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문
김이랑
둘러친 담장 가운데 사립문 한 짝이 걸렸다. 허리춤만큼 나지막해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뜰에는 갖가지 꽃이 피었고 마당 한쪽에는 농기구가 모인 것으로 보아, 논에 물 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은 농부가, 자식의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은 부모가 살고 있는가 보다.
난생처음 초가 한 채 지었는데, 여기까지가 내 땅이라고 둘레에 금을 긋기는 뭣했다. 강가의 돌을 지게로 날라 나지막이 쌓으니 담이 되었다. 드나드는 문을 비워두자니 어딘가 허전했다. 뒷산에서 잘라온 싸리나무 몇 짐 낫으로 툭툭 추려 알맞게 엮었다. 대문이라고 걸쳤는데, 이래저래 허술해서 똑바로 서지 않는다. 비스듬히 섰다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립문斜立門이라고 불렀다.
사립문은 여기서부터 내 땅이라는 표시일 뿐 누구도 막아서지 않았다. 누구라도 슬쩍 밀면 제가 스스로 뒤로 밀려났다. 그냥 대문의 모양만 내었으니, 이런들 저런들 어떨까. 닫아도 닫은 것 같지 않고 열어도 열린 것 같지 않았다. 숨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집이기에 얼기설기해도 괜찮았다.
옛집 마당은 늘 평화로웠다. 들판과 고샅길 누비던 검정 고무신이 섬돌에서 뒹굴며 단꿈을 꿀 때, 목 축이러 내려온 아기별이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우물에서 멱을 감다 닭 울음에 화들짝 놀라 발가벗은 채 줄행랑쳤다. 이를 본 나팔꽃이 나발을 불고 봉숭아는 수줍게 돌아서 웃고 해바라기가 깔깔거렸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일본에 가서 돈을 벌었다. 늦은 나이에 돌아와 집과 논밭을 장만했다. 기와집은 아니지만, 초가집 한 채 있고 이 들판에 논 몇 뙈기 저 비탈에 밭 몇 조각 있어 배를 곯지는 않았다. 당신의 뜰에서 자식들은 탈 없이 잘 자랐다. 인심도 후해 사립문을 통해 늘 사람이 드나들었다.
어느 날, 말년휴가를 마치고 귀대한 둘째 아들이 한 줌 재로 돌아왔다. 평화롭던 당신의 뜰에 한동안 눈물 바람이 불었다. 이후 당신은 먼 탄광촌으로 돈 벌러 떠난 맏아들에게 한시도 마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체부가 오는 날이면 행여 편지라도 올까 하여 사립문 너머로 기웃거렸다. 명절이 다가오면 밤새 사립문을 닫지 않고, 행여 새벽에라도 올까, 잠귀는 밤새도록 사립문에 걸어놓았다.
노환으로 눈이 멀어지면서 당신에게 시련이 또 한 번 닥쳤다.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겠다고 객지로 떠난 아들의 등에 며느리가 업혀 사립문 안으로 들어왔다. 온갖 지성도 아랑곳없이 며느리가 세상을 떠난 뒤, 당신은 자식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이후 기력마저 쇠해 더는 사립문을 손볼 수 없는 당신도, 홀연 사립문을 나서 다음 세상으로 떠났다.
객지를 오래 떠돈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속설이 맞는 걸까. 농심農心이 떠난 아버지는 농사지을 자신이 없었는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홀로 당신의 뜰을 지키던 할머니마저 아들집으로 떠나자 당신의 뜰은 묵정밭처럼 황폐해졌고 거미가 주인인듯 행세하던 안채는 까닭을 알 수 없는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당신은 사립문 손보는 날은 가렸다. 미리 잡목을 준비하고 닥나무 껍질로 새끼를 꼬아두었다가, 손 없는 날을 골라 낡은 사립짝을 떼어내고 새 사립짝을 엮어 달았다. 그러고는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가시 날카로운 엄나무 토막을 걸쳐 놓았다.
당신은 평생 잡초벼슬 하나만 누렸다. 얼기설기 엮어온 생이라 안방에 반듯한 가훈 하나 걸지 못했지만, 당신에게 사립문은 형이상形而上의 문이었다. 숨길 것이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시절, 사립문은 이웃을 향해 열린 마음을 상징했다. 그리하여 낮이면 뙤창문만 내다보고 밤이면 겁 많은 귀뚜라미가 지켜도 당신의 뜰엔 칼을 품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도시라는 이름의 정글, 오늘도 일과가 끝나면 돌아와 철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와 열쇠를 꺼낸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겹겹 잠근다. 콘크리트 육면체 속에 나를 가두어야 안도하는 이 역설의 감옥에서 나는 남의 속을 들여다보려 창을 갈고 내 속을 보이지 않으려 방패를 만든다. 이 모순矛盾은 누가 먼저 무기를 버리느냐 하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만든 창과 방패가 내 속에서 싸우는, 말하자면 내란이다.
살아남으려면 모질어야 했다. 그래서 내 본령本靈을 떠밀어내고 문조차 굳게 닫고 마음의 끈조차 놓아버렸으니, 바깥을 떠돌던 본령이 길을 잃고 내 중력도 끌어당기지 못할 만큼 멀리 떠나버리지나 않았을까. 그리하여 내 뜰엔 지친 누군가가 찾아와도, 길을 잘못 들어 마음까지 접질린 친구가 찾아와도, 흔쾌히 내줄 수 있는 아랫목조차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 아닐까.
철문 앞에 서면 마음도 철문이다. 사립문 앞에 서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무장을 내려놓는다. 허술함이 오히려 무장을 허술하게 하는 사립문, 사립문을 보면 앞에 서서 한동안 향수에 드는 건 단지 그리움 때문은 아니다. 너도나도 닫는 세상에서 살다 보니, 사립문을 닮은 열린 마음들이 그리워서다.
내 안에서 지친 병사 하나가 퀭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본다. 내 본령이 병들지 않고 돌아와 창과 방패를 녹여 호미를 만들기를 바라는 것일 게다. 그리하여 폐허가 된 내 내면의 뜰을 개간해 꽃이 피고 감이 열리면 얼기설기한 사립문 하나 걸고 싶다.
2023 울산중구문학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