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본관은 순흥, 호는 기재이다. 정덕 갑술년(1514)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을 섬겼으며 벼슬이 봉상시 판관에 이르렀다.
(안처순安處順)
공이 어려서는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무리 중에서 빼어났고 장성해서는 당시의 이름난 사람과 종유하였다. 과거 공부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뜻을 가다듬어 학문을 하였으며 선을 좋아하고 옛날을 사모하였고 떠도는 논의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으니 당시의 동류들이 마음을 다해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노진이 지은 행장]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순서에 따라 박사로 승진하였고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무인년(1518)에 구례 현감에 제수되었다. 구례현에는 대성전이 없어서 봄·가을에 여염집에 모여 제사 지냈다. 공이 현에 이르자 다른 일을 돌볼 겨를이 없이 바로 적당한 자리를 골라서 묘우를 지었는데 규모를 넓게 하여 아주 널찍하고 탁 트이게 하였고 곁채와 재실에는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현감으로 있은 지 몇 년 동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따라서 공을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공이 평소에 종유했던 이들이 서로 잇달아 축출당했다. 당시에 이행이 맡은 일 때문에 완산에 와서, 공이 그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반쯤 취하자 세상일에 감상적이게 되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때 조정의 여론이 모두 공을 사회에 연좌시키려고 하였으나 공이 오래도록 외직에 있었기 때문에 꾸며댈 핑곗거리가 없었는데 이 소식이 한번 퍼지자 조정의 여론이 더욱 떠들썩하니 공이 곧바로 병을 핑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에 다시 공이 벼슬을 버린 일을 가지고 죄를 읽으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좌막이었던 자가 공과 친분이 있어서 집권자에게 말하여 고과에 하등을 받는 것으로 조처하였다. 이로부터 벼슬길에 뜻을 접고 순자강가에 집을 지어 여생을 마칠 생각이었는데 계사년(1533)에 당금이 조금 풀리자 성균관 전적에 보임되었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와 항상 아버지를 미처 보살피지 못한 것을 지극히 애통한 일로 여겼다. 어머니를 섬길 적에는 삼가고 조심스럽게 효도를 다하여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였고, 봉양할 적에는 정성을 다하여 매번 어머니가 밥을 먹은 후에야 비로소 밥을 먹었다. 곁에서 지낼 적에는 어린아이 같은 장난을 쳐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고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으며 대변을 맛보고서 병세가 나아졌는지 심해졌는지를 확인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3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으며, 이후 죽만 마시다가 소상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밥을 먹었는데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았다. 홀로 토굴에 거처하면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고 밤에는 반드시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이 일상이 되어서 모발이 다 사그라들었으며 간혹 끈을 드리워 상투를 매달아 졸음을 깨웠다. 매일 새벽닭이 울면 묘소에 올라가 슬피 곡하고 날이 밝으면 신주를 모신 곳에서 또 곡하여 슬픈 마음을 다하고는 마침내 부엌으로 가서 손수 제사 음식을 마련하였는데 추우나 더우나 이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눈이 내리면 몸소 산소를 쓸되 3년 동안을 항상 초상 때처럼 하였다. 슬픔이 밀려오면 번번이 곡하여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남과 함께 앉아 있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적에도 대답은 하되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일찍이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으니 비록 고시가 피눈물을 흘린 일이나 이련이 거상을 잘한 일에도 뒤지지 않았다.
백형과 중형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일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상의하고 나갈 일이 있으면 매번 고하며 물건 하나라도 얻으면 반드시 올렸다. 집안을 경영하는 데 넉넉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자기의 힘을 덜어 달려갔고 내외의 생질이 무려 수십 명이었는데 항상 모여 밥을 먹으면서 훈계하니 먼 곳에서 온 자들이 집에 돌아온 것처럼 여겼다.
공은 식견과 도량이 매우 뛰어났고 재물에 인색하지 않아서 궁핍한 사람들을 두루 구제하였으며 상사喪事에는 힘껏 도와 남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 위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또한 반드시 보살펴주고 구원해주되 비록 수고스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데에 더욱 독실하였다.
벗과의 사귐은 오래 가면서도 신의가 있어 이해 때문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처음 사화가 일어났을 적에 조광조 공이 능성(전라남도 화순)에 귀양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적에 권세를 부리던 자들이 한창조공의 동류들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일이 대부분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공은 즉시 구례현에서 달려가 그를 만났으며 또 오래전부터 사귀던 이들이 서로 잇달아 남쪽으로 쫓겨나자 또한 모두 힘을 다해 도와주기를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을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모두 행장]
하서 김인후가 "선생의 효성스러운 마음과 높은 풍도는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하는 바이다. 서로 경전에 대해 담론하고 도의를 강론하여 밝힐 적에는 자상하고 부지런하며 간곡하고 지극하여 선생에게서 좋은 점을 보고 배웠고 선생을 통해 어진 품성을 길렀다. 비록 선생의 도가 끝내 행해지지는 못하였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이 이따금 사하고 보고 들어서 나아갈 길을 헤매지 않으니 선생은 아주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