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8. 23
한국 배구 남자 유스 대표팀이 일을 냈다. 이달 초 아르헨티나에서 막 내린 19세 이하(U19)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당당히 3위에 오르는 쾌거를 거뒀다.
대한 배구협회가 U19 세계선수권대회 기록을 집계한 이후 30년만에 최고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 대회 전까지는 1991년 포르투갈과 1993년 튀르키예에서 각각 3위에 올랐던 게 남자 유스 대표팀의 최고 성적이었다. 이번 U19 세계선수권대회 3위는 변화와 성장에 목마른 한국 남자배구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1993년 튀르키예 경기 당시 멤버를 보면 최태웅(현대캐피탈 감독)과 장병철(전 한국전력 감독), 석진욱 (전 OK 금융그룹 감독), 이영택(IBK 기업은행 수석코치) 등 면면이 화려했다. 당시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 무대를 뛰며 값진 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온 이들이 현재 프로팀 전현직 지도자로 한국 남자배구의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대회 결과는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 FIVB 사진제공
지난 12일 U19 세계선수권대회 3~4위 전에서 어린 선수들이 보여준 경기 내용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안정적'이었다. 중앙을 살리면서 안정적인 수비로 범실 없이 경기력을 펼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선수들의 경기력 못지않게 김장빈 U19 대표팀 감독의 지도력도 빛났다.
김장빈 감독님은 내 고등학교 은사님이기도 하다. 김 감독님은 선수의 장단점을 면밀히 파악해 팀을 하나로 묶는 능력이 탁월하셨던 분이다. 감독의 지도력 덕분일까, 아니면 선수들의 자질이 탁월했던 결과일까. 30년 만에 타이기록은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 이우진(경북 체고)은 BEST 7의 '아웃사이드 히터' 부문에 선발돼 유럽에서 온 많은 스카우트의 관심을 끌었다. 리베로 강승일(대한항공) 역시 베스트 리시버 부문 1위에 오르며 실력을 입증했다.
지난 14일 금의환향한 U19 대표팀 선수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 U19 세계선수권대회가 떠올랐다.
/ 대한배구협회 사진 제공
1999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U19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당시 우리 대표팀의 성적은 각 대륙별 예선을 거친 16개국 중 6위. 미들 블로커였던 나는 24년 전의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러시아에 패하면서 세계 배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던 것 같다.
대회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시아 1위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다. 덕분에 세계무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대회가 열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한 순간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바로 날씨. 하루 평균 기온이 40도가 넘는 고온에 숨이 막혔던 것이다. 시차 적응은 둘째치고 날씨 적응에 진땀을 뺐다.
높은 기온뿐 아니라 낯선 환경도 걸림돌이었다. 경기장 주변은 온통 사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엔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아 해외에서 대회가 열리면 선수들은 가방에 먹을 것을 잔뜩 챙겨가야 했다. 내 트렁크에도 라면과 고추장이 차고 넘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고기를 즐겨먹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볶음 고추장은 식사 때마다 가장 인기가 좋았다. 훈련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에 양고기 냄새 등 익숙하지 않은 음식 환경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수들에겐 훈련만큼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했던 대회였다.
/ FIVB 사진 제공
이번 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신의 한 수’는 이강진 재 아르헨티나 배구협회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태극마크를 달고 아르헨티나에서 경기를 해본 선수라면 이 회장을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월드리그 원정 경기를 위해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이 회장을 비롯한 우리 교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국 선수 힘내라며 만든 플래카드와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열정적인 응원은 기본이고 정성스럽게 싼 김밥에 갈비탕까지 공수하는 열의까지..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선수단을 지원했다. 한국에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만난 고마운 음식, 그리고 교민의 응원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됐던 기억이다.
이번 대회는 내가 출전했을 때보다 4개국이 늘어난 20개국이 참가했다. 예선 첫 경기였던 이란전을 아쉽게 패배로 시작했지만 두 번째 경기부터 선수들이 실력을 찾아가면서 콜롬비아, 푸에르토리코, 나이지리아(이번 대회 불참/몰수 승)를 꺾고 3승 1패,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 FIVB 사진 제공
이번 대회 가장 관심을 모은 홈팀 아르헨티나와 16강전!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접전이었다. 홈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아르헨티나의 응원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후배 선수들이 자랑스러웠다.
홈팀을 상대로 혈투 끝에 3 대 2 승리를 거둔 기세가 8강전까지 이어졌다. 이탈리아를 3 대 0으로 꺾고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준결 리그에서 다시 만난 이란에게 1 대 3으로 아쉽게 패배하며 결승 진출은 좌절됐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에게는 또 한 번의 기적이 남아있었다. 마지막 경기인 미국과 3위 결정전에서 조직력이 살아난 한국은 3 대 1로 승리하며 30년 만에 세계대회 3위라는 새 역사를 만들었다.
한국 배구가 30년 만에 좋은 성적을 거둔 배경엔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 유스 대표팀 소집 이후 프로팀들과 연습경기를 통해 실전 감각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거의 모든 프로팀과 연습경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는 기술 좋은 선배들과 연습경기는 그 어떤 연습보다 선수들의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본다.
이번 대표팀에선 신장이 좋은 세터(김관우, 배진솔)가 뿌리는 속공과 양쪽 사이드로 나가는 볼의 템포가 아주 좋았다. 여기에 아웃사이드 공격수(이우진, 윤서진, 윤경 등)의 공수 밸런스가 좋아서 조직력만 올린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FIVB 사진 제공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이 세계대회에 처음 출전하면 눈에 보이지 않은 과도한 긴장이 생기기도 하고, 물갈이나 시차 적응 등으로 애를 먹기도 한다. 아르헨티나는 지도상 우리나라와 지구 정반대 편에 있는 곳이기에 현지 적응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김장빈 감독은 이 부분을 미리 간파를 하고 대회 개막 1주일 전에 아르헨티나에 미리 입국해 일본과 콜롬비아, 푸에르토리코와 연습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이들과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하며 대회 전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대회 전 3연승은 정말이지 또 다른 신의 한 수였다고 본다.
이번 대회는 또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오버 핸드 리시브와 시간차 공격이었다.
이번 대회부터 적용된 오버핸드 리시브의 제한 조치가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오버핸드 리시브가 힘이 좋은 유럽 선수에게 유리하다는 평가로 인해 이번 대회부터 제한했는데 이 때문에 습관적으로 오버핸드 리시브를 하는 선수의 반칙이 많이 지적됐다.
/ FIVB 사진 제공
재미있는 것은 김장빈 감독은 이를 대비해서 어쩔 수 없이 오버핸드 자세에서 공을 받아야 한다면 머리로 받으라는 주문을 했고, 실제로 훈련을 하며 헤딩 연습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또 시간차 공격은 외국 선수들에게 생소하다. 보통은 중앙 후위 공격을 하기 때문에 아웃사이드 히터가 중앙으로 파고드는 공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이 경기 중간 상대를 교란시키기 충분했고, 중앙 속공이 더 살아나는 효과를 만들었다.
이번 대회에서 유스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대한 배구협회의 발 빠른 대처와 함께 김장빈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의 전략, 선수들의 노력이 하나 되어 무려 30년 만의 세계대회 3위라는 업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 FIVB 사진제공
미래 한국 배구의 주역이 될 후배들이 앞으로 있을 U21대회, 성인 대표팀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하길 바란다. 당장이라도 해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스스로 경기를 만들어가는 창의적인 배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보다 배구계 선배로서 세계 무대에서 30년 만에 큰 기록을 세우고 돌아온 후배들이 다시 한번 한국 남자 배구의 부활을 이끌어 주길 바란다.
윤봉우 / 전 프로배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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