지 못하지만, 술은 잘 하는 친구.
잘 걷지도 못하고, 술도 안 하는 친구.
누구나 다 한 때는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다.
세월이 흘렸다.
그런 차이가 있음에도 내면은 평등하다.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한 것이 아니고, 나이 앞에 평등하다.
돈도, 명예도 나이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윤심덕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고 했지만 그건 염세다.
사랑만은 우리가 죽을 때 까지 가져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금원산휴양림은 규모가 대단하다.
경상남도 산림환경연구원에서 운영하는 도립휴양림이면서 금원산생태수목원도 같이 있다.
정문 관리사무소에서 숙소까지 한참을 가야 하고, 또 숙소에서 한참을 가야 생태수목원이 나온다.
휴양림과 수목원으로 갖춰야 할 것은 다 있는 느낌이다.
숙소도 맘에 든다.
꽃피는 봄날 가족과 함께 다시 찾고 싶은 휴양림이다.
휴양림 산책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수목원을 거처 휴양림을 나왔다.
이제 거창 지나 함양이다.
남덕유산에서 내려온 물이 남강이 되어 화림동 계곡을 이루고, 산청 지나, 진주, 사천을 거쳐 남해로 흐른다.
화림동계곡에는 유서 깊은 정자가 여러 개 있다.
그 중 가장 고풍스러운 정자는 거연정이고,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농월정이다.
함양군에서는 거연정에서 농월정에 이르는 화림동계곡에 길을 내고 목재데크를 설치해 둘레길을 냈다.
여행 다니다 보면 "이런 곳에 이런 시설을 갖추다니" 하면서 대단하다는 느낌을 갖게하는 곳을 만나곤 하는데
이것이 민선 지자체의 힘이다.
무모하거나 쓸데 없는 것에 세금을 낭비한 곳도 발견되곤 하지만...
개평마을은 함양 지곡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전통 한옥마을이다.
전국적으로 한옥마을이 여러 곳 있지만 가장 업그레이드된 곳은 전주한옥마을이고, 그 다음은 안동 하회마을일 것이다.
개평 한옥마을은 참 마음에 들었다. 때가 타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그 중 일미는 일두 정여창 선생 고택이다.
조선 학문과 문벌을 얘기할 때 흔히 "좌안동 우함양"이란다.
정여창 선생은 조선 오현 중 한 분으로 함양을 대표하는 조선 성종 때 큰 스승이자 성리학의 대가이다.
일두선생은 젊은 시절에 지리산에 들어가 3년동안 나오지 않고 학문을 연마했다 한다.
일두(一蠹)는 "책을 좀 읽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을 위해 한 일이 없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에 비하면 자신의 삶은 한마리 좀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좀벌레 '두'자를 호로 썼다.
그의 겸손은 고택에도 고스란히 서 있었다.
안채는 평범했지만, 손님을 맞는 사랑채는 높았고, 기품 있다.
사랑채 마당 소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된단다.
울타리 건너에 솔송주 전시관이 있다.
술은 역시 친구를 유혹한다. 나는 친구에게 도수 높은 증류주를 권한다.
상림이다.
친구는 말했다.
상림을 재발견했다고.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며..
전주에서 멀지도 않은데 말이다.
대봉산 천왕봉(1,227m)은 덕유산 향적봉(1,614m)과 지리산 천왕봉(1,915m)의 중간쯤에 있는 산 봉우리이다.
함양에는 1,000m가 넘는 산이 하도 많아 개발 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 함양군에서 야심차게 투자하여
대봉산휴양랜드를 조성하였다.
그리하여 휴양림을 개장하였고, 휴양랜드에는 모노레일과 집라인이 설치되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였다.
모노레일은 국내 최고높이(대봉상 정상까지 운행), 최장길이(3.9Km)이면서 원형으로 순환하는 코스로 만들어졌으며,
내려올 때는 모노레일 말고도, 국내 최장거리 집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스릴을 맛 볼 수 있다 한다.
우리는 운 나쁘게도 모노레일 티켓까지 구했지만 타지 못했다.
하필 그날 정상에 눈이 내려 운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남녁인데도, 11월초순인데도, 높은 산 위는 하얗게 눈이 쌓였다.
잠깐이지만 휴양림에도 눈발이 날렸다.
휴양림은 새 집이라 더욱 좋았다.
모든 것이 새 것이다.
우리 마음도 새 것에 물들어가는 저녁이었다.
어스름한 초저녁 길을 나섰다. 혼자이다. 걷는게 좀 부족했나 보다.
표지판은 치유의 숲인데 길고 긴 아스팔트 포장도로다.
마음 같아선 그 길 끝까지 가고 싶다.
한편은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한편은 단풍진 나뭇잎과 낙엽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어둠이 깔리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 왔다.
아니, 도로 차단막대에 자물쇠가 채워진 길, 아무도 오가지 않는 적막강산에 가로등이라니..
우리나라는 치안 안전이 훌륭한 나라인지, 낭비가 심한 나라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혼자만이 자유를 누리는 것도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하여 숙소에 들어 왔다.
술잔 앞에 정담이 오간다.
남자들은 가족 얘기는 안 한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 남 얘기이다. 그리고 또 있다. 어릴 적 얘기, 군대 얘기다.
여기 또 네 부류가 있다.
잠을 일찍 자면서 누웠다 하면 코 고는 친구.
잠을 일찍 자지만 뒤척거리며 더디게 자는 친구.
잠을 늦게 자지만 바로 잠드는 친구.
잠을 늦게 자면서도 바로 자지 못하는 친구.
다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같이 여행을 다니고 있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어림 없는 일이다.
오도재이다. 기와지붕 현판에 "지리산제1관문" 글씨가 또렷하다.
남덕유산 방향 먼 산 아래 무지개가 떴다. 이것도 행운이다.
오도재 안에 지안재가 있다.
지안재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구비구비 휘돌아가는 길은 감탄스럽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길을 넓히는데 민간인 소유 땅을 매입하지 못해 그 땅을 피하면서 만들었는데 이렇게 멋진 길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길에 예술이 더하니 자연친화적이면서도 멋지다.
수풀과 녹음으로 꽉 찬 계절에는 시야를 가리니 이 풍광을 볼 수 없고, 낙엽지고 풀잎마저 없어진 지금이 딱 보기 좋은 때이다.
한 친구는 마음이 바쁘다. 일 하는 쪽에서 어떤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신경 쓸 것 없다 하면서 일정대로 하자고 하지만 한두개 생략했다고 어디 대수이겠는가.
친구는 배려이다.
사람들은 얘기할 수 있다.
가족 놓아두고 며칠씩 다니면 이상하지 않냐고.
남자들 끼리 다니면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냐고.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니 하는 얘기라 여기고 괘념하지 말게나."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잘도 다니지 않는가, 괜히 그런거지. 아니 그런가?"
"가족이 우선이긴 하지만, 우리는 어쩌다 한번이잖는가? 집에 들어갈 때 빈 손으로 가지는 말게나."
"추억 쌓이게 해줘서 고마웠네."
"내년 꽃피는 봄에 또 만나세."
"같이 있어서 좋았네."
"잘 가."
친구들 손에는 한 친구가 수확한 고구마 상자가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