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창의에 都有司로 활동하였다. 1592년 9월 17일 흥덕에 거주하던 서연은 의병 40명, 의곡 20섬, 탄알과 장편전 등 30개, 말 5마리, 소 2마리를 장성 남문 의병청에 전달하였다.
공의 자는 浩源, 호는 朋來齋, 고창 출신이며, 본관은 達城이다. 典客寺事 贈戶曹參判 徐益進의 후손이며, 高祖 徐應春은 戶曹參判 贈吏曹判書, 曾祖 徐敦은 金堤郡守, 祖父 徐漢은 釜山僉使, 부친 徐祐는 顯陵參奉을 역임하였다. 공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 학문이 높았다. 1547년에 부친이 산수 좋은 곳을 찾아 흥덕 壺巖에 터를 잡고 竹林亭을 지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金景壽ㆍ金弘宇ㆍ李守一 등이 장성 남문에서 의병청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 노복과 의사를 모아 의병에 참여하였다. 당시 장성현감 白守宗이 공을 都有司로 삼았다. 또한 공은 백성들을 넉넉하게 먹일 수 있는 일과 인재를 양성하는 필요성에 대해 10條疏를 지어 都體察使 鄭澈에게 올렸다. 1592년 11월에 장성 남문의병이 서울로 진군할 때 수원ㆍ안성 등지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장성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공은 나주와 순창에서 군량미를 모아 수원에 운송하였다. 그 후 왜적이 충청도 소사에서 패전하여 호남지방으로 퇴각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자, 공은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九乙峙에 이르렀을 때 왜적을 만나 부친이 사망하였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 정씨가 스스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왜적이 정씨부인의 행실을 보고, 두 시체를 거적으로 덮은 다음 ‘서공ㆍ정씨 夫妻의 屍’라 표시하였다고 한다. 훗에 마을 사람들은 공의 부친이 왜적에게 모래를 던져 애꾸눈을 만들었던 교각을 ‘盲看橋’라 칭하였다고 한다. 졸지에 부모님을 여윈 공은 고향 선산 아래 초가를 짓고 ‘朋來齋’라 칭하고 3년 동안 시묘생활을 하였다. 훗날 공이 거주하였던 흥덕의 長淵마을에 원근의 선비들이 찾아와 공의 집을 ‘忠孝齋’라 불렀다. 1596년에 공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생활하였다. 1630년에 세상을 떠나자, 黃胤錫이 공의 행장을 지었다. 공의 위패는 오산창의사에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