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빛 되신 주님 따라 Date 2023. 6. 25
Text 엡5,8-21
(8)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 동족이 양편으로 나뉘어져 서로에게 총질을 했던 6.25 한국전쟁 발발 73주년 날입니다. 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순국한 이들과 순직한 이들, 순교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함께 은혜 받을 성경 본문은 엡5,8-21입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빛 되신 주님 따라’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2. 먼저, 본문 8절, “(8)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씀에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빛의 자녀’라고 이어서 말합니다.
성경 요1,5-9은 빛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리고 성경 고후4,6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발광체인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태양계의 행성인 지구가 빛을 반사하듯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5,14-16에서 성도를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마치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듯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빛의 자녀입니다.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서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는 빛에 속하여 있는 사람이고 빛과 한 편을 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신 것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그 길을 따라가면 천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믿고 오직 이 길만 따라가야 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 목숨을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나눈 시116,10-16에서 시인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할 때에도 자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원하심을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을 부를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약속을 이행할 것이고, 오직 ’주의 종‘으로만 살겠다고 외칩니다. 그러다 행여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 일은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귀중한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10)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두 진영으로 완전히 갈라져 싸우고 있습니다. 그냥 생각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73년 전처럼 서로를 원수 보듯이 볼 정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전에도 그랬었습니다. 일본을 살피러 갔던 사절들이 돌아와 각자 자기의 진영논리를 따라 보고하고 임진왜란이 터지고 임금이 신의주까지 도망갈 때까지도 진영논리에 따라 상황을 해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또 진영논리에 따라 각기 다른 논공행상을 하며 싸웠습니다. 지금도 같은 사안을 놓고 진영논리에 따라 해석을 완전히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놀이에는 혼자 하는 놀이도 있지만 편을 나누어서 하는 놀이가 종류도 더 많고 재미도 더 있습니다. 편을 나누는 방법은 보통 ‘가위 바위 보’로 나누고 또 양편의 실력이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간혹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편을 나누기도 하지요. 응달말과 양짓말, 윗말과 아랫말 등입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면 모든 편은 해산이 됩니다. 간혹 내를 건너는 다리를 두고 서로 자기네 마을 다리라고 주장을 하면서 정월 대보름날 밤에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만 그것도 며칠 지나면 편 가르기는 끝이 납니다. 당연히 끝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더 무서운 편 가르기가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연, 지연 등으로 편을 만들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뭉칩니다.
세상이야 원래 그런 걸 가지고 싸우는 곳이니까 그렇다고 합시다. 정말 답답한 것은 교회마저 그런 진영논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그런 세상 것들 때문에 진영에 서야 하겠습니까? 이단도 같은 진영이면 친구로 삼을 판입니다. 교회는 어디를 따라가야 합니까? 오늘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는 빛에 속하여 있는 사람이고 빛과 한 편을 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네~ 예수님만, 예수님의 가르침만, 예수님의 뜻대로만 따라가야 합니다. 순교의 각오를 하고 오직 믿음의 길로만 가기로 결심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이어서, 9-16절 말씀에서 은혜받겠습니다. 빛에 속한 사람, 예수께 편 먹은 사람이 가기를 계속해야 하는 길은 어떤 길인지 가르쳐줍니다. 빛을 따라가는 사람, 빛과 한편이 된 사람의 삶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9절) 또한 빛과 한편이 된 사람은 빛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시도하여 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0절)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는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는 것이 옳으며(11)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잠이 들지 않아야 할 것이고(14절) 세상의 혼란에 휩쓸리지 않도록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16절)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를 유혹합니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는 예수님께 와서 속삭입니다. 신령한 능력을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사용하라고. 육신의 배고픔은 빵으로 해결하고 신령한 배고픔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하는 것이니 그것이 섞이면 안 된다고 답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연약함을 체휼하며, 희생제물이 되었다가 또 살아났다가 승천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 노릇한다고? 뭘 그렇게 복잡하고 불편한 길을 가려고 해? 여기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서 네 능력을 만민에게 보여줘. 그럼 사람들이 절로 따를텐 데~ 쉽게 가!’ ‘하나님의 길에는 쉽고 어려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옳으냐 틀리냐만 중요하거든~’ ‘좋다. 좋아. 내가 졌다. 내가 진 것으로 하고 그냥 나한테 절 한 번만 해라. 그럼 내 모든 걸 다 양보할게.’ ‘이 녀석아. 넌 그래서 안 돼.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일을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뜻만 따르느냐의 성공과 실패가 있을 뿐이야.’
감리교회의 정춘수 목사와 신석구 목사는 같이 출발은 같은 곳에서 같이 시작했다가 도착은 다른 곳에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구금되고 옥살이를 한 후부터 두 사람의 길이 달라졌습니다. 도저히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리라 판단한 정춘수는 일제에 협력을 하고 일제의 방식으로 목회의 길을 걷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신석구 목사님은 독립이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고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느냐가 중요할 뿐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목회의 길을 이어가셨습니다. 정춘수는 일제에 타협하여 감리교회 감독이 되고 통합교단을 만드는 데 힘썼으며 교회 일부를 팔아 군자금으로 총독부에 바치기까지 합니다. 신석구 목사님은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에도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강제로 은퇴를 당하여 궁벽한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합니다. 훗날 정춘수는 천주교로 피신하여 숨어 살고 친척(족손族孫)의 집으로 피난하여 살다가 그해 1951년 10월 27일 그곳에서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신석구 목사님은 젊은 사람 대신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자청하여 평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순교하셔서 감리교회의 자랑스러운 순교자가 되셨고 나라를 세운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참으로 때가 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기가 쉽지 않은 때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도는 하나님과 한 편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편 먹고 있는 사람이기에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고 있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때로 그 같은 길을 걷고 있는데 길이 순탄하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자신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까지 자신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을 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기를 감내하는 믿음이 순교자의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하늘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싸울 때에 ‘나는 네게 다른 것은 주지 아니하고 내가 졌던 십자가를 주었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빛의 자녀로 사는 길에는 길이 쉽고 어려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옳으냐 틀리냐만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빛의 자녀로 사는 성도에게 있어 성공과 실패는 일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뜻만 따르느냐에 대한 성공과 실패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또한 가슴에 새기십시오. 이 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4. 마지막으로 17-21절 말씀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17절,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18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19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20절,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21절, 피차 복종하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기에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화답하며 부르는 것은 작은 나뭇가지들이 모여 큰불을 만들 듯이 서로를 격려하여 힘과 위로를 얻게 합니다.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범사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116,17에서도 시인은 곤경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다들 혼란스러운 정치 때문에 생활 속에서 별로 유쾌하고 상쾌하며 통쾌한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즘은 아예 정치뉴스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보면 화만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이런 제게 주님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우리 가족들, 우리 성도들의 범사를 책임지시는 분은 다름 아닌 주님이십니다. 때문에 성도는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감사는 풍성하게 하는 것이고, 감사는 자주 하는 것이며, 감사는 또 다른 감사 거리를 발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난 6개월을 감사하고 앞으로 살 6개월을 감사하십시다. 그것이 주의 뜻입니다. 살전5,18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네! 감사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모든 것을 이기게 하고 견디게 하며 풍성하게 해줍니다. 감사로 풍성하게 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