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언론대책위원회
한국교회언론대책위원회는 간판을 내리고 크리스천답게 대책을 세워주기를 당부한다. 정직과 진실은 인격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지만, 목회자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상위 덕목이다. 그런데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교인들을 호도해 방송사 시위 대열에 동참시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양식 있는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들은 MBC가 편파•왜곡 방송을 했다고 주장하며 방송사 앞에서 시위하는데, 어떤 내용이 편파•왜곡인지에 대한 해명이 전혀 없다. 그저 그들 편의대로 진실을 호도해 편파•왜곡 방송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주지하는 대로 편파는 공평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말하고, 왜곡은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목회자 세습이 이루어졌고 교회 건물을 담보로 대출받은 사실을 방송사의 의견 없이 그대로 전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편파•왜곡 방송이라는 말인가? 그날 방송을 편파 방송이라고 하려면 교회 측과 반대되는 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방송했어야 하고, 또 왜곡 방송이라고 하려면 담임목사직을 아들한테 세습한 게 아니라 절친했던 부목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담임목사직을 넘겼는데 그것을 목사 세습이라고 했다면 왜곡 방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편파•왜곡 방송이라는 말은 목사 세습과 예배당 담보 대출에 동조하는 교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타 종교에 비해 기독교에 대한 고발성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해도 유구무언이다. 종교인의 범죄율 가운데 단연 기독교인의 범죄율이 가장 높고, 특히 이름이 알려진 이단 목회자들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대책위원회에 간여하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타 종교는 언론 대책을 잘해서, 다시 말해 많은 예산을 편성하고 언론사들을 상대로 로비를 잘해서 기독교에 비해 매스컴을 덜 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둔다. 또 설령 타 종교에서 언론사 로비를 잘해 그 종교의 부조리가 고발되지 않도록 손을 썼다면, 그런 작태는 지탄받아야 할 일이기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와 방패이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시편 84:11). 따라서 이번 이 일에 대해 정직하고 진실하게 대처하려면 그저 언론은 교회 문제에 간섭하지 마라. 우리 문제는 은밀한 가운데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차라리 이런 구호를 내걸고 시위하는 것이 보다 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었을까?
담임목사를 세습한 교회에서 세습이 아니라 대물림이라고 말장난을 하는데, 시쳇말로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공연히 우매한 말 유희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어서 안타깝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궤변으로 치부를 합리화한다면 세상에 합리화하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앙인에게 모든 언행의 판단은 법 이전에 선한 양심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고 했고(시 7:9), 사도 바울도 범사에 바른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다(사도행전 23:1). 비기독교인은 말할 것 없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도 목사직 세습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하는데, 정작 세습 당사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항변한다면 그야 어쩌겠는가? 다윗은, 나는 하나님이 두렵고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 떤다고 했다(시편 119: 120).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윗보다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어느 종교가 되었든지 바른길을 가는데 언론이 왜 시비를 걸겠는가? 또 설령 언론의 잘못으로 기사화되거나 방송이 나가면 합법적으로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다수의 교인을 동원해 방송사 앞 인도를 점거하고 시위하며 언론 대책 운운하는 것은, 자칫 교회가 언론 압력단체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한국언론대책위원회’는 간판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시위하려면 진솔하게 그 이름을 세습교회대책위원회로 바꿔야 한다. 대다수의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그들을 한국교회의 대표로 위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두 마디를 첨언하고 맺는다. 먼저 필자도 교인이기에 개인적으로 대화해보려고 시위 중인 교회의 동년배 남자 교인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말을 듣고 아연실색 두 손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OOO 목사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순교의 의미를 모르고 이런 말을 했어도 비극이고, 순교의 의미를 알고 이런 말을 했다면 말 그대로 참극이다. 끝으로 그들은 북한의 삼대 부자세습을 어떻게 말할지 궁금하다.
(2001년 2월, 기독교 매체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