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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최첨단을 추구하는 디지털 시대이니 족보 보기를 진부하다거나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한국전 참전 용사인 미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roots/1976)는 40여년 전,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소설은 TV로도 방영된 바 있다.
헤일리는 선조가 어떤 분인지 오랜시간 추적하여 마침내 그의 조상이 아프리카 노예선에 실려 미국에 정착한 ‘쿤다 킨테’라는 사실에 이르렀다.
그 무엇이 그토록 그를 집요하게 하였을까.
족보는 선조와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을 연결하는 매개체다.
족보에는 앞선 시대를 사셨던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이 글은 작년 시월 2일 sns 내용과 연관된다.
개성왕씨창간보 무오보(1798) 서문을 쓰신 두 분 중 개성유수 조진관(趙鎭寬)의 서문 번역문을 7차 족보(폐간)인 신미보(1991)에서 발견하고 복습 차원에서 공유코자 한다.
번역문은 병사공종중 29세손 철호 종친께서 쓰셨다.
조진관은 풍양조씨로 정조 때 개성유수(1797)로 재직시 서문을 추천 의뢰 받았다. 유수(留守)라는 관직은 조선 초기에는 이태조의 어향(御鄕) 전주와 고려의 도읍지 개성 두 곳에 둔 수장이었고 품계는 고려 말 정2품(장관급)이었으나 조선 조에 한성부가 생기면서 종2품(차관급)으로 한 등급 낮아졌다. 조선 태조3년(1394)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며 한양부가 개설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한성부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일제강점기 때 경성부로 명칭이 다시 바뀌었다고 한다. 개성의 위상이 추락된 것이다.
아버지는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재배한 이조판서 조엄이다.
조진관의 서문은 조선의 개국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며 고려를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으로 인정하는 내용으로 차 있다.
서문은 일반적으로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래의 무궁한 발전을 소망하는 글로 구성된다.
그러하니 조진관의 서문은 우리 후손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당시 현직 관리라는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수치(羞恥)가 약 400여년간 끊어졌던 선조들의 안위와 지내온 아픔을 족보에 수록하는 기쁨에 견줄 수 있을까.
또 한 분의 서문 작성자 개성왕씨 외척 윤래성(尹來成)의 번역문은 보이지 않는다.
족보에는 발문과 후 발문도 수록되는데 서문(序文/서)과 발문(跋文/발)이 어떤 차이가 있는 지 검색하여 보자.
서문은 저자에 의해 쓰여진 작품에 대한 소개로 책 머리에 위치한다. 책의 탄생 배경이나 발상을 때로는 도움을 준 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담기도 한다. 저자 이외의 타인이 쓴 것은 추천서문이라 하는데 이런 경우 저자의 서문은 추천서문 뒤에 둔다고 한다.
구례가승보의 경우 병조참판공종중 후손인 23세손 회경 선조의 글은 서문이고 여암 신경준(申景濬)의 글은 추천서문이다. 무오보 서문은 둘 다 추천서문이다.
발문은 책 끝에 위치하며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의 경위, 날짜, 저자와 관계되는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이라 한다.
이제 조진관의 서문 번역문을 살펴보자.
문장에 문어체가 많아 이해하는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인물이나 사건 그리고 난해한 단어 등에 관하여 아는 범위 내에서 말미에 주(註)를 달다 보니 문장이 길어졌다. 끝까지 읽어주면 고맙겠다.
서문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일부의 선조들 휘가 나오며 행적이 나타난다.
그리고 ‘절도사 종신(宗信)’이란 내용 속에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15세손 종신 선조의 관직이 병조참판으로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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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희씨(姬氏)가 천명을 받아 주(周)나라를 세울 적에 그 전조(前朝)인 은(殷)나라 망왕(亡王) 주왕(紂王)의 서형 미자계(庶兄 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하여 은나라 선조인 탕왕(湯王)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책서(策書)를 미자계(微子啓)의 명(命)이라 하였고 하(夏)나라와 은나라의 두 임금 후손이 주(周)나라 서울에 와서 주(周)나라 종묘제사를 도운다 하니 그 시에 이르되 진노(振鷺)의 장(章)이라 하였다.
성쇠흥망이 진실로 천운이므로 어찌할 수 없으나 제사를 폐하지 않고 은나라 손자 신속(孫子 臣屬)들 중에 아름답고 명민(明敏)한 선비로 하여금 명예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주나라 도덕이 성대한 바이다.
아조(我朝: 조선)에서 왕씨를 대접한 것도 또한 그러하여 숭의전을 마전(현 연천군)에 두어서 태조 이하 사왕(四王)을 제사하고 매년 춘추에 명하여 세조(태조의 부친인 왕륭 묘호) 이하 34능을 소제(掃除)케 하고 또 현릉에 제각을 두어 춘추절서(春秋節序)에 향축(香祝)을 내리고 모두 수직관(守直官)을 두되 왕씨 후손으로 임명하여 숭보(崇報)하는 것이 이와 같고 은혜가 그 후손으로 미쳤으니
처음에는 왕미를 꿈으로 인하여 기용하고
왕순례를 전야(田野)에서 구하고
왕강, 왕승보를 해도(海島)에서 나오게 하니
이후로부터 왕희걸은 사인(舍人)에서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왕종신은 절도사로부터 조천부개(早天副价)로 충용(充用)하니 조가(朝家: 조정)의 은예(恩禮)가 이와 같았고
왕옥 같은 이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쳤으며
왕경기는 혼암(昏暗)한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며
왕희언은 죽기를 각오하고 외로이 성(城)을 지켰으므로
왕씨가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쓴 것이 또 이와 같으니 비록 시서(詩書)에 일컬은 바 후사자손(後嗣子孫)이 선성왕(先聖王)의 어질고 옳은 것을 본뜨면 손님 대접의 아름다움도 있다 하나 어찌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제동(齊東)의 전하는 말(민간야화)이 아조초(我朝初)에 전조(前朝)의 후손이 남은 것이 있지 않다 하여 남추강(南秋江: 남효온)의 냉화(冷話) 같은 유(類)가 시끄러움을 감내하지 못하였다.
대체로 국권이 바뀔 무렵에 강(强)한 일가와 가까운 친족은 형세가 진실로 온전하기 어려우므로 동학사 기록에 본다면 대게 또한 이러한 사실이 적혀 있으나 실상은 우리 성조(聖祖: 조선태조)의 본의가 아니고 주로 그 당시의 대신들인 주나라 신하 주공(周公)과 군진(君陳)이 그 전조(前朝)인 은나라 자손에게 삼가 하였던 것과 같이 못된 처사에 기인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비록 이것으로 구실을 삼고 있으나 가만히 지나간 역사책을 보건대 국조(國祚)가 면원(綿遠)한 것은 전조(前朝)의 자손을 대우함에 예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주(周)나라 삼각(三恪)과 송(宋)나라 시씨(柴氏)에게 대우한 것이 이런 것이다.
오직 아조(조선)가 인후(仁厚)하게 나라를 세워 만억년을 누릴 계획이니 어찌 무(武)로 성공하는 날에 참으로 절구공이가 뜰만한 피가 있었겠는가.
일찍 시론(試論)하건대 여조(麗朝: 고려조정)가 삼한을 통일한 공이 성대했으니 마땅히 그 자손의 수효가 억(億)뿐이 아닐 것이나 지금 개성왕씨는 효은태자 일파 뿐이라.
대체로 생각하건대 오백년간에 여러 번 정중부, 최충헌의 난을 지나서 진실로 쇠락하고 지쳐서 거의 없어졌을 것인데 하물며 사승(寺僧)의 후사로 단발(斷髮)한 자가 반이나 되고 소백산의 자매들이 시집가지 않은 자(여승)도 많았었다.
나라 풍속이 이와 같으니 왕씨 겨레가 번성치 못한 것이 진실로 마땅한데도 유독 효은파 만이 불교에 물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후손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제 그 자손이 능 곁에 많이 살아서 밭 갈고 뽕따는 여가에 능히 글을 배우고 무(武)를 업으로 삼아 신성(神聖)한 후손이 서인(庶人)의 성과 달라서 아조에 처음 복종할 때 오히려 조정에 이름이 나타난 자가 많았으니 이에 따라 왕조에 빈예(賓禮)를 받으면 어찌 예전 같이 성대하지 않다 하겠는가.
혹은 말하되 고려왕씨의 선조가 황제에서 나왔다고 하나 그 말이 아득하고 희미해 나는 알 수가 없는데 성원록은 고려 사관의 기록한 바이니 내가 말할 필요도 없으며 효은(孝隱)으로 할아버지를 삼는 것은 족보에 서술한 바와 같이 대부(大夫)가 감히 제후왕을 할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음은 예(禮)일 것이다.
보(譜)가 이미 성취하였음에 나의 직책이 개성유수에 있음으로 인하여 책머리에 서문 쓰기를 요청하기에 내가 일가를 돈독히 하고 풍속이 순후(純厚)케 함을 칭찬하여 다만 예전 도읍의 아름다운 일이 될 뿐 아니라 인하여 서문으로써 조가(朝家)의 덕의(德意)를 열기(列記)함은 진실로 이 땅을 지키는 자의 직분이므로 이로써 서문을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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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풀이)]
꠬희씨(姬氏)-중국 고대의 성(姓)으로 주(周)나라의 국성(國姓)이다. 고려의 국성은 왕씨(王氏)이다.
꠬망왕(亡王)-망한 나라의 왕
꠬책서(策書)-임금이 벼슬아치를 임명하는 사령장
꠬하(夏)나라-중국 최초의 왕조이나 존재 가치가 고고학적으로 인정 받지 못하였다
꠬은(殷)나라-수도가 은(殷)인, 입증된 중국 최초의 왕조, 상나라의 이명(異名)이다. 기원전 1600년경에
탕왕(湯王)이 하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 왕은 애첩 달기와 함께 백성을 괴롭힌 30대왕 주왕(紂王)이다
꠬주(周)나라-은나라에 이어 기원전 존재하였던 나라로 최초 왕은 무왕(武王)이다. 중국 역사상 길게 790여년
존속했던 나라이다
꠬서형(庶兄)-서모(첩)에게서 난 형
꠬미자계(微子啓)-은나라 29대왕 제을의 첫째 아들이었으나 첩의 소생이라 왕위는 정실부인에서 난 제신이
계승하니 그가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이다. 미자계는 은나라 왕자 신분이었으나 은나라의 국운이
쇠한 것을 느끼고 무왕을 편들어 후일에 송나라 군주가 된다
꠬신속(臣屬)-신하
꠬명민(明敏)한-총명한
꠬소제(掃除)-청소
꠬제각(祭閣)-재실, 사당
꠬춘추절서(春秋節序)-봄과 가을의 절기
꠬향축(香祝)-향과 축문
꠬수직관(守直官)-조선 초기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과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리인으로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된 정7품 관직이다
꠬숭보(崇報)-은혜를 갚음
꠬전야(田野)-밭과 임야의 약어로 시골 농촌을 의미함
꠬해도(海島)-바다 가운데의 섬이니 귀양지를 뜻한다
꠬사인(舍人)-조선시대 의정부의 정4품 관직
꠬조천부개(朝天副介)-중국 천자에게 조견(早見)할 적에 부사(副使/수석 사신을 돕는 버금 사신)가
되었다는 뜻
꠬충용(充用)-충당
꠬은예(恩禮)-은혜와 예절
꠬혼암(昏暗)한 조정-어지로운 조정 즉 광해군 시절을 의미함
꠬시서(詩書)-시경과 서경의 약어로 중국 고대의 시가를 모아 엮은 유교 경전 5경 속에 포함된다
꠬후사자손(後嗣子孫)-대를 잇는 아들과 손
꠬선성왕(先聖王)-앞 성군
꠬주공(周公)-주나라를 창건한 무왕의 동생으로 무왕의 아들 성왕을 도와 왕실의 기초를 세움.
공자는 모범 인물로 격찬하였으나 조진관은 폄하하였다
꠬군진(君陳)-주공의 아들로 4촌간인 성왕 때 대부를 지냈다
꠬국조(國祚)-국운, 나라의 운세
꠬면원(綿遠)하다-대대로 이어저 내려온 시간이 오래되다
꠬삼각(三恪)-주나라 무왕이 전조의 우(虞), 하(夏), 은(殷)나라의 후손을 진(陳), 기(杞), 송(宋)에 봉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시씨(柴氏)-중국 성씨로 춘추시대 제나라의 왕이었던 강태공의 후예이다. 송나라 때에는 정권의 합법성을
위해 시씨 후손을 명문거족이자 황족으로 예우하였다
꠬인후(仁厚)하게-어질함이 두텁게
꠬절구공이-절구는 곡식을 빻거나 떡을 치는 도구로 공이는 막대 모양이다
꠬사승(寺僧)의 후사(後嗣)-중은 남의 자식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한다
꠬서인(庶人)-양인, 서민, 평민
꠬빈예(賓禮)-손님 예절
꠬효은(孝隱)-효은태자, 고려태조의 15자(子)
꠬보(譜)-족보, 보첩
꠬순후(純厚)하다-순수하고 두텁다
꠬열기(列記)하다-가지런히 기록하다
[서문에 거론된 선조 약력]
왕미(王亹/1365∼?):
고려태조12세손, 효은태자파의 중(中)시조, 초기 휘는 흥덕, 여말선초에 교서감 기관에 출사하였고 별세 후 정3품 제용감정공 및 전교서판교에 추증되었다.
왕순례(王循禮/?∼1485):
고려 현종의 먼 후손으로 서자 출신이다. 초명은 제우지이고 공주에 숨어살다 1451년 조선 문종에 의해 개명되고 종3품 숭의전부사가 되었다. 조부는 부령(副令)을 지낸 왕휴이고 부친은 거제에서 살해된 왕거오(왕걸우음)이다. 아들과 손인 왕천계와 왕적은 종6품 숭의전감을 지냈다. 서자(庶子)라 함은 본부인이 아닌 첩이나 다른 여자에게서 난 아들을 뜻하며 적자(嫡子)와 상반된다. 부령은 고려 관직으로 품계는 정4품에서 종4품이다. 성원록 종족별기에 수록되어 있다.
왕강(王康/?∼1394):
고려 왕족으로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합격한 후 대제학에, 공양왕 때에는 밀직부사 겸 삼도수군도체찰사와 예조판서에 올랐다. 1392년(조선태조1) 거제에, 1394년 2월 26일 공주로 유배되었다. 왕씨 일족 참화시 왕승보, 왕승귀, 왕격 등과 함께 살해 되었다. 부친은 우왕 시 만호 관직을 지낸 순흥군 왕승(王昇)이다. 4남1녀중 둘째이다. 성원록 종족별기에 수록되어 있다.
왕승보(王承寶/?∼1394): 고려 왕족으로 1380년(우왕6) 원수가 되어 광주, 화순에 침입한 왜구를, 1383년에는 밀직상의로 평강을 점령한 왜구를 물리쳤다. 무예가 뛰어나 역모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대간과 형조의 탄핵을 받아 1394년 2월 26일 영흥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갑신보 별보에 수록되어 있다.
왕희걸(王希傑/?∼1553):
17세손, 세마공파 남양 집안이다. 조부는 세마공(왕종의)이고 부친은 경흥도호부사(왕무)이다. 1534년(조선중종29) 생원시에, 1543년(중종38) 병과에 급제(及第/합격)하였다. 왕씨 최초의 문과 급제자로 정3품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글씨, 그림에 뛰어 났고 퇴계(이황), 노수신, 홍섬 등과 함께 교분이 깊었다. 문헌에 의하면 생원진사시는 조선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과거로 소과 또는 사마시라고도 불리어졌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진사시는 문예 창작의 재능을 시험하였다. 병과(丙科)는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셋째 등급으로 23명을 선발하여 정9품의 품계를 주었으며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임명하였다. 을과는 7명을 선발하여 정8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갑과는 3명으로 장원, 아원, 탐화랑 순인데 장원은 참상관(종6품)에, 아원과 탐화랑은 정7품에 각각 기용하였다한다.
왕종신(王宗信):
15세손, 정3품 무관 관직인 전라수사(수군절도사의 약어)와 종2품 병조참판을 지냈다.
왕옥(王沃):
19세손, (행)절도사공파 태인 집안이다. 1546년(조선명종1)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식년시는 3년에 한 차례에 실시된 정기적 과거이다.
왕경기(王景祺/1578∼?):
19세손, 세마공파 남양 집안이다. 1609년(조선광해군1) 증광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다. 생조부는 왕희걸, 양조부는 왕희언이다. 증광시는 국가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된 비정기 과거로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소과, 문과, 무과, 잡과(기술관 등용 시험) 등이 시행되었고 초시, 복시, 전시 세 단계의 과정이 있었다한다. 초시(향시)는 1차 시험이고 복시는 초시 합격자 중 33명을 선발하였고 전시는 임금이 친림하던 최종 시험이다. 과거 응시자는 사전에 본인의 이름, 나이, 본관과 부와 조, 증조와 외조의 관직과 이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증빙서류를 제출하여야 하였기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선조의 신분이 허위 상승이 되고 족보를 사고 팔고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왕희언(王希彦/1498∼1571, 74세):
17세손, 세마공파 남양 집안으로 왕희걸의 친형이다. 서자인 왕우(王佑)와 왕길(王佶)이 있었으나 왕희걸의 3남 왕좌(王佐)를 계자(양자)로 맞이하였다. 1519년(조선중종4) 식년시에 진사로 합격하였다. 강원도(북한) 동부에 있는 통천군수에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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