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세상 참 엿 같다
이갑창
“사장님! 여기 쐬주 두 병 빨리 갖고 와요.”
“그리고 안주도 더 가져오고.”
유명 일식집 ‘파도’에 나이 지긋한 남자 50여 명이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며 시끌벅적하다. 오랜만에 만난 전우들의 모임이라 옛날 병영 시절을 더듬으며 화기애애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야, 인마. 니가 그 뻥쟁이 뱅철이라꼬? 왜 이리 팍 늙었노?”
“뭐라꼬? 니는 뭐 이팔청춘 동안인 줄 아는가 보재?”
“하하하하하.”
세월은 못 속인다더니 모두 활짝 웃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생활의 연륜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군대 시절의 풋풋함과 패기는 오간 곳 없었지만 만남 자체만으로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거나하게 취기가 돌자 사내들 특유의 기질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야, 때깔 나게 차려입은 너는 몇 기고?”
“예, 저는 867기입니다만….”
“필승! 아이고 이거 실례했습니다. 형님. 저는 871기입니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동안이라서 제가 그만 큰 실수를 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쇼.”
“우하하하하. 너 크게 실수 한 번 칠 줄 알았다. 앞으로 조심해라 인마.”
옆에 있던 동기들이 웃으며 싸한 분위기를 슬쩍 덮어주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해병 전우들이 5년 만에 만나 회포를 풀게 되었다. ‘코로나19’라는 듣도 보도 못했던 생소한 전염병 때문이었다. 잦은 거리 두기 정책에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이제 간신히 해제되어 만남을 갖게 되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동안 단체 손님을 받지 못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로 업소도 살맛이 났다. 해병 전우들 역시 가슴 가득 꽉 막혔던 그간의 회포를 풀 수 있었고, 즐거움을 나누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흐뭇한 광경이었다. 거기에다 4년마다 열리는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선거가 10여 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각종 모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해병 전우회 모임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바야흐로 기수별로 흩어져 보다 내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우리 기수에서도 이번 선거에 출마해 지역사회를 위해 일 좀 해야지 않겠어? 너희들 어떻게 생각해?”
기수 총무가 드디어 만남의 본 주제를 꺼내자 모두 긴장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맞아. 우리도 이제 사회를 아니 지역을 위해 봉사할 때가 되었지. 누가 맘에 두고 준비한 사람 있는 거야?”
“몇몇 선배 기수 중 단체장 선거에 뜻을 두고 움직이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 그러나 그건 별거 아니야. 선거는 어차피 표로 심판받는 거잖아.”
“그래도 같은 전우회 동문끼리 서로 경쟁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좀 더 알아보고 신중하게 접근하자고.”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 총무 너가 물밑 흐름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담에 얘기하자꾸나.”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므로 우리 기수에서는 다음 모임에서 심도 있는 얘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모임이 있고 나서 한 십여 일이 지났을 때 우리 기수 정래청 한테서 연락이 왔다.
“태경아, 내 너랑 만나 의논할 게 있으니 우리 한번 만나자.”
지난번에 만났던 그 일식집 ‘파도’에서 식사 겸 반주를 곁들여 제법 그럴싸한 대접을 받았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래청이가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다.
2차로 자리를 옮긴 곳은 분위기 있는 술집이었다. 나 같은 영세 자영업자야 근처에도 오기 힘든 곳 같아서 맘이 편치 않았다. 거기에다 일식집 식사비까지 래청이가 결제한 터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인마. 불편해하지 말고 편히 즐기기나 해. 내 오랜만에 너랑 중요한 의논 좀 하려고 그러니까. 나도 사업상 어쩌다 들리긴 하지만 이런 곳에 자주 오지는 않아. 하지만 중요한 얘기 같은 걸 하려면 이곳이 또 좋을 때도 있어. 남의 시선 같은 걸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그래서 나도 맘을 편하게 가지려 하였다. 어차피 내 평생 이런 곳 몇 번 올까 말까 하기도 하고 친구가 또 진심 어린 말을 해주니 긴장했던 마음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래청이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서 성공을 거두었다. 사업체도 여러 곳 운영하여 지역사회에서 널리 알려질 정도로 재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놀 줄 아는 친구였다. 이런 곳이 익숙한 듯 여종업원들과 어울리며 유유자적하게 즐겼다. 나도 덩달아 세상만사를 잊고 그와 수준을 맞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흥겨운 시간을 보내자 다소 긴장했던 내 마음도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제야 종업원을 물리고 친구가 본론을 꺼냈다.
“사실은 말이야. 나도 이제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도 갖게 되었고 해서 이번 지방 선거에 한 번 나와 볼까 하는데…. 솔직히 내가 터놓고 얘기를 진중하게 나눌만한 사람도 없고 해서 너에게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 놓는 거야.”
“왜? 이런 중요한 얘기라면 총무 배형이가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니야, 너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배형이 그 친군 믿음이 안 가. 겉과 속이 다른 것 같고 입이 빨라서 아는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잖아. 이런 얘긴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망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너가 은밀히 지역에 돌아가는 흐름을 좀 살펴줘. 내가 가끔 내려오긴 하겠지만 자주 오긴 힘들잖아. 다음 기수 모임 때 이런 내색 조금도 하면 안 돼.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조심해 주고. 우리 두 사람만 아는 걸로 하자고 알았지?”
“무소속으로 나오려고?”
“미친당이나 지랄당 모두 맘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지랄당보단 미친당이 더 좋지 않겠어?
“그래, 알았어. 이처럼 중요한 일을 나를 믿고 얘기해 줘서 고마워. 자네 부탁대로 내가 노력해 볼게.”
그때부터 나는 소리소문없이 자치 단체장 물망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풍문은 물론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미친당’과 ‘지랄당’에 서너 명이 자칭 타칭으로 서서히 몸을 푸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미친당에 우리 해병전우회에서도 한 사람이 준비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그는 어릴 적 고향을 떠나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나 이번 선거에 출마한다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있었다.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그에 대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굉장한 재력가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 같았다. 외모 또한 출중하여 첫인상에 호감이 가는 인물로 선거에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정래청 역시 그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외모나 재력 품위 등 어느 하나 그에게 절대로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단체장 선거 후보 신청 마감날이 되었다. 우리 해병전우회에선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확실하게 밀어주기로 굳게 결의하였다. 해병대 결속력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큼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나 진배없었다.
그 무렵 래청이 회사에 바쁜 일이 생겨 자주 만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날도 어렵게 시간을 내었다고 하였다.
“래청아! 일단 미친당에 후보 등록은 해놓고 보자.”
“나도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은데 상대가 우리 해병전우회 회원이라며? 어떻게 집안끼리 서로 아웅다웅하냐? 쪽팔리게.”
“너 지금 무슨 태평한 소릴 하는 거야. 선거는 형제지간도 무시하고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하는 건데.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선거를 치르려고 해?”
“그런데 도대체 그쪽이 누군데 그래?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고?”
“아. 선배 말이야?”
“뭐라고? 선배라고?”
“그래. 선배.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가 어느 날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나타나서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상대가 선배인 것만은 확실해.”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 내가 선배하고 어떻게 같이 후보 신청을 해서 티격태격하냐고. 전우회 동지들 보기도 그렇고. 또 TV 토론 같은 거 하면 마주 보고 서로 물어뜯고 해야 하잖아. 나 그런 거 도저히 못 하겠어.”
“그럼 어떡하려고? 자네 생각이 어떤 건데?”
“준비한 게 아깝긴 하지만 어쩔 방법이 없잖아. 다음 기회를 봐야지. 사람의 도리는 해야할 거 아냐? 전우회 동지들에게 면목도 없고. 내가 후보 등록 포기할 게.”
“일단 등록은 해놓고 단일화하는 방법도 있잖아.”
“난 안 하면 안 했지 구질구질하게 그러고 싶지 않아. 사람들 피곤하게 밀당이나 간 보기 같은 건 안 할 거야. 다음을 기약하며 깨끗하게 접자고.”
그동안의 일들이 아깝긴 하였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사람들 피곤하게 하던 밀당의 고수와 간 보기 선거꾼들이 생각나 무척 후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래청이가 상대 이름만 듣고 후보 등록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았다.
후보 등록 다음 날 깜짝 놀랄만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귀신에게 홀렸는지 아니면 진짜 세상이 달라지려는지 지랄당에서 한 명도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지역 단체장 선거에서는 해병전우회 출신 선배 후보가 무투표 당선 확정이라는 것이다.
서울에서 곤히 자고 있던 정래청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뭐야, 아침 일찍 이 사람. 전화 예절도 모르나?’
“예, 정래청입니다.”
“필승!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이 후보 등록을 포기해 주시는 바람에 제가 이번 시장 선거 무투표 당선자로 확정된 871기 선배입니다.”
“아니. 몇기라고요? 친구 태경이가 저한테 분명히 선배라고 해서 제가 양보한 건데….”
“아이고, 이걸 우짭니까? 저는 871기고 선배님이 867기 아입니까. 제가 후배지요.”
“그럼 태경이가 왜 저를 속이고 후배를 선배라고 했을까요? 분명 그럴 친구가 아닌데….”
“아마도 제 이름이 선배라서 선배라고 한 모양인데 선배님이 착각하신가 봅니다. 제가 성이 선가고 이름이 외자 배입니다. 그래서 선배입니다.”
‘아니, 뭐라고? 선배가 그 선배가 아니고 이름이 선배라고?’
세상 참 엿 같다.
후보 등록 무효 가처분 신청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