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의 역사
가을이 되어 밀알이 떨어진다
아직 익지 못한 밀알
밭은 밀의 집이지 밀알의 집은 아니라
밀알 하나하나 키우기엔 지푸라기도 비쩍 말라서
밀알은 흙에 파묻힌다
축축하고 어둡지만 이삭에 매달리던 때보다 편안하다
바람에 나부끼다보면 민들레 홀씨가 된 착각이 드는데
흙은 밀알의 정해진 태생을 상기시킨다
곧 죽을 밀알
곧 죽고 다른 밀알을 틔워낼 밀알
죽지 않으면 살지 못해서
밀알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겨우내 얕은 뿌리로 양분을 찾다가 힘이 부쳐서
썩어버린 작년의 밀짚을 먹다보니
밀의 역사가 지워진다
또 비쩍 마른 지푸라기만 자란다
또 착각의 자유가 짧게만 스친다
밀알은 더 깊숙이 뿌리내린다
당근의 역사 고목의 역사
도시의 역사 바다의 역사
기록됐지만 묻혀있던 역사들
역사가 스스로 써내려간 역사들
밀알은 그 역사를 먹어치웠다
먹는다고 지푸라기가 살찔리 없지만
죽어야 사는 태생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죽는 순간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그 해 가을, 밀알은 또 다른 밀알을 틔워냈다
근데 밀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틔워낸 밀알은 겨 대신 흙을 입었다
떨어지기 전부터 흙에 종속된 것처럼
그러나 벗겨보면 속살은 다른 밀알과 같았다
속은 밀알이니 밀밭에서 자랐으니 밀알이 맞는 걸까
땅에 떨어진 밀알의 밀알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저 파묻힌 채 썩었다
흙을 입은 채 죽어서 아무도 몰랐다
뿌리내리지 못했으니
다른 밀알을 틔워내지 못했으니
밀알은 아닌가 보다
드라이에이징
발걸음에 주방이 흔들린다
빚어둔 햄버거가 찌그러져서
몇 번 치대서 다시 둥글게 빚는다
이렇게 치대야 안에 공기층이 생긴다
모든 재료의 맛을 느끼려면 여백이 필요해서
둥글게 빚어야 부서지지 않는다
입에 넣기 전까지는 서로 싸우지 말고 얌전해야해서
다들 후라이팬을 달구기 시작하는데
나만 아직 빚는 중
어떻게 그리 예쁘게 빚었냐
물어도 도움은 안 된다
같은 햄버거지만 재료가 달라서
전부 도매업자에게 발주한 재료로 빚었지만
내 건 직접 공수해온 거라
소는 집에서 키우던 걸 잡아왔고
빵가루는 초등학교 동창과 주고받은 편지를 빻아 만들었고
양파는 구더기의 멸종을 상상하며 창조했다
야근 수당 챙겨줄 사람은 없어서
빚다만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고 퇴근한다
다음 날 비가 쏟아져서
그 다음 날은 식칼이 빗물에 불어터져서
그 다음 날은 입에서 소 피맛이 가시질 않아서
결근했더니
햄버거가 냉기에 검게 익었다
머금던 공기는 온데간데 없고
여백따위 느낄 틈 없이 뒤엉킨 채
스스로 구워질 준비를 마쳤다
너무 익어 죽은 겉면만 걷어내고
거무죽죽한 살코기를 후라이팬에 구웠다
맛은 그냥 햄버거였다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