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默窩公墓碣銘 - 諱慶泰 李艮齋先生以溪門高弟掌書籍於筮謙之夕可見師門寄托之重而深工邃學有非後人所敢窺測也其 遺風餘韻繼世綿翼久猶可徵若默窩公之隱德躬修亦可謂勿替典型者與公諱慶泰字大裕永川人平 章事諱文漢之后也至諱大榮封永陽君入本朝少尹諱軒移居宣城之汾川生諱坡縣監贈參議生諱孝 孫奉禮贈參判生諱欽縣監贈參贊三世貤贈以長子孝節公諱賢輔貴也孝節公有弟諱賢佑訓鍊院習 讀贈參判子諱忠樑敎授贈參判又移剛州之오川生諱德弘卽艮齋先生縣監以宣武扈聖勞贈吏參追 及父祖後士林建오溪院以享之於公五世曰蒔早屛擧業克修家學號善오堂曰榮全贈左承旨曰星老 護軍贈參判曰錫昌娶冶城宋氏通德郞載道女正郞光心孫以明陵己巳十一月十四日生公齠齔時己 有成人儀度一心向學稍長業公車名振一方乃自視欿然日杪群聖賢格訓置案上觀省事親忠養備至 及洊遭兩世喪哀毁幾不支墓距十里逐日哀省終三年不懈篤友諸弟不許異居艮翁文稿在巾衍者梓 以壽之善오公遺蹟蕩逸無存又旁求博取略成編秩오溪院祠澇浸傾圯倡率以構之君子塘邊搆成小 亭累世墳墓各置祭土凡先躅所在如新巖之瀑布洪亭之召憩南陽之艸廬亦必廣邀賓友逍遙觴詠以 盡追慕每淨掃一室正容端坐尤好朱子書或夜靜晨淸浪誦數三篇其胸次悠然扁窩以默作詩若銘以 見意嘗曰治心如治病宜對症投劑乃作八勿七君子湯銘可見其實有所事也晩年信從者衆姜公再恒 金公瑞朝權公萬尤以同庚許相切磋者也卒乙亥四月十四日享年六十七葬宣城北坊洞坐乙原一時 名勝以文哭者數百人嗚乎以若行誼以若文章未試於世人莫不以是惜之然乃公之志則以爲慕於外 不若求諸內措諸人不若政於家一生慥慥不越乎追先裕後之道而旣遂吾素志則方且充然自得外物 無足以動其心卽無愧爲賢祖之孫而由後視之其所就與一時之榮名果誰輕重是必有辨之者矣配羽 溪李氏通德郞周老女有婦德墓同原異坐无育以弟子檥嗣公之從玄孫世鋼善士也余僭與之友日過 焉見方草公遺事丙辰春公胄孫羲鳳袖此來請銘以世契重故也乃敢不辭而爲之銘銘曰 業傳有自 志專無墜眞味經史華佩荷芰罔曰偸間我自有事葺理圯祠刊鋪遺笥墓以田祭亭傍塘置純誠攸格何 營不遂日用彛倫綽綽行治不問不知彼自外至淸操雅量儘難叔季過者心趍北坊之巋刻此小石用表 厥隧 通訓大夫前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東學敎授眞城李晩煃謹撰
묵와공 묘갈명 휘 경태 간재(艮齋) 이(李)선생이 퇴계문하의 고제(高弟)로서 퇴계선생이 돌아가던 날 저녁에 서적을 맡긴 것은 사문(師門)에서 소중한 사람이기에 기탁(寄托)했다고 볼 수 있으며 깊은 공부와 심오한 학문은 후인들이 감히 엿보고 추측하지 못할 바가 있었다. 그 후세에 남긴 명성과 남아 있는 울림이 대대로 계승되어 오래도록 면면이 이어졌음을 오히려 징험(徵驗)할 수 있으니 묵와공(默窩公)의 숨겨진 덕(德)과 몸소 수양한 것 또한 전형(典型-본)을 바꾸지 않았다고 더불어 말할 수 있다. 공의 휘는 경태(慶泰)이고 자는 대유(大裕)이고 영천인(永川人)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문한(文漢)의 후손이고, 휘 대영(大榮)에 이르러 영양군(永陽君)으로 봉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소윤(少尹)을 지낸 휘 헌(軒)이 선성(宣城)의 부네에 이사하여 살았고, 다음 대(代) 휘 파(坡)는 현감을 지내고 참의에 증직됐고, 그 다음 대 휘 효손(孝孫)은 봉례를 지내고 참판에 증직됐고, 또 다음 대 휘 흠(欽)은 현감을 지내고 참찬에 증직됐는데 삼세(三世)에 증직이 내린 것은 장자인 효절공(孝節公) 휘 현보(賢輔)가 귀(貴)하게 되어서이다. 효절공의 아우인 휘 현우(賢佑)는 훈련원 습독을 지내고 참판에 증직됐고, 아들인 휘 충량(忠樑)은 교수를 지내고 참판에 증직됐는데 강주(剛州-榮州)의 왜내(오천)에 이사했고, 다음 대 휘 덕홍(德弘)이 바로 간재(艮齋)선생으로 현감을 지냈고 선무호성(宣武扈聖) 공로로 이조 참판에 추증됐으며 추증이 부조(父祖)에게도 미쳤고, 훗날 사림(士林)이 오계서원을 창건하여 향사(享祀)했는데 공의 五대조이고, 휘 시(蒔)는 일찍부터 과거공부는 그만두고 가학(家學)을 수련했으며 호는 선오당(善오堂)이고, 휘 영전(榮全)은 증직이 좌승지이고, 휘 성로(星老)는 호군을 지내고 증직이 참판이다. 석창(錫昌)은 야성 송씨(冶城宋氏) 통덕랑 재도(載道)의 따님에게 장가드니 정랑 광심(光心)의 손녀이다. 명릉(明陵-숙종) 기사년(己巳-一六八九년) 十一월十四일에 공이 출생했고, 七 八세 때에 이미 어른의 거동이 있었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업을 지향(指向)했으며 조금 자라서는 과거공부를 하여 이름이 향내에 알려졌으나 자신은 하찮게 여기며 날마다 여러 성현의 격훈(格訓)을 책상 위에 두고서 보고 살폈고, 부모를 섬김에는 정성을 다해 봉양하면서 준비에도 지성이었고, 양세(兩世)의 상(喪)을 거듭 당해서는 슬픔이 극도에 달해 거의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수척(瘦瘠)했으나 십리나 되는 묘소에 날마다 슬퍼하며 성묘하기를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고, 여러 아우들과는 우애가 돈독해서 따로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간재선생의 문고(文稿)가 책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목판(木版)으로 새겨서 간행했고, 선오공(善오公)의 유적(遺蹟)이 없어지고 흩어져서 보존하지 못한 것을 가까이서 찾아내고 널리 거두어서 간략하게나마 정돈하여 편성(編成)했고, 오계서원이 큰물에 침수되어 기울고 무너지니 앞장서서 구축(構築)했고, 군자당(君子塘) 가에 작은 정자를 지었고, 여러 대의 조상 분묘에 각각 위토(位土)를 마련했다. 무릇 조상이 남긴 자취인 신암폭포(新巖瀑布)와 홍정소게(洪亭召憩)와 남양초려(南陽艸廬) 같은 곳에 또한 반드시 손님과 벗을 널리 초대하여 즐겁게 노닐며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면서 추모(追慕)를 극진히 했다. 늘 방을 깨끗이 하고 엄정(嚴正)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아 지내면서 주자서(朱子書)를 더욱 좋아하여 간혹 고요한 밤이나 청량(淸凉)한 새벽에 서너 편의 글을 낭랑하게 외우니 가슴이 차차 후련해진다고 했고, 묵와(?窩)라고 편액(扁額)하고서 지은 시(詩)와 명(銘) 같은 것에서 뜻을 보였고, 일찍이 말하기를 『마음 다스리기는 병 치료하는 것과 같아서 증세에 따라 약제를 투약(投藥)해야 한다.』고 하며 팔물칠군자탕(作八勿七君子湯)의 명(銘)을 지었으니 그런 것을 실지로 일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늘그막에 믿고 따르던 무리로는 강재항(姜再恒)과 김서조(金瑞朝)와 권만우(權萬尤)인데 동갑으로서 서로 따르며 학문을 열심히 연마(硏磨)한 분들이다. 을해년(一七五五년) 四월十四일에 돌아가니 향년 六十七세였고, 선성(宣城) 북쪽 방골(坊洞) 을좌의 언덕에 안장하니 당시의 명사(名士)로 글을 지어 조문(弔問)하는 사람이 수 백인이었다.
아! 행의(行誼)나 문장(文章) 같은 것으로써 세상에서 시험해보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공의 뜻인 즉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속으로 여러 가지를 구(求)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여겼으며 남을 제쳐두고 가정을 다스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한평생 매우 착실하게 보내면서 조상을 추원(追遠)하고 후손에게는 넉넉히 물려주는 도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미 자기의 본뜻을 수행(遂行)하면 바야흐로 자신이 얻은 듯이 만족해했으니 외부의 영향으로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즉 어진 조상의 자손이 되어 부끄럼이 없었으며 뒷날에 그가 취했던 바를 보게 되면 과연 한 때의 영욕(榮辱)과 명예(名譽) 중에서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운지를 반드시 분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배(配) 우계 이씨(羽溪李氏)는 통덕랑 주로(周老)의 따님으로 부인으로서의 덕이 있었고, 묘소는 같은 언덕에 좌향은 다르고, 자식을 기르지 못하여 동생의 아들인 의(?)를 입양했다. 공의 종현손 세강(世鋼)은 훌륭한 선비로 나와는 함께 어울리는 벗인데 어느 날 지나는 길에 공의 유사초안(遺事草案)을 내놓고 보여줬는데 병진년(一九一六년) 봄에 공의 주손(?孫)인 희봉(羲鳳)이 유사를 소매에 넣고 찾아와서 명(銘)을 청하는데 사람은 약속이 소중함으로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명(銘)을 한다. 명(銘)을 이르나니 유업(遺業)을 스스로 전했고 뜻은 오로지 떨어뜨리지 않았으며 경사(經史)의 참 의미를 형제들이 화려하게 지녔도다. 한가하게 남을 헐뜯지 않았고 스스로 일을 하여 무너진 사당도 수리하고 묻혔던 문집도 간행했도다. 묘소에 위토도 장만하고 연못가에 정자도 마련하니 순수한 정성이 다다른 곳에 꾀하는 일 무엇이든 이루지 못하리오. 이륜(彛倫)을 일용(日用)하여 너그럽게 다스리니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안 해도 저절로 외부에 알려지도다. 깨끗한 지조(志操)와 아량은 말세에는 어려운 일이요 지나는 자 추종하리니 북 방골에 우뚝한 묘소로다. 이 작은 비석을 새겨서 묘도(墓道)의 표석(表石)으로 쓰노라.
통훈대부 전행홍문관부교리 지제교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동학교수 진성 이만규는 삼가 짓다.
註 ①서겸지석(筮謙之夕) - 퇴계선생 임종 전날 저녁에 간재선생이 시초(蓍草)로 겸(謙)괘를 얻어서 임종을 예견한 일 ②격훈(格訓) - 행동을 바르게 다잡아 주는 가르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