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 ship
1347년 10월 어느 날 시칠리아섬의 메시나 항의 주민들이 이상한 배 한 척이 접안을 못 하고 선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지요.항구 주민들이 그 배에 접근해서 예인하여 항구에 접안시키고 배 안을 살펴 보니 거의 다 죽어 가는 몇 사람들과 죽어 있는 시체들뿐이었다지요.
메시나 항구의 주민들이 그 시체들을 처리하고 죽어가는 자들을 간호했지만 결국 다 죽고 말았다지요.
아시아 대륙과 유럽 절반을 유린하고 약탈하였지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징기스 칸의 몽골군대가 3년간의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크림반도의 카파 성 전투에서는 함락시키지도 못하고 치욕스러운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지요.
너무나 잔인한 몽골군대가 철수하면서 치졸하게도 그냥 가지 않고 병이 걸려 죽은 동료들의 시체 몇 구를 투석기에 올려 카파 성안으로 쏘아버리고 떠났다는 것이지요.
성안에서는 몽골군대가 철수하자 전쟁의 뒷 정리를 하면서 처참한 몽골군들의 시체들도 묻어 주게 되었겠지요. 이 과정에서 카파 성의 주민들에게도 흑사병에 감염 된 것이라고 전해지지요.
그 무서운 몽골군대와의 전쟁에서 살아난 주민들이 이제는 전투가 아닌 흑사병 감염으로 다 죽어 가는 과정에서 부유한 나라에 장사하러 와 있던 제노바의 상인들이 현지 주민들이 전염병에 걸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하자 팔던 물건들을 정리하여 배에 싣고 서둘러 도망을 가게 되었다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항행하면서 몇 날 후에 배 안에서도 흑사병이 번져 간호하고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배 안의 모든 이들에게 전파되어 버렸고 시칠리의 메시나 항을 통과하려고 할 때에는 살아남은 몇 사람마저 거의 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그 항구의 주민들에게 발견되게 된 것이라지요.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주고 중환자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메시나 항구 도시의 주민들마저 병들게 되고 차례로 죽어가게 되었다지요. 시칠리는 섬의 특성대로 소금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지요(현재도).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소금을 공급하는 루트를 따라 페스트가 번져가게 되었다지요.
이토록 죽음의 배 한 척이 14세기(1347-1351) 전 유럽의 1/3이 페스트로 큰 희생을 치르게 되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처음에는 이병에 걸린 사람들의 가족들이 간호하면서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자 의사들과 사제들에게 찾아가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아무 소용없었지요.
결국 교회에 모여 집단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오히려 페스트의 확산을 빠르게 할 뿐 아무런 대책도 방법도 모른체 참담하게 엄청난 수의 유럽인들이 죽어갈 따름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믿음이 부족하여 병에 걸렸다고 혼내고 소리치던 사제들마저 병에 걸려 죽어가는 현상들을 여러 군데에서 목격하게 되면서 종교에 대한 신뢰와 사제들에 대한 경외심이 붕괴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13세기 몽골군대에 의한 동부 유럽의 참담한 패배로 엄청난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농작물의 경작이 지체되면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전쟁으로 수 많은 유럽인들이 희생되는 과정이 지나자 전혀 예기치 못한 질병 페스트로 전 유럽이 죽음의 공포에 떨게 되면서 죽음 산업이 발달하게 되는 기현상으로 면죄부까지 나돌게 되는 참담함 속에서 부자들은 가족 중에 죽은 자를 위하여 연옥에서 천국으로 직행하도록 기도하는 사제들을 고용하기까지 하는 혼란의 연속에서 1492년 대 항해 시대의 막을 연 신 대륙의 발견으로 지구는 둥굴다는 사실로 드러나면서 천동설과 함께 교황무오설의 절대권위가 붕괴되는 현상을 맞게 되었지요.
이토록 죽음의 배 한 척으로 인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유럽은 계시록 예언의 말씀대로 주로 땅 속에 숨어 있다가 야간에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쥐 떼들과 쥐 벼룩들에 의한 감염병의 혹독한 결말을 체험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15세기에 접어 들면서 페스트로 희생되는 수가 점차 줄어 가지만 17세기 까지 이어졌다지요.
요한계시록 6장 7절
그분께서 넷째 봉인을 여신 후에, 내가 들으니 넷째 짐승의 음성이 말하되, 와 보라, 하기에,
8절
내가 바라보니, 보라, 창백한 말 한 마리라. 그 위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지옥이 그와 함께 따라다니고, 그들이 칼과 굶주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땅의 사분의 일을 죽일 권능을 받았더라.
땅의 짐승들로 = 쥐와 쥐벼룩
흑사병의 추가 기록
몽골의 징기스칸 군대가 중국 내륙을 거쳐 서쪽으로 진군해 갈 때 초기 흑사병이 우한 쪽에서 번져 몇 개 마을에 한 정적으로 지속되고 있었고 멀리 외부까지는 확산되지 않았었다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몽골 군대가 그 지역에 당도하여 약탈하는 과정에서 몽골 군대에 흑사병이 전파되어 이 들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흑사병이 퍼지게 되었다지요.
몽골군대는 중국 전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 전염병마저 퍼져서 전쟁이 휩쓸고 간 후에 마을마다 사람들이 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갈 수 밖에 없었지요. 원래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중국 장안에서 북경으로 천도할 계획이었으나 흑사병으로 포기하고 말았다지요.
고려 말기 공민왕 정부의 최영 장군은 그 쪽 사정을 잘 아는 명나라 화교재벌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이 자춘의 아들 이성계로 하여금 싸울 필요도 없는 전쟁에 내보내면서 북경일대가 우리 옛 조상들의 땅이니 가서 지키기만 잘 하라고 하면서 보냈겠지요.
왜냐하면 흑사병으로 중국 전체가 큰 희생을 당하여 특히 북경의 위쪽 지역들은 무인지경이라고 할 정도로 빈 땅으로 있게 되어 이성계가 굳이 싸울 대상이 없는 경계의 임무 정도로 하락되었지만 군권을 가지게 된 이성계는 명나라 출신답게 회군하여 직속 상관 최 영 장군을 살해하고 공민왕을 끌어내리고 우왕을 허수아비로 하여 1388년부터 4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1392년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지요.
정당성이 결여된 이 성계는 바른 말과 올바른 지적을 하는 고려의 충신들마저 수 없이 살해하고 통치의 수단으로 당파싸움을 조장하여 유능한 인재들은 귀양과 사약으로 다스리며 고종에 이어 순종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로서 독자적 조선의 군대는 빈약하게 운영하면서 언제나 명 나라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청나라로 바뀐 중국의 사정에 어두운 조선에서는 청나라냐 명나라를 섬길 것이냐로 갑론을박 하는 사이 인조는 청의 누루하치에게 이마를 땅에 찌으며 구곡구배하는 치욕을 맛보았지요. 그의 치욕은 조선의 치욕으로 기록되므로서 조선에 커다란 좌절을 안겨준 것이지요.
누루하치 청의 군대가 돌아가면서 조선 청년 60만명을 끌고가 명과 싸울 때 앞장세워 싸우게 하였다지요.
청에 끌려간 60만 그 중에 20만은 처녀들이었다지요.
청에 끌려간 자식들에 대한 애타는 부모들이 돈을 주고 자녀들을 사서 귀환시키는데 이 때 돌아온 아녀자를 환향녀(還鄕女)로 나중에는 싸우면서 욕 할 때 화냥년이라고 하였다지요. 청에서 돌아올 때 임신하여 와서 출산하거나 낳아서 데려온 아이를 호로(胡虜오랑캐포로)자식이라고 욕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네요.
이토록 명나라에 의존적인 식민지 조선은 인조 그 이전 선조때에도 아무런 대비없이 갑론을박하다가 일본 사무라이 패거리들에게 치욕스런 임진왜란으로 조선팔도가 유린되자 선조는 자신의 조상들이 살고 있는 고향 명나라로 도망가려고 하자 유성룡의 설득으로 남아서 명나라에 지원군 요청으로 군대가 오고 심유경이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의 평양에서 일본의 풍신수길과 담판하는 과정에서 그의 음흉한 계책에 휘말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심유경에게서 건네 받아 먹은 독극물로 조선에서 죽게되자 철수하게 된것이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