霖雨中, 訪香積山房 二絶
-在雞龍山國師峯下-
장마철에 향적산방을 찾다 (절구 두 수)
-계룡산 국사봉 아래에 있음-
(一)
거친 길에 경사마저 급한데
밟히는 이끼 어찌나 미끄러운지
숲에 둘러싸인 산방이
수증기 같은 안개 속에 있다
주인은 어디에 갔을까
정적에 잠긴 텅 빈 골짜기
그 옛날 김일부 선생을
슬픈 마음으로 그려본다
道荒傾急履苔滑
林繞山齋蒸霧中
不見主人空谷靜
愴思昔日一夫翁
(二)
날개 젖은 산비둘기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빈 서당의 사방벽에는
거미줄이 촘촘도 하다
당시에 진리를 찾던 이곳
앞으로 그 누가 알겠는가
이리도 세태가 변했을까
함께 간 사람들 함께 슬퍼한다
衣沾山鳩簷下移
虛堂四壁懸蛛絲
孰知當日尋眞處
物態人情士共悲
〔해설〕 7월 25일, 서울에서 정연수 박사가 서강휘, 정호철 두 신부와 함께 부여로 나를 찾아왔다. 장마비가 그친 듯하자 예정대로 찾아온 것이다. 26일에는 이들 세 사람과 아내 심당, 여기에 나까지 다섯 사람이 계룡산으로 나섰다. 몸이 불편한 심당과 정연수 박사는 끝내 등반하지 못하고 남았다. 두 분 신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향적산방에 올랐다. 길이 매우 가파르고 험해서 나와 정 신부님은 힘들어했는데, 서 신부님은 평지를 걷듯 하였다.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이라 한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향적산방을 장맛비 속에 찾다니. 기연(奇緣) 가운데 기연이다. 강한 지기(地氣)가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강한 묘한 곳이다. 김일부 선생이 이런 곳에서 도를 닦았으니 『정역(正易)』 같은 희대의 명저가 나오지 않겠는가. 근자에 철학이나 종교로 명성이 높던 이들이 이곳을 많이 찾았다. 그러나 글 읽는 소리, 토론하던 소리 낭랑하던 이곳이 이제는 황무지가 다 되었다. 시절 인연이 다한 것인가. 내 생애에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시절 인연을 생각하며 비감 어린 마음으로 두 수를 짓는다. (2023. 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