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건국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家屬)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주(周) 측천무후 13년(696)) 연간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각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해지(要害地)를 차지하여 수비를 굳혔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가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나머지 무리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해고는)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베고 또한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사는 크게 패하고 이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때)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게 항복을 하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무후는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병사를 잘 운용하자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나머지 무리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聖曆) 연간(698~699)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오르고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그 땅은 영주의 동쪽 2000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서로 접하고 있다. 월희 말갈(越憙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 말갈(黑水靺鞨)에 이르는데, 사방이 2000리이며, 편호(編戶)는 10여 만이고, 정예병은 수만 명이다.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고, 문자와 전적(典籍)도 상당히 있다.
『구당서』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
이 사료는 발해 왕실의 시조인 고왕(高王, 재위 698~719)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밝히고, 발해를 건국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그를 ‘고려 별종(高麗別種)’이라고 한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渤海靺鞨傳)」 기록과, ‘속말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했던 자[粟末靺鞨附高麗者]’라고 한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 등 두 기록이 있다. 대조영을 고구려의 후예로 본 경우는 『구당서』 외에 『오대회요(五代會要)』에 ‘고구려 종족[高麗種]’이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帝王韻記)』 등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구려의 옛 장수[高麗舊將]’라고 하여 대부분의 사서에서 고구려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승이 있어 논란이 거듭되어 왔다. 게다가 발해의 영토가 현재 중국 영토의 일부로 되어 있어서 중국학자들은 대조영을 말갈족으로 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을 세밀하게 분석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대조영은 고구려 장군 출신의 유민이며 또한 그를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건국한 것이라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문화적으로도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한 흔적이 많이 보이며, 따라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이 분명하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신라로 귀화한 사람, 당나라로 들어간 사람, 만주의 말갈족과 혼재하여 사는 사람 등 다양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 ?~?)과 함께 요서(遼西) 지역의 영주로 이주하였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북동부의 이민족을 통제•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전진기지로 전략적 요충 지역이었다. 이곳에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여러 종족이 모여 생활하였다.
696년 거란족 출신 이진충(李盡忠)이 요서 지역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가 통치하던 당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1년여 만에 진압되었지만, 당나라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득이 돌궐족의 힘을 빌리는 등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을 모으고 걸사비우(乞四比羽, ?~?)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나라는 대조영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대조영은 도리어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군대를 천문령(天門嶺) 전투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곧이어 당나라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모산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새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국,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발해는 지역적으로 북서쪽의 거란과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 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공격을 직접 받지 않고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당나라도 결국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발해의 건국 주체 세력은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이들은 만주 지방에서 함께 생활하던 말갈족도 포용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