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가(斯文家)의 어지러운 적
攻乎異端, 斯害也已(공호이단 사해야이)
이단을 공격하는 것 이것은 해로울 따름이다
《논어》, <爲政편 16장>
이단(異端)은 한자를 풀이하면 "다른(異) 끝(端)"이라는 뜻으로, 사전적 의미로는 정통 이론에 어긋나는 사상 및 방식을 칭한다.
사상적, 종교적 의미로는 기성 사상, 종교의 정통 교의에서 많이 벗어난 교리, 주의, 주장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자기의 생각만이 정통이고 자기와 다른 남의 생각은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은 해로울 따름이다
공자는 "남이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아보지 못 하는 것을 걱정하라"고 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의 생각만이 정통이고 자기와 다른 남의 생각은 이단이라고 몰아 붙일 수 있겠는가. 또 공자는 학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자신의 변혁"을 통해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흔히 공자의 이 문장을 놓고 "이단에 힘을 쏟아 공부하면 해로울 뿐이다"라고 풀이를 합니다.
이유는 주자가 이렇게 주해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처럼 주자를 맹신하는 자들 이렇게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어록 전체 취지를 볼 때
주자의 해석은 옳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즉 공자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남의 생각은 이단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해롭다는 이야기를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쉽고 편리한 방법을 쫓아 옳지 못한 방법에 매진하면 결국 나쁜 습관으로 인해 해로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斯文亂賊
유교(斯文)를 어지럽히는(亂) 적(賊). 정확히 말해서 송나라 주자의 해석을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을 비방할 때 쓰는 말.
구체적 용례는 성리학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에 나타난다. 흔히 조선 후기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노론 치하에서 반대 세력의 인물들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문난적 논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고, 실제로는 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지만 부작용으로 조선의 학풍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숙종조에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윤휴는 병자호란 전후로 북벌론으로 의기투합하여 송시열의 오랜 친구가 되었으나, <중용주해(中庸註解)>에서 주자의 해석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송시열과 평소 여러 번 논쟁을 벌였다. 결국 그로 인해 단단히 삐친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었다.
또한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을 통해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다 역시 사문난적에 몰렸고,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은 어찌 유학만이 진리라 할 수 있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사후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고, 소론의 대부였던 윤증 등이 주자학을 비판하다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에 몰렸다.
주희 (朱熹)
출생 1130년 10월 18일
사망 1200년 4월 23일
(향년 70세)
중국의 철학자. 활동시기는 남송, 세부분야는 유학, 특히 성리학의 창시자 쯤으로 알려져있다.
사실 창시보다는 집대성에 가깝지만,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주자학이라는 말마따나 창시자로 여겨지는 편이다.
본명은 주희(朱熹).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여러가지가 있다.
남송 휘주(현재의 중국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출생하여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사후 영종에게 문공(文公)이란 시호를 받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추봉되었다.
신안 주씨(新安 朱氏) 시조(주문공, 朱文公)이다.
‘사문(斯文)’이란 사전적으로 보면 ‘이 문화’라는 뜻이다. 논어에도 등장하는 이 말은 공자가 익히고 계승한 주(周) 왕조의 학문과 전통을 뜻하며, 공자가 경전으로 편집하여 전수한 고대의 저작을 가리킨다. 이후 ‘사문’ 그 자체로 유교의 도리, 유학자 등을 지칭했다. 그러므로 사문난적이란 유교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역적이라는 뜻이다.
사문난적이라는 말은 성리학적 명분론이 심화되어 간 조선 후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 이후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비롯한 다양한 사조가 유행했던 것과 달리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이 점차 강화되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비롯한 노론에서는 성리학적 의리를 실현시켜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주희의 경전 해석을 비판하거나 주희와 다른 새로운 경전 해석에 대하여 ‘사문난적’이라고 공격하였다.
남인 윤휴(尹鑴)가 주희의 주석에 의심을 보이며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자 서인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공격하였다.
소론 박세당 역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같은 공격을 받았다. 윤휴를 강경하게 비판했던 송시열을 따르는 사람들이 노론이 되었고, 윤휴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보인 윤선거와 윤증 부자를 따르는 이들은 소론이 되었다.
주희의 경전 해석이나 송시열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에도 ‘사문난적’으로 공격받았다.
이는 학문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원천 차단하는 것이므로 일종의 성리학 교조주의이자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은 결국 타자(他者)를 인정하지 못하는 배타성에서 나오며, 이는 사회를 더욱 경직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