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재론할 필요 없이 가정을 생각한다. 가정은 기본적인 사회 구성원의 기초로 이를 통해 성장하면서 소위 사회적 동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 한다.
돌이켜보면 과연 지난 세월 가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심각한 자괴감에 빠진다. 그만큼 중요한 가정과 가족을 위한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나마 열성적인 교육과 근검절약으로 가정을 유지시킨 것도 모두 아내의 역할이었다. 그야말로 마치 하숙생과도 같은 생활을 조용이 감싸고, 흔적 없이 잔잔한 평화를 지킨 노력에 대해서는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엊그제 친구들과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 근처에 근무하고 있는 아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고 식대를 지불하고 갔다. 사소한 일이지만 아비로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과거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아들과 그의 친구들을 불러내 함께 식사를 하긴 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나 역시 그런 기쁨을 부모님께 드리지 못했다. 그토록 승어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건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원래 부자간의 관계는 긴장 관계이다. 따지고 보면 아담이 그를 창조한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고해의 바다로 쫓겨나는 과정 그 자체로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나중에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저주를 받아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면서 서로를 불신하며 살해하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그 절정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다. 운명의 장난으로 아들은 어머니와 결혼하여 4명의 자식들까지 낳으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당시 그리스의 『오이디푸스왕』의 공연을 통한 시민교육의 내용은 ‘연민’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무대에 오른 장님 「오이디푸스」를 응시하고 있다. 「이오카스테」는 남편인 줄만 알았던 「오이디푸스」가 아들인 사실을 알고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의 옷에서 빼낸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런 비참한 운명에 처한 「오이디푸스」를 보고 가만히 눈물을 흘린다. 그가 천륜을 어긴 인간이지만, 시민들은 「오이디푸스」가 처한 상황으로 들어가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을 고대 그리스어로 엑스타시스(ekstasis)라고 부른다. 흔히 황홀경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자신의 현재(스타시스)에서 빠져 나온(엑스)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동료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때 성장한다. 다양한 인간이 거주하는 아테네에서 ‘다른 인간에 대한 연민’은 아테네 문명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런 ‘공감’과 ‘연민’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클라이스테네스」가 만든 제도이지만, 반석위에 굳게 다진 사람은 「페리클레스」이다. 그는 비극의 공연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보면서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죽이고 새롭게 살고자 결심을 했듯이, 비극작품을 통해서 우리도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반성을 통한 진정한 참회는 새로운 출발을 보장한다. 그래서 비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가는 순간, 죄로 얼룩진 자신을 죽이고 없애서 깨끗해지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심으로 부활한 셈이다. 이것을 「종교적 카타르시스」 혹은 「비극적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살부(殺父)이야기의 설정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재현되는 주제로 이 분야의 최고봉이다.
도스토옙스키(Dostoevsky)는 부친살해(Parricide) 테마로 "만인은 만인에 대해 유죄"라는 사상, 즉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일에 있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는 말로 구체화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간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죄인 아버지 죽이기를 묘사함으로써 죄와 벌의 테마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이 소설은 패륜적인 아버지인 「표도르 카라마조프」, 그리고 그의 네 아들인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 끝으로 「이반」보다 나이가 몇 달 정도 더 많은 사생아 「스메르쟈코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세계 문학사상 가장 훌륭한 표현 중의 하나라고 평가를 받는 「대심문관」의 주제는 "모든 것이 허용 된다"는 「이반」의 사상에서 출발한다. 「대심문관」이란 카톨릭 교회의 권화(權化)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권위를 위임 맡은 기관의 대표자인 것이다. 「대심문관」은 「이반」의 지적 사유가 낳은 시적이고 상징적인 성과물이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연일 종교재판이 열렸던 16세기의 스페인, 이곳에 재림한 그리스도와 아흔 살의 대심문관의 숙명적인 대면이 이루어진다. 「대심문관」은 황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힘겨운 수행에 몰두하던 중 "무덤 뒤에는 어둠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신 대신 악마와 결탁한다.
인간이란 본디 나약한 존재여서 신이 부여한 자유를 누릴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며 따라서 인간에게서 자유를 반납 받고 대신 빵을, 즉 물질적 안락을 제공함으로써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민중-양떼들을 신비, 기적, 권위의 기치 아래 통합시켜 지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이다. “순순히 복종하는 사람에겐 은혜를 주고 안심을 주지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불태워 죽인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왕국은 완성된 것인데 넌(예수 그리스토를 지칭) 뭣하려고 나타났느냐”라고 「대심문관」은 주장하고 있다.
「이반」의 말을 빌리면, 카톨릭은 표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걸고 내실(內實)에선 악마의 유혹에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대심문관」을 작품 전체와 연결시킨다면, 「대심문관」은 「이반」의 분신이 되며 그리스도는 「알렉세이」와 등치된다. 사실 악인의 악은 선인이 선을 행한다고 믿고 저지른 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악인이 사람을 죽인댔자 불과 몇 사람 죽이고 나면 숨이 가빠진다. 그런데 선인의 악은 수백, 수천, 수만을 죽여도 숨이 가빠지기는커녕 점점 자신만을 더한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I.S. Turgenev)는 『아버지와 아들』을 썼다. 농노 해방 전후의 러시아를 무대로 하여 진보적인 지식인 「바자로프」와 그의 아버지의 갈등을 통하여 신구(新舊)의 대립을 묘사한 장편 소설로 1862년에 발표하였다.
당시 러시아에서 「투르게네프」는 일련의 아름다운 여주인공들을 창조해낸 반면 러시아인 남자 주인공을 창조하지 못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에 「투르게네프」는 이 같은 결함을 고치고 행동하는 진실한 남자, 즉 젊은 세대의 영웅을 창조하기로 결심했다. 「투르게네프」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니힐리스트 「바자로프」를 이런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세대 갈등이 주요 주제이다. 이념적으로는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등, 세대로는 장년 세대와 청년 세대의 갈등, 청년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렸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의 측면을 벗어나면 사랑과 화해의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장년 세대는 아들 세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과 화해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투르게네프」는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간관계의 갈등과 사랑, 화해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오늘 날의 이야기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인성마저 실종된 오늘 날은 부자간이 대척점에 서서 화해할 시간조차 없이 평행선을 달린다.
아버지와 아들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긴장관계가 노출되면서 살부(殺父)를 주제로 한 작품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 날과 같은 문명의 시대에도 아버지의 재산 상속 문제로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상 이상의 범죄가 발생하고 있는가. 모름지기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교육과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면 그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는 방안을 강구할 일이다. 상속에는 민감하면서 불 보듯 예견되는 자식들의 분쟁에 둔감하다면 이는 스스로 죄를 짓는 일이다.
세대 간의 갈등문제는 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 청년기의 혈기왕성하던 사람이 어느 덧 세월과 함께 아주 둔해지고 새로운 변화에 문을 닫고 지낸다. 젊은 세대와 밀접한 대화조차 멀리하고 지낸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 어떤 기성세대보다 현명하고 능력이 출중하다.
돌이켜보면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여 본인과 가정에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살아간다. 이제 와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앞으로나마 유념해서 지낼 일이지만, 이미 손자 교육은 제 부모들 몫이니 헤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다. 그저 바라다볼 수밖에 없으니 무슨 일이든지 다 제 때를 놓치는 어리석음은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2022. 10. 23 작성/11. 8.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