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론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1519년 1월 1일 주임사제로 부임하면서 첫 주일부터 마태복음을 연속강해 함으로써 스위스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츠빙글리의 취리히 종교개혁은 루터의 비튼베르크 종교개혁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설교했고 또 성경만이 믿음의 유일한 법칙으로써 우리 신앙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선포했다. 그뿐 아니라 로마교회가 그동안 가르쳐 왔던 교황의 수위권, 희생제사로서의 미사,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의 필요성, 연옥, 면죄부 등을 부정했다. 그 과정에서 로마 교황청과 갈등을 겪었고 이 문제를 취리히 시의회에 도움을 요청해서 두 번의 공청회를 통해 시의회의 지지를 얻어 개혁을 진행했다.
독일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속과 동떨어진 교회만의 개혁이었다. 하지만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취리히 시의회와 함께였다. 교회의 개혁인 동시에 사회의 개혁이었다. 이것이 츠빙글리의 스위스 종교개혁의 가장 큰 특징가운데 하나였다. 츠빙글리는 교회개혁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가 해결해야할 긴박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신앙 안에서 복음으로 개혁하기 위해 애썼다. 츠빙글리가 취리히 종교개혁에 있어서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시 의회와 함께 일했기 때문이었다.
진지훈, “츠빙글리의 스위스 종교개혁”, 『성경과 고고학』제99호, pp.32~48. |
첫댓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츠빙글리의 지분이 꽤 큰데도 덜 알려진 것이 사실입니다. 동상이 성경을 안고 있으면서도 검을 쥐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군목으로 참전했다가 일찍 전사한 것도 덜 알려진 배경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루터가 칼빈의 책을 읽고서 츠빙글리가 이 사람 만큼만 책을 썼어도 그렇게 싸우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이 난해하고 복잡한 부분이 있던 것도 연구가 부족하게 한 원인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 의회와 함께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합리적이고 최대한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고도 생각을 합니다.
교회사에 대한 풍부한 상식을 담은 좋은 댓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교회사에 대한 지식이 엿보이네요^^
@장코뱅 공감합니다.
우리가 개혁주의라고 할 때에, 거기에는 쯔빙글리의 신학도 상당부분 포함되는 것입니다. 언약신학, 단순한 신학, 사회언약, 사회개혁 등에서 쯔빙글리의 영향이 있습니다.
네, 카페의 다른 글에서, 다른 인터넷 카페의 게시물에서도 쯔빙글리의 신학이 개혁주의에 포함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루터, 칼빈에 비해서는 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같은 레벨로 주요한 종교개혁자였던 쯔빙글리의 개혁에 대한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박사님은 츠빙글리라고 발음하지만 많은 책들에는 쯔빙글리라고 써있기도 한데요. 어느 것이 더 정확한 발음에 가까은가요?
Zwingli의 Z는 국제발음기호로 보면 ts입니다. 영어로 보면 it's 할 때의 그 발음인데요. 한글로 거칠게 표현하면 '쓰'와 '츠' 중간 쯤의 발음입니다.
@장코뱅 어학적 상식을 알려 주셔서 도움이 됩니다.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의 Zwingli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쌍둥이 같은 두 배의 신학적 능력을 받은 분이 쯔빙글리 아닌가? 싶습니다.
독일어 발음 설명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