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식하고 웅변적인 제롬이 나타남
얼마 후에 프라하의 소동이 진정되자, 후스는 자기가 맡은 베들레헴의 회당으로 돌아가서 더욱 큰 열심과 용기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전하였다. 그의 원수들은 활발하고 강력하였지만, 왕후와 많은 귀족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였다. 그의 순결하고 고상한 교훈과 경건한 생애를 로마 교도들이 전하는 타락한 교리와 그들의 탐욕적이고도 방탕한 행동과 비교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후스의 편에 가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지금까지 후스는 단독으로 활동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영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제롬이 개혁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두 사람은 완전히 연합된 생활을 하였으며, 사망도 그들을 헤어지게 할 수 없었다. 대중의 인기를 끄는 재간을 가진 제롬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 말을 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그러나 참된 인격을 형성하는 자질(資質)을 구비한 점에 있어서는 후스가 한층 더 탁월하였다. 그의 냉정한 판단력이 제롬의 충동적인 정신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잘하였다. 한편 제롬은 참으로 겸손하게 후스의 진가(眞價)를 인정하고 그의 권면을 잘 받아들였다. 그들의 연합적 활동으로 개혁 사업은 한층 더 신속히 확장되어 나갔다. 하나님께서 택함을 입은 그 사람들의 마음에 큰 빛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로마의 여러 가지 오류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할 빛을 남김없이 다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로마교의 흑암에서 나오도록 인도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큰 장애를 만나야 할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인도하여 내셨다. 그들은 모든 빛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오의 햇빛과 같이 눈부시게 밝은 빛이 주어졌었더라면, 암흑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사람들처럼 그들은 돌아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사람들이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빛을 나타내 주셨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충성된 일꾼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사람들을 차츰 깊은 개혁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콘스탄스에서 개최된 큰 회의
교회 내의 분열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세 사람의 법왕이 제각기 최상권을 장악코자 다투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국은 범죄와 소동으로 충만하여졌다. 그들은 피차에 저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속적 무력에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모집하기 위하여 애썼다. 물론 돈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위 교회에 속한 은사, 지위, 축복 등이 돈으로 매매되었다. 신부들도 역시 그들의 위에 있는 성직자들의 본을 받아 성직을 매매하고 자기의 상대자를 넘어뜨리고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싸웠다. 이러한 철면피한 행동들이 날마다 증가되어감으로 후스는 소위 종교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백성들도 로마교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교국을 비참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프라하에는 바야흐로 유혈의 참극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옛날에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왕상 18:17)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도시는 두 번째로 파문을 선고받았고, 후스는 시골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사랑하는 베들레헴 회당에서 행하던 그의 충성된 증언은 그쳤다. 이제 그는 진리의 증인으로서 그의 생명을 바치기 전에 더욱 넓은 무대에서 온 그리스도교국을 향하여 말할 것이었다. 온 유럽을 혼란에 빠지게 한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콘스탄스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시기스문트(sigismund) 황제의 희망에 따라 세 경쟁자 중의 하나인 요한 23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법왕 요한은 원래 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환영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인격과 정책에 있어서 당시의 교인들에게서뿐 아니라 타락한 주교들로부터도 힐책과 비난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시기스문트의 뜻을 반대할 수가 없었다(부록 16 참조). 회의에서 달성되어야 할 주요한 목표는 교회의 내분을 화해시키고, 이단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참칭(僭稱) 법왕과 새로운 주장을 퍼뜨리는 주동자로 지목된 얀 후스가 그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 참칭 법왕들은 모두 자기들의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직접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그들의 대표자들을 참석시켰다. 법왕 요한은 표면상으로 그 회의의 소집자였지만, 황제가 자기를 폐하려는 은밀한 목적이나 없는지, 또는 자기가 삼층관을 얻기 위하여 자행한 범죄와 그 삼층관을 욕되게 한 행위에 대하여 문책당하지나 않을지 하는 여러 가지 불안과 의구심(疑懼心)을 가지고 회의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높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과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콘스탄스 성으로 들어갔다. 시(市)의 고관들과 성직자들은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그를 환영하였다. 그의 머리 위에는 황금으로 만든 천개(天蓋)가 덮이었고, 그것을 그 지방 장관 네 사람이 붙들고 있었다. 성체(聖體)는 그의 앞에서 운반되어 가고, 추기경들의 화려한 복장들은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 때에 또 다른 여행자가 콘스탄스 성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후스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마치 영원한 이별의 길인 것처럼 느끼고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차츰 화형주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보헤미아의 왕으로부터 그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권을 받았고, 또한 시기스문트 황제가 보증해주는 여행 도중의 안전을 위한 통행권까지도 받았지만 도저히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고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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