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광개토왕비(集安 廣開土王碑)
고고학사전 내용입니다.
中國 吉林省 集安市 역전에서 동북으로 3-3.5㎞ 가량 떨어진 지점인 大碑街에 서 있는 비로,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훈적(勳績)을 기리고 그의 사후 왕릉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왕이 죽은 지 2년째 되는 해인 414년 9월 29일에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세웠으며,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과 그 사회상 및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여주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석질로, 높이, 너비가 6.34×1.3-2.0m 가량 되며 무게가 37ton에 이르는 거대한 4면(面)에 글자가 새겨진 비이다.
각 면은 물갈이를 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391-412)의 정식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비를 ‘호태왕비(好太王碑)’, 또는 ‘영락대왕비(永樂太王碑)’라고도 부른다. 이 비는 고구려의 왕릉급 무덤들이 집중적으로 존재하는 우산(禹山)을 뒤로하고 압록강을 앞에 둔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45。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향 방향으로 서 있다.
비가 세워진 곳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20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이 있으며, 동북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장군총이 있다. 장군총과 광개토왕비, 그리고 태왕릉은 서남방향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오래도록 논란이 있어 왔지만 대체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벽돌이 나온 태왕릉을 광개토왕릉,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많다.
이 비는 현재 중국 당국으로부터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되어 1982년에 새로 건립한 대형의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다. 크게 비석과 대석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대석은 3개의 큰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큰 판석 하나였지만 훗날 어느 시기에 파괴되어 셋으로 나눠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글자는 비신의 동남쪽으로부터 시작해서 순서에 따라 4면에 새겨졌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으로 전체 44행이며, 각 행마다의 글자 수는 기본적으로 41자이나 군데군데에 처음부터 글자를 쓰지 않은 여백이 있고, 비면이 고르지 않아 글자를 써넣을 수 없는 곳도 있으므로 모두 합해 29자의 결자(缺字)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원래 전체 글자 수는 1,775자였을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그 가운데 150여 자 정도는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글자의 크기도 균등하지가 않다.
대부분은 14-15㎝ 정도이나 큰 것은 16㎝, 작은 것은 약 11㎝ 정도 되는 것도 있다. 각 글자는 대체로 1-0.5㎝ 정도의 깊이로 새겨져 있으며, 글자의 배합과 간격은 비교적 균등한 편이다. 서체는 예서(隸書)를 기본으로 하나 초서(草書)와 해서(楷書)가 부분적으로 반영된 혼합체이며, 간혹 고구려에서 만든 독자적인 이체자(異體字)도 사용되고 있다.
비문은 내용상으로 보아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 국가의 건국신화를 기록하고 나아가 시조 추모왕(鄒牟王)으로부터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에 이르는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비문의 서론부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부분에는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수행했던 정복활동의 내용과 그 성과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이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영락 5년(395) 시라무렌강 유역에 거주하던 거란족 일파를 정벌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획득하였고, 영락 6년(396)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으로 비정되는 58성 700촌을 취했으며, 영락 8년(398)에는 이전부터 고구려에 예속되어 조공을 바쳐오던 동만주의 숙신(肅愼) 방면에 소규모의 군대를 파견해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또 영락 10년(400)에는 신라의 원군요청을 받아들여 5만군대를 파견해 신라 영토 안에 들어와 있던 가라와 왜(倭) 연합세력을 내쫓고 낙동강 유역까지 추격함으로써 백제-가야-왜 연합세력의 기세를 꺾어 놓았고, 14년(404)에는 백제의 사주를 받아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온 왜를 궤멸시켰다.
그리고 영락 20년(410)에는 동부여를 공략하여 속민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한 점을 응징하고, 다시 조공관계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둘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훈적(勳績)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부분으로 사실상 비문의 본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정복활동 가운데 삼국사기 등의 문헌을 통해 광개토왕의 재위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수행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후연(後燕)과의 싸움과 관련되는 내용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비문상에서 마멸이 심하여 전쟁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영락 17년조의 기사를 후연과의 전투기사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때 깨트린 성의 이름들로 미루어 보아 이 때의 싸움도 역시 백제와 관계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셋째 부분에는 광개토왕을 비롯한 그 이전 고구려 역대 왕들의 능을 안전하게 수호하기 위해 기존의 수묘제(守墓制)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그에 관계된 법령(法令) 및 수묘인의 전체 인원과 그들의 출신지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새겨 놓았다.
이 비는 고구려와 발해가 존립할 당시에는 국가적으로 신성시되어 보호되었을 것이나, 926년 발해 멸망 후 우리의 역사무대가 줄곧 한반도로 국한되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한동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이르러 이른바 이성계의 동녕부 원정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고려군이 집안(集安) 일대에 잠시 주둔하게 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뒷날 조선왕조가 개창되고 세종대왕대에 이르러 왕실 조상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때 그 정보들이 여기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그 후 『東國輿地勝覽』 및 성현과 심광언 등의 시에도 계속하여 집안 지역의 성(城)과 고비(古碑) 및 석총(石塚)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보이고 있지만, 이 유적들이 고구려의 그것임은 알지 못한 채 모두 금나라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비도 금나라의 어느 황제의 업적을 기록하였던 명문인 것으로 잘못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비가 광개토왕의 비라고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청이 중원지역의 패자로 등장한 이후 백두산 일대를 그 발상지로 신성시하여 봉금제(封禁制)를 채택함에 따라 자연 집안 일대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점차 황무지로 변하고 말았는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봉금이 해제되면서 개발이 다시 시작되었다.
광서(光緖) 2년(1876)에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되자 이 비가 서 있는 일대는 그 관할 아래에 들어가게 되면서 通溝口子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 회인현 설치위원으로 이곳에 온 사람이 장월(章)이었고, 그 부하로서 서계관(書啓官)이란 직함을 띤 관월산(關月山)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금석학에 대단한 조예를 지녔고 뛰어난 탁본기술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여가를 이용해 집안 일대의 고적을 답사하며 돌아다니다가 황량한 들판에 서 있던 광개토왕비를 찾아내었다. 그리하여 낱개의 글자들을 손수 탁본해 친구들에게 나눠주면서 비로소 이 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장엄하고 기품 있는 이 비가 중국 금석 애호가들의 관심을 크게 끌게 되면서 이대룡(李大龍)을 비롯한 전문적 탁공들에 의해 탁본이 이루어졌고, 반조음(潘祖蔭), 성욱(盛昱), 이홍예(李鴻裔), 오대징(吳大) 등 당대의 쟁쟁한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구해 내용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이루어진 연구란 주로 금석학적인 측면에 치중해 있었다.
한편 일본측에서도 그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광개토왕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대륙침략을 획책한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중국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만주 일대에 파견한 스파이 酒勾景信 포병중위가 1883년에 비의 쌍구가묵본(또는 묵수곽전본)을 구해서 일본으로 갖고 갔다. 이후 약 5년간에 걸쳐 일본 육군 참모본부 주도 아래에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비밀리에 비문연구를 진행한 다음, 1888년에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후 비로소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비문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일본학계였는데, 그 이유는 비문 가운데 이른바 신묘년조(辛卯年條)라 불리는 기사가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적인 명분으로 강조되고 있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이 비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07년 무렵이었으나 그에 대한 연구를 처음으로 행한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당시 일본 관학(官學)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한일고대사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는 목적의식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었다.
이 때 수행된 대표적인 연구업적은 정인보의 그것을 손꼽을 수 있다. 그는 신묘년조의 기사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왜(倭)’가 아닌 고구려로 봄으로써 4세기대에 왜가 한반도로 건너와 백제, 가야,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일본학계의 통설을 반박하고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해방 이후 남한 학계 뿐 만 아니라 북한 학계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 남북한 두 학계에서는 각각 이른바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의 극복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 광개토왕비에 대한 연구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으나 비를 직접 실견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사실상 본격적인 연구성과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었다.
1966년 북한에서 간행된 박시형(朴時亨)의 『광개토왕릉비연구』는 그간의 연구를 종합한 대표적인 저서라 하겠는데, 이는 비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한 역작이었다. 거기에서 신묘년조의 해석은 정인보의 학설을 계승했다.
이 견해는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근본적인 재인식을 촉구한 뛰어난 업적인 김석형(金錫亨)의 『초기조일관계사』와 함께 광개토왕비문 뿐 아니라 한일관계사에 대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1970년대 초에 재일동포학자인 이진희에 의해 石灰塗付에 의한 비문조작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일본 사학자들에 의한 한국사 왜곡이 근본적인 사료의 조작이라는 선까지 자행된 것이라 보는 설이므로 식민주의사관의 청산과 민족사학의 계승발전이라는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당시 한국학계의 주목을 크게 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인에게까지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설은 비문연구의 출발점인 사료 자체의 바탕을 뒤흔드는 것이므로,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작성된 탁본을 구하기 전에는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이후 한동안 비문에 대한 연구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한편 일본학계에서는 패전 이후 황국사관에 입각한 역사연구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으나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연구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통설을 고수하는 입장이 견지되었다. 그러나 1959년 水谷悌二郞이 자신이 수장한 탁본과 6, 7종의 다른 탁본을 정밀하게 비교하여 정리한 『호태왕비고(好太王碑考)』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기반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70년대 후반 들어 佐伯有淸, 武田幸男, 浜田耕策 등의 연구자들에 의해 비문의 구조 및 내용 분석과 연구사 정리 등이 이루어져 일정하게 공헌을 하였다.
그 후 비문탁본에 대한 저간의 사정을 직접 현지에서 조사하고 탁본하기도 하였던 중국학자 王健群의 『好太王碑硏究』가 나왔고, 이어 1980년대 말 중국의 문호개방으로 인해 비가 있는 현장을 직접 답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종 원석탁본들이 많이 알려지게 되는 등 비문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학계에서도 이전처럼 신묘년조의 자구해석에만 치중하던 연구단계에서 벗어나 광개토왕비의 발견경위, 각종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 비문조작여부, 판독상과 해석상의 문제, 비문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와 구조분석, 비문의 사회사적인 측면과 건국신화와 왕계에 대한 연구 등 여러 측면을 검토한 다양한 연구성과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비문에 대한 이해 수준은 한 단계 향상되었다고 단언하여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