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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宣用臣(中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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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宣佐(2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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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宣儒(2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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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夫: 德谷조승숙) |
| 宣起祉(3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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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宣允祉(3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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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宣元祉(3世) | ||||||||||||||
위와 같은 上代의 구조가 1682년까지 이어져 오다가,,,,
1682년에 족보를 修補하는 과정에서, 宣允祉의 후손중에 數人이 中始祖 및 2世가 實存했는지 의심난 祖上이라 하여 믿을 수 없으므로 宣允祉를 始祖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족보가 발행되지 못했습니다.
※ 현재 보성선씨 인구는 대략 35,000명인데, 그 중 선원지의 후손은 2,000명 내외이며, 나머지는 모두 선윤지의 후손입니다.
그리하여 선원지의 후손과 선윤지의 후손간에 시조문제로 계속 다투다가, 결국 1749년에 선윤지의 후손들은 선윤지를 시조로 하여 족보를 발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선원지의 후손들은 1757년에 선윤지의 후손들을 모두 삭제한 족보를 발행하였습니다.
이후부터 지금 현재까지도 두 계파간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선윤지를 시조로 하는 寶城宣氏大宗會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선용신을 중시조로 하는 보성선씨는 土姓이고, 선윤지를 시조로 하는 보성선씨는 고려말 明나라에서 歸化한 姓氏다.
1382년(우왕8년)에 明 皇帝의 命에 의하여 文淵閣學士인 선윤지가 고려에 사신으로 왔으며, 전라안렴사를 제수받고 남해안의 왜구를 물리치고 보성에 터를 잡아 보성선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위의 주장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로써 一蠹先生의 宣平襄公行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역사에 관해서는 전혀 門外漢인 제가 감히 東方五賢의 한분이신 一蠹先生의 글에 대하여 疑問을 갖는다면 이는 매우 不敬스러운 일이지만, 저희 門中으로서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므로 불가피하게 貴 大宗會에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史書 및 저희 族譜의 序文 等에 기초하여 우선 개략적인 史實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寶城宣氏는 보성의 土姓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려중기부터는 보성을 本貫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됨.
2. 1600년대에 寶城宣哥의 족보를 처음 발행할 때의 序文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여말 왜구칩입 및 임진왜란으로 인해 文籍이 소실되었으나 그때까지 남아있던 호구첩 및 가승에 따라, 일단 宣用臣을 中始祖로 삼아 그 아래를 기록하고, 향후 선용신 이전의 기록이 발견되면 족보를 수정하기로 함.
宣用臣의 孫子는 형이 宣元祉(선원지)이고, 동생이 宣允祉(선윤지)임
3. 1682년에 족보를 修補하는 과정에서 선윤지의 후손 중 일부가 중시조 선용신 및 2世가 의심난 祖라 하는 바람에 족보를 발행하지 못하다가, 1749년 宣允祉의 후손들이 선윤지를 始祖로 하여 족보를 따로 발행함.
4. 1757년 宣元祉의 후손들이 예전과 같이 宣用臣을 중시조로 하되, 宣允祉 이하 후손들을 모두 빼버리고 족보를 따로 발행함.
5. 1700년대 후반에 선원지의 후손들은 선윤지 후손들이 시조를 바꾸는 패륜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官廳에 고발함.
6. 18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선윤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선윤지가 明나라의 文淵閣學士로서, 明황제의 命을 받아 1382년(고려우왕 8년)에 고려에 와서 전라안렴사를 제수받고, 보성에 터를 잡아 보성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함.
7. 1831년(순조31년)에는 一門의 5충신(선윤지, 선형, 선거이, 선약해, 선세강)에 대해 賜額을 내리는 내용이 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도 선윤지가 명나라에서 왔다는 표현이 나옴.
일두집의 宣平襄公行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482년에 일두선생께서 쓰셨다는 宣炯(平襄公)行狀에 보면,
鼻祖諱允祉, 皇朝文淵閣學士라는 표현이 앞에 나옵니다.
제 생각에는 일두선생께서 정말로 이 표현을 쓰셨다면, 東方5賢의 한 분인 일두선생의 말씀이므로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위의 6.의 내용이 史實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윤지가 선용신의 둘째손자라고 기록한 저희 과거 족보 내용들은 모두 史實과 다르며, 이는 선원지 후손들이 重且大한 잘못을 저지른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일두집의 평양공행장은 보성선씨에게는 매우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가 걸려있다고 판단됩니다.
文獻公實記에 나오는 일두선생의 世系를 보면, 3世 鄭之義 어른의 配氏가 보성선씨이며, 司諫 宣一德의 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두선생의 증조할머니께서 보성선씨입니다.
따라서 일두선생께서는 이미 寶城宣氏의 存在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두선생의 父親 鄭六乙 어른께서 이시애의 난으로 戰死하셨습니다. 宣炯장군께서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훈으로 적개공신 3등에 책훈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두선생께서는 선형장군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두선생께서 선형장군의 공훈을 칭송하셨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됩니다. 행장에 열거된 공훈내용도 李朝實錄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일두선생께서 정말로 이 행장을 쓰셨을까」또는 「1800년 이후에 누군가가 필요에 따라 행장을 補完했을까」 아니면, 「일두선생의 이름을 빌려 1800년 이후에 누군가가 필요에 따라 행장을 썼을까」하는 의문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1482년에 쓰인 행장의 중간부분에成宗朝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成宗은 1457년~1494년까지 在位하셨고, 따라서成宗이란 廟號는 1494년에 처음 만들어지므로,,,, 廟號가 처음 만들어진 해(1494年)보다도 무려 12年前(1482年)에 벌써 成宗이라는 廟號를 一蠹先生께서 쓰셨다는 것은 語不成說이라고 봅니다.
②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의 박헌순 본부장님 외 두 분이 2004년에 번역하여 발간하신 「국역 일두집」의 100쪽에 보면,
위 3편 및 선 평양공(宣平襄公)의 행장(行狀)은 40년 전에 현풍(玄風)의 곽효근(郭孝根) 집에 소장되어 있던 것에서 얻었다. 행장은 이미 《실기(實記)》중에 실려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3편은 비록 적실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으나 본초(本草)에 이미 선생의 호(號)가 실려 있으므로, 감히 없애지 못하고 우선 여기에 부록하여 훗날의 상고(詳考)를 기다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의 밑줄 친 부분에서 실기(實記)는 文獻公實記를 뜻한다고 생각되는데,,, 文獻公實記를 보면 일두선생의 행장이 세 편 실려 있으나, 宣平襄公行狀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실기 가운데에 실려 있으니 다시 논할 바는 아니고, 라는 표현을 굳이 썼는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行狀도 역시 뒷날의 고증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③ 行狀 첫 대목에 ~鼻祖諱允祉 明朝文淵閣學士行本朝湖南觀察使~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宣允祉 어른께서는 훌륭한 고려충신이셨다고 믿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寶城郡」의 「人物」編에 네 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로 宣允祉 어른이 기록되고, 세 번째는 宣炯장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윤지 어른께서 명나라에서 문연각학사로서 1382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는 얘기에 대해, 이는 1800년대 이후에 억지로 만들어 낸 허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宣允祉 어른을 寶城宣氏의 始祖라고 주장하기 위해 중국에서 귀화했다는 식으로 논리를 꾸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윤지 어른은 고려말에 全羅按廉使를 하시고, 고려가 멸망함에 따라 不事二君이라 하여 보성에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또한 선윤지 어른은 은퇴후에도 야은 길재 선생, 목은 이색 선생과 교류하면서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선윤지 어른의 후손들도 다같이 인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고려에 오셨다면, 명나라를 섬기자는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조선에 협조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려 멸망에 따라 寶城으로 은퇴했다는 내용과 비교할 때, 明 황제의 命에 의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는 얘기는 매우 어색해 보입니다.
또한, 「~行本朝湖南觀察使~」라는 문구를 살펴볼 때,
선윤지 어른은 조선시대에는 불사이군이라 하여 이미 은퇴하셨는데,,,, 그리고 조선시대 관직명은 全羅道觀察使라고 하는데,,, 일두 선생 생존시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사에 대해,,, 정말로 일두 선생께서 위와 같이 行本朝湖南觀察使라고 쓰셨을까 하고 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④ 行狀의 末尾에 ~外裔河東鄭汝昌謹撰이라는 문구를 볼 때,
일두 선생의 증조부이신 鄭之義 어른의 配氏가 寶城宣氏이기 때문에 外裔라고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1세대를 30年으로 假定한다면, 鄭之義 어른의 生年은 대략 1360年生으로 假定할 수 있으며, 그의 아들이신 鄭復周 어른의 生年은 1390년생으로 假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鄭之義 어른의 配氏인 寶城宣氏께서 1390년도에 鄭復周어른을 낳으셨다면, 그 당시의 年歲가 최소한 20세는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1370年生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文獻公實記에 나오는 世系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의 配氏는 宣一德의 딸입니다. 그러면 宣一德 어른의 生年은 최소한 1350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이 文獻公實記의 世系에 나오는 人物들의 生年을 추정해 볼 때,
1350年生 정도로 추정되는 宣一德 어른은 한국의 土姓이라고 생각되며, 따라서 1382년에 명나라에서 고려에 와서 보성선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宣允祉와는 無關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두 선생께서 정말로 직접 宣平襄公行狀을 쓰셨다면,,,,,
그 당시에 本人의 世系 및 外戚까지 훤히 알고 계셨을텐데,
本人의 증조할머니와는 無關한 선윤지의 후손인 宣炯장군의 行狀을 쓰면서 外裔라는 표현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亦으로, 일두선생께서 宣一德의 外裔이므로 宣一德과 宣允祉는 같은 집안이라고 할 것이며, 따라서 선윤지가 보성선씨의 鼻祖라는 말도 語不成說입니다.
저는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宣平襄公行狀은 일두 선생께서 직접 쓰신 것이 아니라, 선용신을 시조라고 하는 宣元祉의 후손들과 宣允祉를 시조라고 하는 선윤지의 후손들이 始祖問題로 최고조로 갈등을 겪던 1800년대를 前後하여, 누군가의 의도된 계획에 따라 일두 선생의 이름을 빌려서 宣平襄公行狀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는 19세기 후반에 이 행장이 쓰여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가지 古書들을 본 바에 의하면, 1800년 이전에 발행된 古書에서 선윤지 어른께서 명나라에서 오셨다는 기록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1800년 이후에 발행된 책에서는 명나라에서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門中의 위와 같은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문중에서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조문제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고,그 주장의 바탕이 선평양공행장이므로, 이렇게 缺禮를 무릅쓰고 貴 大宗會에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